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처음 가져본 나만의 방은 창문 없는 내측방이었다
싸움 구경에 닳은 나는 작은 스크래치에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이 모습을 대학교 2학년 때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아끼는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일이 드문드문 생기면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상하지 않게 지키려면 집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언젠가 독립을 한다면 이때쯤 하겠다고 생각한 나이는 스물둘에서 스물셋 정도였다. 마침 대학교 2학년을 마친 때였고 고등학생이던 내가 독립하리라 꿈꿨던 그 나이를 받아두고 있었다.
호시탐탐 어떻게든 집 밖에 나갈 궁리만 하던 스물두 살의 나는 휴학생이었다. 재학 중에는 주말 아르바이트 를 했고, 휴학 중에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필름도 사야 했고 책도 사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집 밖으로 계속 나다니려면 돈이 필요했다. 집에다가는 나중에 취직할 때 유리하려면 이런저런 대외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탐탁지 않아 하던 부모님도 그런 이유라면 더는 말리지 못했다.
휴학 하는 동안에는 틈만 나면 대구 밖에 있었다. 틈틈이 알바를 빼면서 전주와 제천, 서울로 쏘다녔다. 보통 영화제 자원봉사는 딱 영화제 기간에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영화제 전에는 입단식과 교육, 영화제 후에는 해단식과 단합모임 같은 걸로 계속 그 지역에 갈 일을 만든다. 게다가 나는 이제 막 첫 호를 발간하는 웹진 팀의 리포터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2주에 한 번은 꼭 고속버스에 올랐다. 지리산을 둘러가는 전주행 버스는 편도로 4시간이 걸렸다.
그 모든 게 다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빌미였다. 빌미로 만든 경험이었지만 낯선 도시에 모인 방방곡곡의 얼굴들은 내게 자극을 줬다. 사람이란 프리즘으로 새로운 세계를 봤고, 그 세계에는 또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있든,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든 간에 비슷한 또래들은 상대의 취향을 통해 새로 배우고 감화되어 갔다. 함께 어울리다가 서로에게 반하게 되는 지점에서 다들 자기 세계의 작고 여린 싹을 발견했다. 서로가 영감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기를 함께 통과하고 있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뜨거운 반년을 보냈던 나는 남은 반년은 아예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지내다 보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에 기댔다. 솔직히 그동안 쓴 교통비로 따지면 두세 달 치 월세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서울은 시급도 세니까, 아니 적어도 최저 시급은 맞춰서 줄 테니까 알바로 월세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지 않을까? 믿을 건 자신의 알바 이력밖에 없는 스물둘의 낙관이란, 고작 최저시급을 보장받고 일할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어떨지도 모르고. 솔직히 시급 대비 월세를 너무 낮잡아봤다. 당시 2006년 최저시급은 3,100원. 주 5일 하루 8시간을 바짝 일해도 한 달이면 55만원 남짓이었다. 대구에서는 그마저도 받기 힘들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서울에서 자기만의 방을 찾게 되었다. 스물두 살에 찾은 창문 없는 고시원이 내 첫 번째 방이었다.
고시원이 고시 준비를 하는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게 된 지는 오래다. 고시원, 고시텔, 원룸텔, 리빙텔로 불리는 주거 공간들은 쉽게 말하면 현대식 쪽방이다. 오피스텔의 ‘-텔’을 붙임으로써 단순히 잠만 자는 곳 이상의 주거 시설이 갖춰져 있음을 암시했다. ‘-텔’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만든 이상한 신조어들은 싸구려 보석, 가짜 명품 같은 느낌을 줬다. 럭셔리를 부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가 쪽방이 아니게 되진 않았다. 고시원, 고시텔, 원룸텔 등 부르는 이름도 여러 가지이니 여기서는 편의상 ‘원룸텔’로 전부 통일해서 부르겠다.
손바닥만 한 창문이지만 있고 없음에 따라 방값은 꽤 차이가 난다. 그래서 ‘손바닥만 한 창문이 무슨 효용이 있겠어’ 싶어 좀 더 저렴한 ‘창문 없는 내측방’에 입주했지만 하루 만에 후회했다. 틈 하나 없는 방은 자연광 한 뼘 들지 않는 완벽한 밀실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시계를 보지 않으면 지금이 밤인지 아침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피로에 전 몸의 생체시계도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되어서, 주말이면 내가 아침 6시에 깬 건지 오후 6시까지 잔 건지 모르겠는 날들도 종종 있었다. 채광이 없으니 한 번 잠들면 너무 깊이 잠들어서 알람 소리에 못 깨고 지각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더 많은 방을 만들기 위해 복도에다 창문 없는 내측방을 만든 원룸텔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살아볼 때 그 불편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인간이, 아침에 햇빛 하나 없는 곳에서 눈을 떠야 하다니 정말 감옥도 아니고 뭐란 말인지. 하지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원룸텔은 다 그런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사람이 살 구조가 아니라 건물주의 돈이 되는 구조.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주거 형태는 전적으로 덜 간절한 사람의 편의에 맞게 설계되고 대물림된다.
그래도 정신승리를 해야 살 수 있으니, 있는 긍정 없는 긍정 다 끌어와서 생각해봤을 때 얻어걸린 좋은 점도 하나 있다. 바로 웃풍이 없다는 것. 창문이 손바닥만 한 데다, 다닥다닥 붙은 십여 개의 방들이 서로 부대끼며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얻어걸린 장점이다. 방문도 일반 나무문이 아닌 유사시에 대비한 육중한 방화문이기 때문에 웃풍이 들이밀 틈이 없다. 물론 저렴한 건축 자재로 지은 건물은 방이 아무리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한기가 든다.
방을 나설 때마다 열쇠로 방화문을 잠그고 복도를 나서면 한쪽 끝에 붙어 있는 비상구 표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비상구 표시를 주시하곤 했다. 유사시 이 좁은 방과 복도를 내가 제일 먼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가능하면 제발 ‘유사시’와 같은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창문 없는 방에서의 밤이 거듭될 때마다 자꾸만 어두워지는 나 자신이 걱정된 나머지 한 달도 채 못 채우고 다음 원룸텔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혜화를 떠난 홍대였다.
*2020년 3월에 나온 1인 가구 에세이집 《삶이 고이는 방, 호수》에 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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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M원룸텔 대학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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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006.10 (1개월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