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측 방을 떠나 두 번째 고시원으로 이주하다
탈출! 창문 없는 방도, 별로였던 알바도!
창문 없는 대학로 원룸텔에서 창문 있는 홍대 원룸텔로 방을 옮겼다. 옮기면서 처음 구했던 알바도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사무보조로 들어간 모 아카데미에는 결국 적응하지 못했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수준으로 엑셀도 다루지 못했고, 그 아카데미만의 꽉 잡힌 군기는 보는 입장에서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알바 시작하고 3주 만에 따라갔던 단원 엠티는 정말 최악이었는데,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술자리에서의 신경전과 뒷말에는 귀를 막고 싶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그림자처럼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 공기 속에 있는 것조차 힘들고 불편했다. 잘 데도 없어 큰 방 한편에서 쪽잠을 잔 다음 날, 더는 이 일을 못 하겠다고 그만둘 결심을 했다.
학원에 다니게 돼서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핑계를 댔지만 팀에서는 크게 뭐라 하지 않았다. 문제는 경영진이었다. 일을 관두고 약속된 일자에 급여가 들어오지 않아 연락한 나에게 경영 담당 대표는 빅 엿을 먹였다. ‘안 주면 늦어지나 보다 하고 들어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것이지, 그따위로 굴면 사회생활 못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받을 돈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내가 왜 욕을 들어야 하지? 정당한 요구 앞에서 그딴 식으로 굴면 앞으로 어디 가서 일 못 한다며 들이미는 논리는 나쁜 경영자들이 어린 사람들 겁줄 때 쓰던 치사한 버릇이었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 다음 달 원룸텔 방값 낼 돈도 없는 상황이 제일 무서웠다. 당장 내려오라고 할까 봐 집에는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다. 그러다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있던 고등학교 선배에게 돈 얘기를 꺼냈다. 선뜻 돈을 빌려준 고마운 선배 덕에 홍대 원룸텔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고 며칠 뒤, 이제나저제나 마음 졸인 끝에 무사히 알바비가 들어왔다. 최저시급으로 얄짤 없이 계산해 받은 돈은 40만 원 남짓이었다. 고작 그거 가지고 서슬 퍼런 척 화를 냈던 건가.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이 이런 것이었다. 그 돈으로 빌린 원룸텔비 26만 원을 갚고, 남은 돈으로 한동안 생활해야 했다. 이후 홍대 쪽에서 평일 사무보조 알바와 주말 카페 알바를 구했다. 먹고 살 방편을 만들어서 다행이었다.
창문 있는 26만 원짜리 홍대 원룸텔
새로 입주한 홍대 원룸텔은 바깥 창문이 있으면서도 대학로 M하우스의 내측 방보다 저렴했다. 신식 시설도 아니고 홍대 미술학원 거리 쪽에서 떨어진 위치 덕분이었다. 방문은 철컹철컹한 방화문이 아닌 짙은 밤색 나무문이었다. 손때 묻은 손잡이가 달린 오래된 방문은 열쇠를 꼭 걸어 잠그고 다녀도 어딘가 헐거웠다. 누추함을 겨우 면했지만 본체는 꽤나 낡은 고시원이었다. 침대 하나는 M하우스보다 넓어서 좋았다. 그래 봤자 일반 싱글 침대였지만.
보증금 없이 급히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는 원룸텔만 한 선택지가 없다. 복학까지는 4개월 남짓. 이것도 다 인생 경험이겠거니, 나중에 다 피와 살이 되겠거니 여기며 꿋꿋한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걸로 외로운 원룸텔 생활 속에 고립되지 않으려 했다. 씩씩할 것, 울지 않을 것.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그럴듯하지만 인과관계에 명확한 결함이 있는 이 슬로건이 유행하기 전인데도, 이미 어떤 환경적인 압박으로 인해 스스로 캔디처럼 살기를 주문하고 있었다. 재산도 없고 재능도 없으니 ‘열심히’로 나를 똘똘 뭉쳐 놓지 않으면 쉽게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성장하는 느낌이 들 때면 가끔 자랑스러웠지만, 실은 성장할 것투성이인 서툰 내가 너무나도 꼴 보기 싫었던 스물두 살. 낯선 도시에서 끈 떨어진 연이 되지 않으려고 알바하는 틈틈이 보고 듣고 느끼려고 애를 썼다. 서울 지리가 조금씩 눈에 드는 건 좋았지만 실은 복학 뒤가 막막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지난달보다 이번 달 형편이 나아진 것이었다.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
두 번째 원룸텔에는 내 또래 외 여러 나이대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중엔 젊은 아주머니도 있었는데 나는 그 아주머니를 싫어했다. 이유는 냄새 때문이었다. 공용 세탁기와 욕실이 있는 곳에서 그 사람이 빨래를 하거나 샤워를 하거나, 아무튼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나로서는 처음 맡아보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식초 샤워라도 하고 나오는 건가? 다른 방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너무 참을 수 없이 역한 냄새여서 복도조차 다니기 힘들었다. 추측할 수도 없는 냄새를 참느라, 부엌에서 내 방까지 이어진 디귿자 복도를 숨을 참고 걷곤 했다. 아무리 빠르게 걸어도 방문을 열기 전에 이미 폐가 터질 것 같았다.
당시 홍대 원룸텔에는 한 층에 열댓 명이 살았다. 생판 남인 사람들과 방문과 벽으로만 구분된 생활은 원치 않게 동선이 꼬였고, 은근한 불편함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음식 냄새, 욕실 냄새, 그 외 생활에 얽힌 각종 냄새들이 훅 끼칠 때마다 불쾌했다. 그런 환경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원하는 주거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불행하게 했다.
공기 중에 배어 있는 불편함을 적절히 무시하거나 견디지 못한다면 원룸텔과 같은 성냥갑 생활은 더 숨 막히게 나를 옥죄일 것이었다. 적응하거나 무뎌지는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부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목례 정도는 했었지만 나중에는 눈과 입과 귀를 다 닫고 살았다. 될 수 있는 한 나 자신이 타인에게도 그림자였으면, 무엇보다 타인이 나에게 그림자보다도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좁은 방보다 더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게 바로 원룸텔 공동생활 구역이었다. 좁은 내 방이 내겐 가장 편한 곳이었다.
*2020년 3월에 나온 1인 가구 에세이집 《삶이 고이는 방, 호수》에 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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