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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식 Mar 02. 2017

앤드류의, 앤드류에 의한, 앤드류를 위한

 <위플래쉬>


 2015년 한국에서 흥행과 비평을 동시에 붙잡은 영화가 있다면 단연 <위플래쉬>를 빼놓을 수 없다. <위플래쉬>는 관객 수 약 158만 명을 동원하며 2015년 다양성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다. 그 해 <암살>과 <베테랑>, 천만 영화가 두 편이나 탄생한 한국 영화계에서 이러한 관객 수는 낮은 편에 속하지만 한국 내에서의 <위플래쉬>의 수익은 전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수익을 기록했다. 미국에서 약 1309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한 <위플래쉬>는 한국에서 약 1141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는데 이는 미국과 한국의 인구를 비교해볼 때 굉장히 놀랄만한 수치이다.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음향상, 편집상까지 3관왕을 석권한 <위플래쉬>의 등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예상치 못한 흥행을 기록한 이 영화에 대한 기사와 비평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위플래쉬>는 최고가 되길 꿈꾸는 드러머 앤드류가 셰이퍼 음악학교 재학생이라면 동경해 마지않는 스튜디오 밴드의 지휘자 플렛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색소폰 연주자인 찰리 파커는 어릴 적 즉흥연주에 참여했다가 공연을 망치게 되고 같은 밴드의 드러머 조 존스가 던진 심벌즈에 목이 잘릴 뻔했다. 웃음거리가 된 이후 끊임없이 연습한 그는 이후 20세기 위대한 재즈 연주자가 되었다. 플렛처는 이러한 찰리 파커의 신화를 자신의 교육 신조로 삼는 엄격한 지휘자다. 플렛처는 자신의 템포에 맞추지 못하는 앤드류를 항해 심벌즈 대신 의자를 던지고 폭언을 일삼는다. 앤드류는 최고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플렛처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쉽지 않다. 결국 앤드류는 플렛처와의 갈등 속에서 셰이퍼 음악학교에서 제적당하게 되고 플렛처의 계략으로 인해 JVC 재즈 페스티벌에서 최악의 연주를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12분, 앤드류는 자신이 그토록 연습한 ‘Caravan’을 통해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가 될 수 있음을 세상에 알린다.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열정, 광기, 전율’ 그 자체다.


 그러나 앤드류의 이러한 선전포고와는 달리 <위플래쉬>에 대한 국내의 비평가들은 연주자 앤드류보다는 지휘자 플렛처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상당수의 언론과 비평가들은 플렛처의 교수법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을 쏟아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위플래쉬>가 “그저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는 음악영화가 아니라, 플렛처의 극단적인 교육법을 보여주며 반문하는 교육영화”라고 언급했고(「엔터미디어」, ‘위플래쉬’ 100만 관객 홀린 천재 교육법의 실체, 2015-03-27), 문화평론가 김지인은 “‘권력행사’의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 속에 나타난 폭력적인 사제관계가 현실에서도 충분히 존재해 왔으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며 2013년 서울대 음대 교수가 제자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사건과 2014년 숙명여대 작곡과 학생들이 교수의 폭언과 티켓 강매 요구를 이기지 못해 교수 파면을 요구한 사건을 예로 들었다(「업코리아」, '위플래쉬'의 플렛처 교수가 조금은 불편한 이유, 2015-05-02). 심지어 칼럼니스트 듀나는 한국에서의 <위플래쉬>의 흥행을 하나의 한국적인 현상이라 정의하고 많은 수의 관객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스승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로 오독하고 있다며 비판한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교육법으로 이전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남자를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며 “만약 <위플래쉬>의 흥행이 이들의 덕택이라면 우린 아주 위험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라며 꽤나 극단적인 의견까지 제시하고 있다(「엔터미디어」, ‘위플래쉬’, 한국에서 유달리 성공한 진짜 이유, 2015-03-26). 


