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업 일치'를 꿈꾸던 직장인의 현실 직시 에세이
나는 사실 '덕업 일치'가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다.
‘회사도 하루에 8시간이나 쓰는 곳인데 왜 다들 괴로워하며 앉아 있을까? 이왕 하는 거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돈도 벌면 되잖아'라고 아주 간단히 생각했다.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일하며 내 직업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
본캐와 부캐가 같은 사람.
스물다섯 살의 봄. 이제 막 학사모를 벗어던진 나는 그렇게 꽤 괜찮은 인생을 사는 게 결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거 의외로 어려운데?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둔 시점까지도 어떤 직업을 갖겠다거나, 어느 기업에 꼭 들어가야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그냥저냥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자격증을 따고 학교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좋은 학점을 받고, 장학금을 받으며 정해진 만큼은 하는 그런 날들을 보냈었다.
그러다 번뜩 기자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행력 하나는 끝내줬기 때문에 단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한 유명 기자가 하는 언론사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3개월 과정을 채 마치기도 전에 여의도의 한 언론사에 입사하게 됐다.
남들보다 늦게 정한 진로. 학생에서 기자로 불과 석 달 만에 바뀌어버린 내 위치. 불안감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컸다. 게다가 글 쓰는 일을 좋아했던 내가 그토록 원했던 '덕업 일치'가 가능해지는 직업이었으니까. 뛰어나진 않더라도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기자 생활은 내가 상상도 못 했던 장벽 투성이었다.
뛰어난 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는 글쓰기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이 있다. 모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변죽, 미세한 궁금증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호기심, 상대방이 대답하길 꺼려하는 질문도 여러 번 캐물을 줄 아는 집요함이다.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꾸준한 책 읽기로부터 얻은 문장력뿐, 처음 본 사람과 술잔을 기울일 줄 아는 넉살도, 애초에 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는 끈질김도 없었다.
특히나 가장 괴로운 시간은 '티타임'이었다. 언론계에서 '티타임'은 출입처의 홍보팀이 기자에게 밥이나 커피를 사는 자리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거나 간혹 가다가는 술자리까지 하는 그런 자리.
(당시는 김영란법이 없던 시기여서 그런 자리가 더욱 만연했고, 김영란법이 생긴 이후에는 법으로 정해진 금액대에 맞추어 정말 간소한 식사만 하거나 밥을 먹더라도 홍보팀과 기자가 각각 더치페이를 하는 풍경이 늘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나는 그런 자리에 도통 익숙해지질 못했다. 출입 기자라고 해봤자 내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이었고, 기자를 응대하기 위해 홍보팀에서 나오는 직원들은 대개 40대 중후반에서 5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내가 이미 사회생활을 한참 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한 이들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자연스레 주고받을 수 있는 얘깃거리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의 난 아직 초등학생인 사촌동생들과 차라리 더 대화가 잘 통했으니까.
더욱이 그들이 내게 비싼 식사를 대접하며 어떤 것들을 은근히 바라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 더욱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출입처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를 의식적으로 점점 줄이게 됐고, 어느샌가부터 모든 취재는 전화 취재로 대체하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마 내가 세상에서 가장 발이 좁은 기자가 아니었을까 반성해본다.
좋은 기사를 쓰는 것만큼이나 출입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기자의 기본적인 도리다. 멋모르는 사람이 가장 용감하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해야 하는 직무에서 정말 답도 없이 한참을 떨어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매일 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취재 기사를 썼고, 그 기사들은 일면 탑에 걸렸지만 사실 뜯어보면 직접 발로 뛰며 얻은 것은 단 한 문장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맡은 일을 빼지 않고 성실히 하면서도 허울만으로 일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1년을 보내고, 1년 1개월째 되던 날 나는 기자직을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