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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Aug 02. 2022

러닝타임 2시간의 폭우상영관

숲과 내가 숨을 나눠 가지는 여름


여행지에 가면 "비 오는 날 꼭 숲에 가보세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숲과 바다가 흔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찾은 여행자에게 비가 오면 꼭 비자림에 가보라고 했다.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풀냄새 짙은 그 숲속만큼은 아늑하다고, 사람들은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호의를 담아 그 말을 건넸다. 언젠가 비가 온 직후에 숲에 갔던 기억을 떠올려봤다. 비에 젖은 흙냄새, 나무뿌리가 젖으며 흙을 타고 올라오던 땅속의 냄새, 떨어지는 빗방울과 다툰 잎사귀가 푸드덕거리고 난 후의 풍경, 비 오는 날에 숲에 가면 이 모든 것에 주의를 둘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보지 못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숲에 가지 않을 핑계가 생겨났다. 숲에 갔다가 옷이 다 젖으면 어디서 갈아입지? 뚜벅이 여행자인 내가 젖은 옷을 입고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 길로 일정을 접고 숙소로 귀가해야 할 텐데. 비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비 오는 숲에 갈 도리가 없었다. 갖가지 이유를 저글링 하며 머뭇대는 동안 비 오는 숲에 가는 일은 어느새 나의 로망이 되었다.


하루 한 번씩 비가 오던 2021년의 여름은 비 오는 숲에 가기 전에 예행연습을 하기 딱 좋았다. 평일 낮에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속 시원하게 감상했다. 베란다 밖 먼발치의 벚나무는 빗방울의 중력을 이고 지며 휘청거렸고, 세차게 내린 비는 때때로 음악소리마저 소거했다. 때마침 퇴근 시간에 비가 쏟아지면 우산을 들고 거리를 걸었다. 지금 숲에 가면 이 비 냄새에 더해 풀과 흙냄새가 강물처럼 불어날 것이었다.


마침내 비 오는 토요일을 맞이한 나는 수목원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내린 비가 아침까지 쏟아지는 걸 보고 설렜다. 가는 동안 바짓단이 다 젖을 만큼 거센 폭우였다. 앞은 트이고 바닥은 평탄한 산책로에서 비가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구나. 비도 돌아다닐 수 있구나.' 유난히 물기를 많이 머금은 비구름이 강한 비를 뿌리며 이쪽저쪽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바람까지 가세해 거칠게 내리치는 비의 빗금이 신기해서 폭우 속에 우산을 쓰고 한참을 서 있었다. 눈으로 비의 행로를 유심히 쫓아다녔다.


폭우로 물이 불어서 땅 위에 커다란 물이랑이 생겼다. 슬리퍼 신은 발을 물이랑 위에 갖다 대고 첨벙거리며 놀았다. 내 발을 피해서 물길이 바뀌니까 재미있었다. 어릴 때도 안 해본 물장난이었다. 분명 지금 벙글거리는 사람은 내가 맞긴 한데, 온전히 지금의 나로서만 즐거운 기분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그리운 곳에 잠든 내 안의 여린 존재가 신이 난 듯한 낯선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이 같은 마음을 반갑게 끌어안았다. 빗방울이 물웅덩이에도, 내 마음에도 반듯한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빼곡하던 빗방울이 듬성듬성해졌나 싶더니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세찬 비에 온몸이 쓸린 나무들의 냄새가 48주위에 가득 차올랐다. 비 냄새에 가려졌던 풀과 흙냄새도 습기 속에 스며들었다. 이곳은 하늘을 가릴 만큼 나무가 우거진 숲이 아니라서 여행지의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아늑한 덩굴 속 이끼가 된 기분은 느끼지 못했지만, 탁 트인 정경을 비가 빼곡히 메우는 모습이 정말 멋졌다. 빼곡히 씻어내는 비의 직선적인 면모를 사랑하는 이 마음이 내 솔직한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나무 숲을 돌아다니며 습기에 배인 나무 냄새를 맡는 동안 비가 잠시 그쳤다.


이날 나는 약 2시간 정도 이곳에 있었고, 비가 그친 20분은 폭우 상영관의 인터미션 같은 거였다. 웬일인지 해가 반짝 났고 갑자기 등장한 여름 태양이 쫄딱 젖은 바지와 티셔츠를 바싹 말려줬다. 인터미션이 끝나자 또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다. 굵은 빗방울을 한 방울 맞고는 '물방울이 굵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와르르 쏟아지던 소나기. 거대한 수조의 밸브를 잠깐 잠갔던 것일 뿐 다시 비가 재상영될 줄은 몰랐다. 하늘은 언제든 쏟아질 기세였고, 무거운 구름을 잔뜩 포진시켜 놓고 있었다.


한차례 빗속을 더 거닐다가 햇빛 가득한 긴긴 엔딩 크레딧을 맞이했다. 올해는 여우비를 여러 번 봤다. 성급하게 나온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파란 하늘에서 여우비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비가 그칠 때쯤 바로 구름이 물러가고 해가 들이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비 갠 후 맑은 하늘을 여러 번 봤던 2021년의 여름은 참 운이 좋았다.



*2022 2월에 만든 에세이북 장면채집록 흰그루》에 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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