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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Feb 08. 2022

[칼퇴근 랩소디]

아침, 낮,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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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20분이나 일찍 출근을 했는데도 이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머리들이 몇몇 보인다. 오늘따라 유달리 몸이 가뿐해서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고 기꺼이 상쾌한 기분으로 일찍들 출근을 한 걸까? 상투적인 아침 인사에 동태눈을 하고 만만찮은 상투적임으로 답하는 것을 보면 절대 아니다. 다들 나와 똑같은 목표로 조금이라도 더 침대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기어코 일찍 출근들을 한 거겠지.


오늘 내 목표는 단 하나. 칼퇴다.


요즘은 별다른 프로젝트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번번이 칼퇴에 실패한다. 지난주 금요일까지 정확히 2주 연속 단 하루도 정시에 퇴근 한 날이 없다. 이유 없이 뭉그적 거린 날은 정신을 차려보니 정시 퇴근 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나 있었고, 급한 요청 건들이 쏟아져 3시간이나 야근을 해야 했던 날도 있었다. 지난주까지는 그렇게 얼레벌레 정시 퇴근을 못했다지만 오늘부터는 안된다. 새해부터 벼르고 벼르던 PT를 정식으로 시작하는 날이다. 이렇게 일만 하다 죽을 수는 없다 싶어 운동을 열심히 해볼 참이라서.


칼퇴를 부르는 필살 기술, to-do 리스트를 작성한다.


1.다음 주부터 시작할 7차 마케팅 운영안 기획

2. 당장 내일 오전에 있을 광고 아이디어 미팅 준비

3. 오늘 2시에 진행할 광고 대행사 미팅

4. 지난주에 깐깐한 팀장에게 끝내 최종 컨펌을 못 받은 고 디자인 시안 수정하기


오케이, 완벽하다.


탕비실로 가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쓰리 샷으로 뽑아 셀프로 아아메를 제조한다. 지금부터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보여주겠다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자리로 돌아와 비장하게 한 모금 들이켜면서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켠다. 나눔 고딕, 36pt 선택. 맨 윗줄에 기세등등하게 적어보는 제목. 제7차 마케팅 운영안.


제목은 호기롭게 뽑았지만 머리는 멍하다. 촐싹맞게 깜빡이는 커서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야, 너. 뭐라도 뱉어내보라고. 어제 자기 전 샤워할 때 생각난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뭐더라.. 속절없이 답보 상태에 있는 커서를 바라보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황당무계한 아이디어로라도 채워야 하는 시트의 공백들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아휴. 한숨을 푹 쉬는 순간 메신저로 메시지가 날아든다.


‘선생님. 오늘 점심 뭐 드실? 전 국물이 땡기는데요.’


다른 팀에 있는 입사 동기 놈이다. 벌써 점심 메뉴를 묻는다고? 시계를 확인하니 10시 40분이다.


'길 건너 사거리 차돌 짬뽕. 맛집이라 늦게 가면 웨이팅 있으니까 11시 반에 고고.’


'ㅇㅋ. 이따 저녁에 퇴근하고 한잔 어때?’


‘안돼. 나 PT 있어'


‘누가 칼퇴는 시켜준대고? ㅋㅋ'


‘닥쳐. 무조건 칼퇴다 오늘.’


#


짬뽕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아끼는 흰 니트를 입은 날이라 앞치마까지 해가며 좀스럽게 보일 정도로 조심스레 먹었지만 옆구리에 께에 묻은 짬뽕 국물 자국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짬뽕을 어떻게 먹으면 옆구리에도 튀는 걸까?


오전 업무 시간은 그리 길더니 점심시간은 쏜살같다.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양치까지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오니 아까 그 커서가 똑같이 깜빡이며 나를 반긴다. '안녕? 잠깐 현실 도피 잘 하고 왔니?’라고 얄미운 대사를 날리는 것 같이.


마음을 다 잡고 작성을 시작한다. 쓰다 보니 지난 차수 마케팅 운영안과 점점 별반 다를 게 없어지는 것 같아 약간의 수정을 조금씩 보탠다. 직장 생활 7년 차. 같은 말을 달리 보이도록 적는 재주만 늘어간다.


