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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Ko Oct 28. 2016

여유 넘치는 아침, 한적한 비탈길을 오르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마흔여섯 번째 이야기

론다에서의 이튿날 아침. 4성급 호텔의 푸짐한 아침식사로 배를 두둑이 채웠다. 오래간만에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을 보낸 것은 어제 이미 론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마음껏 감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잔뜩 찌푸린 날씨를 바라보며, '호텔에서 오랜만에 게으름을 피워볼까? 게다가 무려 4성급이잖아!'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든다. 하지만 나의 내면은 언제나 천사가 지배한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뚱이를 이끌고 길을 나섰다. 하늘 위 구름도 나처럼 물을 잔뜩 머금은 모양이다.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토해낼 것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가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라도르에서 누에보 다리를 건너 구 시가지로 접어들면서 만난 아줄레주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깎아진 듯한 협곡과 양 옆 절벽 위에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그리고 저 너머 보이는 푸른 들판까지, 론다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을 두고 호텔에서 뒹굴거릴 수는 없다. 한 발짝씩 옮기는 발걸음이 아까보다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지?' 또 다른 고민이 머릿속을 때리기 시작한다. 사실 론다에 대해 조사한 것은 누에보 다리가 전부! 뭘 봐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냥 동네 마실 나가는 기분으로 나섰지만, 가파른 언덕과 그 위에 걸린 잿빛 구름을 마주하니 이내 생각이 바뀐다.  


'흠... 잘못하다가는 고생만 오질 나게 하겠구나.'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데..'

'고생을 할 땐 하더라도, 뭐 하나 건져야겠지?'  


스마트폰을 켜고 네이버를 뒤적여보지만, 누에보 다리 외에는 딱히 볼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들어간 '스투비플래너'는 그나마 아랍인의 목욕탕(Banos Arabes)을 구시가지의 볼거리라고 추천한다. 뭘 더 이상 고민할까? 구글 지도에 Banos Arabes를 또박또박 입력했다. 

아랍인의 목욕탕으로 가는 길에 만난 건물, 뭔지도 모르고 밖에 걸린 'Palacio del Marques de Salvatierra'라는 팻말만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론다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저택이라고 한다. 16세기에 지어진 귀족의 저택인데, 1784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사진 속 창문의 좌우로 남녀 조각상이 1쌍씩 세워져 있다. 자세히 보면 손발이 묶여 있는데,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에서 끌려온 노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가파른 언덕길을 열심히 오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니 탁 트인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푸르른 초원 가운데 자리한 널찍한 승마장에서는 기수 두 명이 나란히 한가로운 승마를 즐기고 있었다. 평화롭고 아늑한 유럽의 시골마을다운 풍경이다. 지금도 최순실과 딸 정유라는 어디선가 저렇게 승마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얼핏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골목길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비탈길이 제법 아찔하다. '흠... 그래도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이니 좀 덜 힘들겠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애써 위로해본다. 

누에보 다리가 건축되기 전, 구 시가지로 접어드는 관문 역할을 했던 펠리페 5세의 문이다. 문 자체는 볼거리라 할 수 없지만, 문 너머 저편의 하얀 마을, 이름하여 푸에블로 블랑코스(Pueblo Blancos)는 제법 볼 만하다.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날씨가 맑은 날을 잘 골라 스페인 남부를 꼭 한번 다시 여행해보고 싶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가며 열심히 길을 걷다가 누에보 다리를 쏙 빼닮은 다리 하나를 만났다. 비에호 다리(Puente Viejo)라 불리는 이 녀석은 다리는 물론 그 아래 협곡까지 누에보 다리의 풍광을 쏙 빼닮았다. 스페인어로 Viejo는 old, Nuevo는 new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누에보 다리가 건설되기 전, 비에호 다리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비에호 다리 옆에는 아담한 건물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마치 누에보 다리 옆의 파라도르 호텔처럼. 그나저나 저기 사는 사람들은 종아리가 엄청 딴딴할 것 같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릴 테니 말이다. 

드디어 도착한 아랍인의 목욕탕. 아쉽게도 문을 열지 않았다. 저때가 휴일이어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이른 시각에 도착해 개장하기 전이었는지 정확히 생각이 나진 않는다. 뭐 블로그 등을 살펴보니 굳이 안에 들어가서 구경할 필요는 없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궁금한 마음에 문에 송송 뚫린 네모난 구멍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봤다. 마치 외계인의 벙커같이 생긴 것이 보인다. 인터넷에서 영상을 찾아보니 아마 저기가 증기 사우나를 하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 참고 영상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45232&cid=51670&categoryId=51672  

주변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니 아랍인의 목욕탕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론다의 가파른 오르막길이 새삼 사랑스러워진다. 아치로 둘러싸인 곳을 지나 입구로 들어가 온탕에서 목욕을 시작한 후, 내부 통로를 따라 온탕과 사우나, 냉탕 등 내부 시설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이 곳으로 나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3세기에 이렇게 완벽한 목욕시설을 갖추었다니! 새삼 아랍인들이 대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슬람 민족들은 주로 서남아시아의 모래와 먼지가 많은 지역에서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목욕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내가 목욕을 싫어하는 것은 비옥한 땅에서 남부럽지 않게 귀공자처럼 자라왔던 어린 시절 때문이리라... 

뭐 딱히 대단하거나 인상적인 볼거리는 없었지만, 론다의 구시가지는 반나절의 짧은 시간 동안 운동삼아 돌아보기에 딱 좋을만한 사이즈다. 날씨가 흐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시내를 걷는 내내 관광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한적한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다음 여행도 구상할 수 있었던 아주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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