 물론 영화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앤드류가 환상적인 연주를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술적 성취의 근거를 연주자인 앤드류가 아닌 지휘자인 플렛처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풀어 가는 것은 분명 아쉬운 대목이다. ‘앤드류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그의 연주가 있기까지 플렛처의 교육방법은 잘못되었다.’라는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철저히 앤드류를 배제한다. 플렛처가 좋은 인간이든 나쁜 인간이든 우리의 온몸을 전율시키게 만든 장본인은 앤드류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영화 내에서 플렛처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묻기보다는 앤드류가 어떠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하는지, 플렛처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반응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 12분의 열정과 광기의 연주가 있기까지 플렛처가 아닌 앤드류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나는 ‘영화적’으로 <위플래쉬>를 살펴본다고 했다. 여기서 언급한 ‘영화적’이라 함은 무엇일까. 위에 언급한 비평가들은 인물들의 행동에서 발생되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통해 <위플래쉬>를 다룬다. 이는 이야기 구조와 이야기가 작동하는 방식에만 관심이 있는, 한마디로 ‘내러티브적’으로 영화를 바라본다. 물론 내러티브 분석은 영화를 여러 가지 바라보는 방법론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요소에는 내러티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타 다른 예술들에는 없는, 오직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요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영화를 바라봐야 한다. 움직이는 시각적 이미지들의 다양한 결합. 그 속에서 드러나는 균열과 간극. 그 사이에서 우리는 몸의 떨림과 울림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혹적이고 초월적인 ‘영화적 체험’이다. 그렇다면 <위플래쉬>의 영화적 특수성은 무엇일까. <위플래쉬>에서 드러나는 시점 쇼트는 여타의 영화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시점 쇼트의 편집은 대개 ‘a(시점의 주체)-b(주체가 보는 대상)-a(시점의 주체)’ 이거나 ‘a(시점의 주체)-b(주체가 보는 대상)’, 혹은 ‘b(주체가 보는 대상)-a(시점의 주체)’로 구성된다. 하지만 <위플래쉬>는 ‘a(앤드류)-b(앤드류가 보는 대상)-b'(다른 시점에서 보는 대상)-a(앤드류)’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영화들이 시점 쇼트를 선보일 때 보이는 대상을 한 시점에서만 보여줬다면, <위플래쉬>는 보이는 대상을 다른 위치에서 한 번 더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점들은 서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일반적인 시점 쇼트가 보는 자의 물리적 거리에서만 이루어졌다면 <위플래쉬>에서는 보는 자가 보는 대상을 대하는 심리적 거리까지 다룬다. 즉, 앤드류의 시점 쇼트를 보충하는 쇼트가 한 번 더 등장한다. 이렇게 등장인물에게 과한 시선의 권력을 부여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시선의 권력을 쥔 앤드류의 시점 쇼트들을 천천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앤드류를 이해할 수 있다.


[캡처 1] 앤드류에게 있어 드럼과 사랑은 하나다.

 영화 초반, 앤드류는 나소 밴드 연습실의 드럼 의자에 앉아있다. 앤드류가 문가를 바라보는 쇼트 이후 다음 쇼트에는 문 옆에서 라이언이 여학생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는데 이 장면은 명백히 앤드류의 시점 쇼트이다. 뒤이어 다음 쇼트는 카메라가 더 가까이 접근하여 라이언과 여자가 화면 중앙에 위치한 다음, 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로 바뀌어 라이언이 여자의 머리를 귀 옆으로 넘긴다. 앤드류가 라이언과 여학생을 응시하는 쇼트 이후 바로 다음 쇼트가 앤드류의 시점 쇼트라고 생각되나 그 쇼트의 연장선상에서 좀 더 가깝게 접근한 쇼트가 뒤이어 연결된다([캡처 1]). 물리적 거리의 시점 쇼트와 심리적 거리의 시점 쇼트의 결합. 우리는 이 씬(scene)에서 앤드류가 니콜을 떠올렸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앤드류는 영화관에서 근무하는 니콜에게 호감을 드러내는데 앤드류는 자신의 드럼 실력이 인정받은 이후 그 자신감을 통해 사랑을 쟁취하려고 노력한다. 앤드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플렛처의 앞에서 ‘더블 타임 스윙’ 주법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실망한다. 뒤이어 영화관에 찾아갔을 때 앤드류는 니콜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그러나 플렛처가 나소 밴드에 찾아왔을 때 ‘더블 타임 스윙’을 인정받고 스튜디오 밴드에 입성하게 되는데 앤드류는 그제야 니콜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또한 라이언에게 ‘Caravan’의 연주 기회를 뺏긴 이후로 앤드류는 니콜에게 이별 통보를 하더니 이후 플렛처에게 JVC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연주 기회를 제안받게 되자 헤어진 니콜에게 전화를 건다. ‘드럼에 미친 아이가 왜 갑자기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지?’라는 의아함이 생긴다면 나소 밴드 연습실에서의 시점 쇼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드럼은 그에게 있어 삶의 전부이다. 드럼이 곧 앤드류 그 자신이다. 카메라는 헤어진 니콜에게 전화하는 앤드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꽤나 오랫동안 보여준다. 남자 친구가 생긴 것을 알고 망연자실해하는 앤드류. 그는 그제야 드럼과 사랑이 별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 같다.


