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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Mar 17. 2024

2005년

왜 재수했는지 알겠는 고삼이

수능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재수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고, 원하는 대학을 못가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 시절을 지나 지금 뒤를 돌아보니 일기장 열 몇 장으로 남은 기억이다. 2005년의 일기는 읽다보니 '와 진짜 왜 재수햇는지 알겠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요상한 생각하면서 일기 쓸 시간에 공부나 할껄) 2006년의 일기는 '수능이 뭐라고 저렇게 쫄아서는 에이그 쯧쯧 싶었다.' 그 순간에는 인생을 걸었던 그 시절. 지금의 내 모습에는 그 순간의 경험들이 어딘가에 묻어있겠지.

2004년 10월 3일

독서실에 앉아 있기가 너무 싫어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걸었다.

얼마 전만해도 해가 벌겋게 떠있곤 했는데 오늘의 하늘은 참 묘했다.

해가 미처 지지 않은 서쪽엔 주홍빛이 서려있고,

말간 하늘은 인디고.

구름 한 점 없는 인디고 하늘과 가로등

서울 촌구석 냄새나는 강둑을 걸으며 낭만을 느꼈다.

정말 아름다웠던 하늘

아- 오늘 디카 가지고 나갈걸


2005년 1월 20일     

지난주에 논술 선생님이 요새 아이들은 실어증이라고 했다.

자신 깊숙이 있는 말을 표현할 줄 모른다고 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도 실어증 환자인 것 같다.

답답하지만 모르겠다.


2005년 6월 26일

나에게 계속 묻는다.

네가 네 자신이 맞느냐.

처음 나와는 너무 다른 내가 나도 낯설다.

학교에 있던 12년은 날 마모시키고 둥글고 꽉 막았다.

이제야 나의 색이 바랜 후에야 묻는다.

넌 네가 맞느냐.

난 파란색을 닮은 하늘 같고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의 난, 어느 색도 아닌, 다 뒤엉킨 하나의 낙서에 불과하다.

난 하늘이 될 수 있을까.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삐뚤어진 나를 되돌릴 수 있을까.

꽉 막힌 나를 뚫을 수 있을까.

탁 트인, 그런 나를 기대해도 되는걸까.


6개월 후 학교를 나가 준사회인이 되는게 무섭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의 색을 간직한 채 빛날 수 있을까.

난 세상에 솔직해 질 수 있을까.

솔직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계속되는 물음표들이 나를 더 무섭게 만든다.

그러나, 난 이겨내고 싶다.

하늘이 되고, 바다가 되고 싶다.

고3이 되니 ‘나’에 대한 생각이 늘었다.

6개월 후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난 좀 더 자라야 겠지.

힘내자.


2005년 11월 23일


수능 끝

내가 기대한 만큼의 허무감이 있다.

큰 시험인 만큼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12년간 나의 노력이 12시간만에 결정되었다.

기대한 만큼의 결과는 아니었다.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면 고3의 자격조차 없는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작지만 가능성이 있음에 감사하고,

나의 든든한 지원군 부모님이 있음에 감사한다.

      

수능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나를 고생시켰지만 나를 많이 키워주었다.

1년 동안 3년치는 자란 것 같다.

후련하면서도 허무하고, 아쉬우면서도 만족스러운 이번 수능.

내 인생에 손에 꼽히는 대 사건이었고, 세상으로 나가는 첫 디딤돌이었다.

행복해지자. 지금까지보다 더 많다.


2006년 1월

진짜 끝났습니다. 2006년 입시가.

그리고 2007년 입시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갈 계기라고 생각할께요.

근데, 나 솔직히 나 못 믿어요.

2005년 나의 그 모습이 생각나서.

그렇지만

내가 나를 믿지 않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가 나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으면

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최선을 다 해보고 싶습니다.

멋지게 성공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좌절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모님 가슴에 상처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싶습니다.


* 지사진 :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2005

2005년 광화문 광장에는 세종대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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