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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율 Apr 06. 2017

시카고, 미시간 호숫가에서

미시간 호수에서 본 시카고 풍경


 몇 개월 동안 바쁜 일정에 쫓겨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열정이 넘치던 강사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요구를 했고, 그에 따라 매일매일이 과제와 스터디로 마무리되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내 방으로 돌아가는 시간, 기숙사 복도는 바늘 떨어뜨리는 소리도 크게 들릴 듯 조용했고, 창 밖엔 얼음처럼 시린 밤하늘이 걸려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과제를 다 했구나.
그러다 전공 강의의 강사가 바뀌면서 비로소 한숨 돌리게 되었다. 주말에 드디어 전공책이 아닌, 시카고를 보게 되다니! 때로는 평일에도 수업이 끝난 후에 여유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힘든 시간을 경험해보니 느긋한 시간의 소중함도 알게 되는 법이다.


  그 주말, 가장 먼저 다시 찾은 곳이 미시간 호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청 큰 담수호에 갈매기가 살다니, 하며 신기했던 장소였다. 겨울에 꽁꽁 얼어 있는 모습만 봐서 평소의 풍경이 궁금했던 정도. 그런데 웬걸, 막연히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뛰어넘는 풍광이 나를 맞이한다. 나는 이내 미시간 호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느 방향으로도 시야에 무엇 하나 걸리는 것 없이 탁 트인 호수가 저 멀리 수평선까지 이어진다. 약간의 초록빛을 띤 푸른 수색은 또 어떠한가.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과 나무들은 평화로움을 더하고, 저 멀리 보이는 높다란 건축물들마저 처음부터 호수를 염두에 두고 만든 듯 어우러진다. 시카고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이자, 가장 먼저 다시 가고 싶은 곳 역시 미시간 호수, 그 호숫가이다. 시카고에서 찍은 사진이나 이후에 그린 그림 중에 미시간 호수가 유난히 많은 이유도 그래서이다.


미시간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들


 호숫가를 따라 조성된 길은 남북으로 29km가량 길게 연결된다. 산책이나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미시간 호수를 찾아온다. 근처에 볼거리도 무척 많다. 시카고 강을 기준으로 북쪽에 링컨 파크와 동물원, 식물원, 자연박물관, 네이비 피어가 있고, 남쪽으로는 밀레니엄 공원, 수족관, 천문관, 자연사 박물관 등이 있다. 워낙 유명한 곳들이어서 현장 학습 온 학생들과 관광객으로 항상 붐빈다. 시카고에 있는 동안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어느 곳을 가도 좋을 만큼 알차게 꾸며져 있더라. 특히 미국 3대 자연사 박물관인 시카고 자연사 박물관(The Field Museum)과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실내 수족관이라는 셰드 수족관, 애들러 천문관을 묶어서 칭하는 뮤지엄 캠퍼스는, 아이들과 함께 가는 여행이라면 꼭 가볼 만하다. 다양한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는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과 시카고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네이비 피어와 밀레니엄 파크도 좋다. 여름이 되면 그랜트 파크에서 블루스 축제, 재즈 축제, 음식 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려 즐거움을 더한다.


 나는 시카고 강 남쪽 호숫가에 자주 갔다. 봄이 지나갈 무렵이던가, 학교 사람들 중 누군가 미시간 호수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보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 봤으니 이것도 되겠지 하며 인라인 스케이트와 보호 장비를 주문했다. 학교 공터에서 걷는 것부터 연습하기 시작하여 사람들과 같이 호숫가 길을 달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시간 호숫가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막힘 없이 뻗은 길을 한없이 달려간다. 대체로 한두 시간, 때로는 세 시간 이상 타기도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와 걸음을 멈췄을 때,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아주 시원했다. 막혀 있던 가슴까지 탁 트이는 듯한 통쾌감. 그러지 않은 날에는 길을 따라 산책하다 어딘가에 앉아서 마냥 시간을 보내도 좋았다.


호숫가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버지와 아들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호수도 아름답고 시카고 풍경도 멋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였다. 자연을 감상하고 혼자서 또는 누군가와 보내는 그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모습. 어느 곳을 가든 풍경 속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부러웠다. 삶의 여유란 이런 것인가. 마음을 다잡으며 각박하게 보냈던 나의 하루하루와 너무 대조되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왔을까. 나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 사람들을 보듬으며 만들어가는 따뜻한 나날은 많은 조건이 갖추어진 언젠가가 아닌, 바로 지금이어야 하는 것을.

반짝거리는 햇빛과 스쳐가는 바람,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며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시간이 일상인 사람들, 아이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지곤 했다.


링컨 파크에 나들이 나온 가족


 그래, 지나고 보니 미시간 호수가 그렇게도 좋았던 이유는 사람, 역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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