[캡처 2] 스튜디오 밴드와 플렛처를 동경하는 앤드류의 강한 열망.

 나소 밴드 연습실 시퀀스(sequence) 이후, 앤드류는 복도를 걷다가 스튜디오 밴드 연습실 문에 달린 조그마한 창으로 밴드의 연습을 훔쳐본다. 창틈으로 연주를 보고 있는 앤드류의 바스트 쇼트 이후, 마치 앤드류가 방 안에서 연주자들을 보듯, 꽤나 가까운 거리의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 이후 앤드류의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찍은 쇼트가 등장하고 이어서 화면의 양쪽이 문으로 가려진 채 연주자들을 바라보는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캡처 2]). 전자의 시점 쇼트가 앤드류와 스튜디오 밴드의 심리적 거리라면 후자의 시점 쇼트는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이다. 앤드류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고 시선은 두 개로 나뉘며 이 간극에는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고 싶은 앤드류의 강한 욕망이 드러난다. 이후 앤드류는 집에서 ‘더블 타임 스윙’만 연습하며 전설적인 드럼 연주자 버디 리치의 연주를 듣는다. 다음 날 나소 밴드에서의 연주곡 연습을 소홀히 해 합주 연습에서 제외되지만 플렛처의 기습방문에 이은 ‘더블 타임 스윙’ 테스트를 통과하며 스튜디오 밴드에 합류하게 된다. 앤드류는 플렛처에게 연습장소와 시간을 전달받고는 조용히 의자에 앉지만 기쁨을 참을 수 없어 슬쩍 미소를 짓는다. 그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더넬런 경연대회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제대로 된 연주를 선보이지 못한 앤드류는 플렛처 교수와 심한 몸싸움을 벌이고 결국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이후 앤드류는 아버지와 함께 학교 직원 또는 변호사로 추정되는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플렛처의 과거 제자였던 션 케이시가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앤드류에게 전한다. 플렛처는 이전에 션 케이시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며 스튜디오 밴드의 학생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전했었다. 그녀는 션 케이시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며 앤드류에게 플렛처에게 당한 고통을 비공개 심리에서 증언해달라고 말한다. 이 삼자대면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내러티브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중요한 지점이다.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 시퀀스에 대한 보편적 감상을 먼저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관객과 비평가들은 이 장면에서 ‘션은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려서 결국 자살했는데 이는 플렛처가 가르친 이후부터다!’라는 션의 어머니의 주장을 학교 직원이라는 제3자를 통해 건너 듣고는 플렛처를 ‘나쁜 인간’으로 정의한다. 션 케이시가 플렛처로 인해 자살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반대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션 케이시는 정말 플렛처 때문에 자살했는가?’