운영안 작성을 겨우 끝내고 보니 벌써 오후 2시. 대행사와의 미팅이 있는 시간이지만 요즘은 모든 미팅을 거의 화상으로 미팅을 진행해서 부담이 덜하다. 적당히 듣는 척하면서 중간중간 다른 할 일을 조금씩 할 수도 있고.


지루한 미팅도 끝나고 지루한 광고 아이디어를 좀 준비해 보려는 찰나, 다시 메신저가 깜빡인다.


‘수현님, 그거 들으셨어요?'


딱 봐도 잡담 테크로 빠지는 멘트인데… 오늘 진짜 칼퇴 해야 하는데. 아뿔싸 안 읽은 척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현기증 나는 멘트다.


그거 들으셨어요? 난 당신과 누군가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싶어요.라는 속마음의 정중한 표현이다.


'뭘요?’


‘연말 상향 리뷰 있잖아요. 3팀 팀장한테 팀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부족' 줬다대요. 팀원이 6명인데 '부족'이 6개 나왔대요 ㅋㅋㅋ 비품 가지러 올라갔다가 봤는데 지금 3팀 분위기 완전 쎄함. 거진 초상집.’


‘아마추어들이네.'


3팀은 조직된 지 이제 갓 6개월이 된 신생 팀이다.


팀장조차도 이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팀원들은 비교적 저연차 주니어들이다. 아마 이런 평가 제도도 제대로 경험한 적 없는 모양이다.


‘티 안 나게 좋은 것도 좀 섞어줘야죠. 아무리 익명이어도 전원이 부족을 주면 그게 어디 익명이겠음?;;’


'그러니까요 ㅋㅋㅋㅋㅋㅋ'


‘6-부족 사태’를 시작으로 신명 나게 회사를 까다 보니 벌써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단 두 시간.

누군가 나를 태그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팀장이다.


@수현님 지난주에 제가 수정 요청드린 광고 시안, 수정 다 마치셨을까요? 그리고 좀 전에 올려주신 마케팅 운영안 봤는데 수정되어야 할 것 같은 부분들이 좀 있어서 표시해 첨부 드려요. 오늘까지 수정해서 다시 올려주세요.


이야. 오늘 처음 올린 기획안을 오늘까지 수정해서 재컨펌 받으라는 거는 인간적으로 좀 아니지 않냐? 지금 오후 4시라고. 순간적으로 허파가 뒤집히는 것처럼 속이 뜨거워지지만 손가락만큼은 세상 차분하다.


‘네 알겠습니다.’


'넵'이 아니라 ‘네'인 건 마지막 자존심이다.


#


‘팀장님, 수정 요청 주신 광고 시안과 마케팅 운영안 다시 공유드립니다.'


두 시간 빡세게 집중해서 수정해 넘겨버리고 나니, 오후 6시. 퇴근시간이다. 내일 있을 아이디어 회의는 오전 10시. 미룰 재간이 없다. 결국 인정해야 한다. 난 오늘도 칼퇴에 실패했다.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톡을 전송한다. 첫날부터 못 간다는 말을 하려니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다. 제가 수요일에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맞춰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실을 쓱 둘러보니 나처럼 칼퇴에 실패한 영혼들이 보인다. 개중에는 오늘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있던 머리들도 몇몇 보인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군.


이왕 야근할 거 저녁식사로 배달을 시켜 먹을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대충 때울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다시 메신저가 울린다.


아까 점심때 짬뽕을 같이 먹은 동기 놈이다.


‘칼퇴 못하고 PT도 못 간 거 다 보인다. 술이나 먹자.’


고개를 파티션 너머로 빼꼼 빼보니 저 너머 우리 팀이랑 자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끝 부서에서 똑같이 파티션 위로 머리만 내밀고 술잔 터는 제스처를 하는 동기가 보인다. 멀리서도 집에 못 간 내 정수리가 보였나 보다. 눈도 좋구나.


‘아... 나 아이디어 내야 하는데…..

어디로 갈 건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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