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룰루 Apr 03. 2024

2024년

에필로그

30년 가까이 끼고 있던 일기장을 이제야 정리했다. 내 기억 속 행복했던 유년 시절, 학창 시절을 추억한다는 명분으로 그 무거운 일기장을 신혼집까지 안고 왔다. 엄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사준 자물쇠 달린 일기장도 있었다. 내가 가진 물건 중에 가장 버리기 힘든 물건이었다. 곧 이사를 앞두고 짐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일기장을 펼쳤다. 남편은 해외 출장을 가고, 아이들은 모두 잠든 밤이었다.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이 많았다. 읽을 때 낯이 뜨거워지는 내용이 가득했고. 스쳐 지나간 감정에 날카로운 말들이 마구 적혀있기도 했다. 일기가 가장 많이 쓰인 시기는 수험 생활 기간이었으며, 그러다 보니 내용 대부분은 나를 향한 화살이었다. 일기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마음이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속 시원히 말하기 어려울 때 더 길게 쓰는, 그런 것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괜히 15년 전 나에게, 10년 전 나에게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냥 버리기로 했다. 지금의 나에게 남겨주고 싶은 말은 일부는 찢어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그냥 버리기로 했다. 남기고 싶은 말을 고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유명한 고전 명작을 읽는 것도 아닌데 몇 번을 읽은 부분도 있었다. 남겨둔 부분 중 일부는 타이핑하고, 혼자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봉투에 담아두었다. 마침 그날이 분리수거 날이어서 버리는 일기장 중 좀 덜 부끄러운 내용은 분리수거함에 버리고,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나머지들은 종량제 봉투에 찢어 담았다.


찬찬히 읽어보고 버리는 것이 창고 안에 죽은 듯 보관하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어떤 순간들이 나를 스쳐 가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퍼즐이 맞춰졌다. 또,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직장을 다니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흐릿해진 내 모습이 또렷해졌다. 창고 속에 숨어 있던 나의 조각을 다시 꺼내 갈고 닦아서 담고 싶은 부분은 지금의 나에게 담고 나머지는 과거로 보내주었다. 


개운하다.


추신. 처음엔 나만 아는 내 이야기이니 혼자 볼 생각에 시작한 일기정리였지만, 12년 치 일기를 시계열로 정리하다 보니 글 자체에서 느껴지는 변화가 흥미로워 일기는 일기장에 쓰는 거라지만 이 정도는 누군가와 같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신 2. IMF를 걱정하던 초등학생, 재스민 차도 쓰다고 하던 고등학생, 성년의 자유를 버거워하던 대학생, 고시촌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던 수험생은 아이 둘의 워킹맘이 되었다. 처음 일기를 썼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만큼 또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고민이 참 귀여워 보이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의 글을 읽는 분들도 비슷한 마음이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2010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