 션이 자살한 이유가 플렛처 때문이 아니더라도 플렛처가 스튜디오 밴드 내에서 하는 폭언과 폭행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는 플렛처가 폭력을 행사하여 육체적, 정신적으로 앤드류를 억압하는 광경을 많이 목격했고 션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자동차 사고로 다르게 말하는 광경도 보았다. 그리하여 플렛처가 앤드류에게 했던 행동들이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플렛처가 션을 사실상 죽인 거나 다름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플렛처의 이러한 행동들이 션의 자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플렛처가 학교 밖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는지, 학교 밖의 다른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취미는 뭔지, 집에 혼자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플렛처가 순전히 션의 죽음을 잘못 파악하여 자동차 사고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인가? 우리는 심지어 션이 자살하는 광경을 보지 못했고 션을 본 적조차 없다. 정말로 션이 자살한 이유가 플렛처 때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플렛처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함부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논할 수 없다. 비평가들의 내러티브적 접근은 플렛처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 또한 부정확하다. 이제는 플렛처가 아닌 앤드류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앤드류는 플렛처에게 뺨을 맞고 숱한 폭언을 들었고 기회를 주지 않는 플렛처에게 욕을 하며 그와 몸싸움을 벌였다. 플렛처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한 건 없어요.”라며 오히려 그를 옹호한다. 앤드류는 플렛처에 대해 증언을 해야 하는 이 상황이 탐탁지 않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앤드류의 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캡처 3] 욕을 하지 않고 대화하는 플렛처의 모습이 낯설다.
[캡처 4] 플렛처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다가갈 수밖에 없는 앤드류.

 이전 장면을 살펴보자. 오버브룩 재즈 경연대회에서 플렛처는 지인의 어린 딸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를 앤드류가 몰래 훔쳐본다. 앤드류가 열린 문 사이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쇼트 이후에 멀리서 소녀와 대화하는 플렛처가 보인다. 이후 앤드류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등장하고 바로 다음 쇼트에서 플렛처와 소녀는 화면 중앙에 놓여 좀 더 크고 가까이 보인다([캡처 3]). 이미 언급했듯 앤드류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시선은 두 개로 분할된다. 이후 노웰스 라이브 재즈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플렛처를 바라보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앤드류의 바스트 쇼트 이후 카메라는 멀리 있는 플렛처에게 서서히 접근한다. 그리고 앤드류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등장하고 이후 카메라는 플렛처의 바로 옆까지 이동하여 플렛처의 피아노 연주를 자세히 바라본다([캡처 4]). 앤드류는 플렛처와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서 있지만 카메라는 스스로 접근하여 대상을 관찰한다. 위의 두 장면은 앤드류가 평소 볼 수 없던 플렛처의 다른 면을 보게 되는 시점 쇼트들이며 이는 앤드류가 학교 밖에서의 플렛처가 궁금하고 관심이 있음을 의미한다. 앤드류는 플렛처에게 수많은 모욕을 당하고도 플렛처가 소녀와 다정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보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심지어 플렛처와의 다툼으로 인해 앤드류는 셰이퍼 음악학교에서 제적까지 당했지만 플렛처가 연주하는 재즈클럽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플렛처의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며 묵묵히 그의 발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목이 잘릴 뻔했던 찰리 파커의 신화는 오로지 앤드류와 플렛처만이 이해하며 추종한다. 이런 앤드류가 드럼을 포기하고 방황하던 찰나에 플렛처를 재즈 클럽에서 우연히 만났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앤드류는 플렛처와 어느 정도의 물리적 거리를 두고 서있지만 그의 마음은 어느새 플렛처를 향해 다가가 있다.


[캡처 5]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시간’을 거스르는 교차편집.

 아까의 장면으로 되돌아가자. 앤드류는 플렛처가 잘못이 없다며 옹호한다. 이어서 앤드류가 집에서 드럼을 치고 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며 우는 장면이 교차 편집된다. 다시 돌아가 학교 직원과 아버지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증언하기로 마음먹은듯한 표정을 짓는 앤드류의 바스트 쇼트 이후 그는 울먹이며 드럼과 CD들을 정리하고 심지어 자신의 우상인 버디 리치의 포스터까지 없앤다([캡처 5]).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시간’을 거스르는 교차 편집. 시간 순으로 진행되던 영화는 이 순간만큼은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앤드류의 감정에 집중한다. 그렇게 증오하던 플렛처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앤드류는 오히려 자신의 전부인 드럼을 정리한다. 자신의 증언을 통해 플렛처와 멀어지는 순간 드럼도 포기해야 한다. 플렛처와 같은 권위적이고 극단적인 스승이 없다면 자신은 찰리 파커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앤드류를 니콜, 아버지, 친척 등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앤드류는 플렛처의 교육으로 인해 경쟁에 중독되고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내러티브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이 시퀀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앤드류를 이해할 수 없다.


