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2,887km 찐으로 걷는 배낭여행
✅ 프랑스길 Camino Francés (2018)
✅ 피스테라, 무시아 Camino de Fisterra y Muxía (2018)
✅ 은의 길 Vía de la Plata (2022)
✅ 북쪽 길 Camino del Norte (2022)
✅ 영국 길 Camino Inglés (2022)
여행의 기억은 숙소로부터 시작된다. 시간과 공간의 동선을 만드는 동시에 여행에 대한 감정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숙소만으로도 콘텐츠를 채우기도 하는 걸.
하지만 순례 배낭여행은 조금 다르다. 매일 잠자리를 옮겨 다닌다. 나에게 있어 까미노 위의 숙소란 하루의 고단함을 풀고, 내일을 준비하는 긴 여정 속의 작은 일부, ‘잠자는 곳’이란 의미 뿐이었다. 걷고-먹고-쉬고-자는 단순한 일상에서 스치 듯 지나가는 루틴 정도.
그래서일까, 순례 배낭여행의 일상이 몸에 익고 지루해질 즈음에 만난 이 날의 알베르게는 유난히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알베르게, 그 자체만으로 오늘의 전부였다.
은의 길 27일 차에 닿은 Villar de Farfón 마을의 알베르게다. 낡은 돌집을 개조해서 만든 곳인데, 마을이라고 할 만한 사이즈도 아니고, 이어진 길 위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곳이다. 기독교인 가족이 봉사로 운영하는 알베르게인데, 수익을 목적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최대 수용인원이 아주 적은 편이다. 하루 4명! 예약이 안 되는 곳이라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호스피탈리티를 찾았다.
오늘 3명 묵을 수 있나요?
야호! 마을 위치가 애매한 곳이라 다른 순례객들은 엉덩이만 잠깐 붙이고 다시 길에 오른다. 덕분에 우리가 1번! 정원 안에 들었다는 조금의 쾌감, 하루를 끝냈다는 안도와 여유가 밀려온다. 아직 숙소 정리가 마무리되지 않아 가방만 내려놓고 앉아 쉬었다. 느긋해진다.
어슬렁어슬렁 집과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했다. 에어비앤비에서나 보던 이국적인 집의 모습에 새로운 경험을 온몸으로 흡수하듯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낡았지만 최선의 방법으로 관리되고 있음이 또렷이 보인다. 마당에 있는 돌 벤치와 꽃은 정성으로 가꾼 듯하다.
내내 할 일 없는 심심함을 누렸다. 이 집 주변은 정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식사는 이곳에서 해결해야 한다. 선택지가 없다. 장을 볼 일도, 식당을 찾아다녀야 하는 일도 없다. 선택이 없는 환경에 오히려 평화로움을 느낀다.
점심으로 먹었던 샌드위치. 샌드위치 재료를 대충 때려 넣은 게 아니라 정갈하게 잘라 하나하나 쌓아 올려놓은 모양새다. 음식을 보면 어떤 태도로 만들었는지 보인다. 거창한 식사보다 정성껏 만든 소박한 한 끼가 단연코 최고다. 엄마는 이번 여행에 와서 처음으로 한 접시를 비웠다.
저녁은 콩 수프. 방에 누워 있는데 바깥 부엌에서 계속 달그락 소리가 들린다. 주인아저씨가 썰고 볶고 저녁 준비를 한참 동안 한다. 여러 가지 채소와 콩, 약간의 향신료가 들어간 스페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프가 저녁 메뉴였는데, 떠껀한 국물을 좋아하는 엄마 아빠가 가장 반기는 음식이기도 하다. 국물 요리긴 하지만 각종 건강 건더기가 있어서 빵과 먹으면 굉장히 든든하다.
가지고 있는 자원 안에서 가장 정성껏 그리고 부지런히 꾸려가는 호스피탈리티 부부의 성격이 곳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든 생활공간에서, 음식에서, 방문자에 대한 배려에서도.
덕분에 마치 소박한 휴양을 즐기듯 머물렀다. 이렇다 할 시설도, 재미도 없는 곳에서 가장 완벽한 휴식과 만족을 얻었다. 우연히 만난 행운이다.
이곳에서 누적된 고단함과 정신의 피로를 해소한 것처럼, 알베르게는 단순히 '자는 곳'을 넘어 '치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알아간다. 까미노데산티아고와 한 발자국 가까워진 기분이다.
까미노데산티아고의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알베르게이자, 잡지에 소개해도 좋을 만큼 독특했던 로컬 그 자체의 공간이었으며, 일반 숙소와 견주어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정돈된 배려가 있던 곳. 길 위에서 만난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