 재즈 클럽에서 플렛처와 화해한 앤드류는 그의 권유로 카네기 홀에서 열리는 JVC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지만 이는 플렛처의 철저한 계략이었다. 예정과는 다른 전혀 다른 노래를 진행한 플렛처로 인해 최악의 연주를 하게 된 앤드류. 드럼을 박차고 무대를 떠나 아버지와 재회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대로 돌아와 자신이 그토록 연습한 ‘Caravan’을 자신의 페이스대로 연주한다. 앤드류의 뜨겁고 숨 막히는 연주가 빛나는 엔딩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그야말로 무대가 놀이터인 마냥 자유롭게 움직인다. 카메라는 앤드류의 시점 쇼트들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여러 인물들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인물들이 연주하는 악기와 악보에도 망설임 없이 클로즈업을 행해 왔다. 심지어 앤드류와 니콜이 피자가게에서 대화할 때 니콜이 자신의 발을 앤드류의 발에 살짝 갖다 대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카메라는 이전까지 앤드류를 벗어난 적이 없다. 항상 그의 주변에 머물러있고, 앤드류가 있는 공간에서만 자유로울 뿐이었다. 우리는 영화 내내 앤드류의 옆에서 나머지 인물들을 보았을 뿐 그들의 일상을 본 적이 없다. 카메라는 늘 앤드류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엔딩 시퀀스에 이르러 카메라는 앤드류에게서 해방이라도 된 듯 이전보다 더 자유롭고 활발하게 무대를 돌아다닌다. 앤드류에게 묶여있던 카메라가 무대 위에서 자유로워지듯 플렛처에게 묶여있던 앤드류는 최고의 드럼 연주를 선보이며 무대를 압도한다. 카메라는 앤드류의 상하좌우를 넘나들며 앤드류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던 ‘더블 타임 스윙’이 연주되고 슬로우 모션 기법을 통해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들로 복받치던 이는 나뿐일까. 앤드류의 눈알을 뽑아버리겠다던 플렛처는 어느새 그에게 동화되어 미소를 짓고 무대 위의 연주자들은 역동적이고 힘찬 연주를 마음껏 선보인다. 카메라는 연주자들 사이로 악보와 악기를 넘나들고 새파랗게 질린 앤드류의 아버지의 표정을 캐치하더니 카네기 홀의 좌석 끝으로 가 무대에 있는 앤드류와 연주자들을 담는다. 서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 앤드류와 플렛처. 플렛처가 앤드류를 향해 팔을 뻗자 카메라는 화면 오른쪽에 서 있는 플렛처의 등 뒤에 있다가 화면 왼쪽에 있는 앤드류를 향해 빠르게 트래킹 한다. 그렇게나 자유로웠던 카메라는 끝끝내 앤드류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몸의 울림과 떨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놀랍고도 매혹적이며 초월적인 ‘영화적 체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캡처 6] 카메라는 언제나 앤드류를 향해 나아간다.

 앤드류를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트래킹 쇼트. 우리는 이와 유사한 쇼트를 이전에 본 적이 있다. 영화의 오프닝 쇼트. 카메라는 복도 끝에서 드럼 연습을 하는 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 끝에 다가가서야 우리는 그가 앤드류임을 자각한다([캡처 6]). 앤드류는 90살까지 조용히 사는 것보단 알코올, 마약 중독에 빠져 34살에 죽어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기를 바라는 인정 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카메라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언제나 앤드류를 향해 나아간다. 영화의 모든 서사와 화면이 앤드류에게 집중되어 있는 <위플래쉬>는 그의 인생에서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카메라의 끝엔 언제나 앤드류가 있다. 


 <위플래쉬>는 앤드류의, 앤드류에 의한, 앤드류를 위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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