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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식 Mar 02. 2017

구원의 실패와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곡성>


 모든 전통예술은 경험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균질성의 추구를 목표로 삼는다. 어떤 경험을 이해하고 지배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다. 그러나 예술은 결국 불균질적인 영역과 층위를 드러내고 만다. 예술가는 개인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오랜 역사를 통해 긴장과 갈등을 포함하고 있는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한 예술가의 인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균질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무의미할지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자 일부 예술가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한 잘못된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투쟁하기 위해 일부러 텍스트를 파괴하고 파편화한다. 이러한 경우 파편화는 또 하나의 원칙이 되고, 이 작업이 반복될수록 파편화의 규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완벽하게 균질적으로 보이는 작품이 생산된다. 같은 문화적 조건에서 불균질성을 특징으로 하는 균질적인 작품과 원래 균질적이지 못한 작품 사이의 경계는 불투명하다.

 

 <곡성>은 이러한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아직까지도 제대로 위치하지 못한 듯 보인다. 개봉 직후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강렬’, ‘박력’, ‘괴력’, ‘기운’, ‘무시무시’ 등의 단어를 동원하며 불친절한 다층의 플롯 속에서 감독의 미끼를 삼키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를 마주하게 되는 이 영화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들은 그 강렬하고 거대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 즉 미끼를 던지는 방법이 치사하고 기만적이라는 점에 대하여 하나같이 목소리를 냈다. 전자는 불균질성을 특징으로 하는 균질적인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려다 실패하여 균질적이지 못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망설였다. <곡성>을 처음 본 직후 전자의 주장에 동의했으나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에는 후자에 동의했다. 그리고 영화를 세 번째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관객과 평단은 범인이 누군지를 찾고 그 해답의 단서들을 영화 곳곳에서 찾아내 끼워 맞춰보거나 그 단서들의 허술함을 나열했다.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미스터리 장르를 대하는 태도이다. <곡성>에 대한 일련의 비평들은 <곡성>을 미스터리 장르영화로 국한시키고 말았다.


 나는 <곡성>을 걸작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대신 <곡성>은 불균질성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실패했고,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부분적인 불균질성이 매우 흥미롭다고 주장할 계획이다. <곡성>은 분명 오컬트 장르(사후세계, 죽은 자와의 교신, 악마, 엑소시즘 등의 소재를 다룬다)의 ‘호러(공포) 영화’이다. <곡성>은 특유의 기이하고 괴기한 분위기를 통해 관객들을 압도하고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알 수 없는 감흥과 공포에 휩싸인 기억은 나에게 있어 꽤나 선명하다. ‘기 빨리는 영화’라는 여러 네티즌의 공통된 댓글들과 그에 따른 ‘좋아요’의 추천 수는 나의 경험이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곡성>의 부분적 불균질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곡성>을 호러 영화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상성과 괴물

 <곡성>을 호러 영화로서 위치시키기 위하여 공식을 빌려올 필요가 있다. 호러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괴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호러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상대해야 할 괴물이 스크린으로 초대되어 관객들의 공포를 자극한다. 영화학자 로빈 우드는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에서 호러 영화의 단순하고 명백한 기본 공식을 제공한다. 그는 호러 영화에서 정상성은 이성애적 일부일처 커플, 가족,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고 지탱하는 사회제도(경찰, 교회, 군대 등)에 의해 재현되어 왔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정상성(normality)’이란 가치평가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지배적인 사회규범에의 순응’이라는 뜻으로 기존 권위에 의해 승인된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억압의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간주한 주변부의 존재들(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타문화나 인종, 어린이, 장애인 등)은 기존 사회가 인정한 정상성을 위협하고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상성은 괴물에 의해 위협받는다. 즉, 호러 영화의 핵심 주제는 정상성과 괴물 간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곡성>은 종교의 구원성에 대해 심한 강박관념을 드러낸다. 종구는 경찰로서 ‘곡성(哭聲)’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들을 수사한다. 경찰은 집단 야생 버섯 중독으로 인해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지만 종구는 동료 경찰인 성복이 들려준 외지인에 대한 소문에 집착하고 외지인의 집에서 자신의 딸 효진의 신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연쇄 살인사건의 배후로 외지인을 의심한다. 효진은 각각의 살인사건들의 용의자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하고 가족들에게 폭언과 욕설을 일삼더니 결국 옆집 할머니를 가위로 찌르기까지 한다. 이런 효진의 변화에 전전긍긍하던 종구에게 종구의 장모는 효진에게 귀신이 씌었다며 용하다는 무당 일광을 부른다. 그러나 일광의 살날림굿에도 불구하고 효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종구는 성당에 찾아가 신부에게 효진을 살려달라며 애원한다. ‘곡성’의 주민들은 특히 무속신앙에 집착한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살인사건의 가해자인 박흥국의 집에는 굿의 흔적이 있으며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살인사건의 가해자인 박춘배는 굿을 하던 무당 일행과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이후 외지인에게 죽은 채로 발견된다. 자신의 가족 세 명을 칼로 찔러 죽이고 집에 불을 낸 여인은 목격자인 무명에 따르면 할매가 계속 굿을 하려고 하여 참지 못하고 죽였다고 한다. 종구의 아내는 효진이 이전 살인 사건들의 가해자와 같은 증상을 보이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는 동네 병원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종구에게 전하지만 종구는 다른 병원을 찾아가지 않는다. 그는 승용차도 있으며 오토바이도 소유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다른 도시의 종합병원을 충분히 방문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은 채 오로지 종교에 집착한다. ‘곡성’의 주민들에게 있어 무속신앙은 다른 어떤 정상성보다도 우월하다.


 그러나 ‘곡성’을 지배하는 경찰, 무속신앙, 기독교의 정상성은 일본에서 건너온 외지인이라는 괴물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다. ‘곡성’ 주민들에게 외지인은 오랜 역사에 걸쳐 한국과 애증의 관계로 얽혀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건너온 ‘일본 놈, 왜놈’으로 불리는 비정상의 존재이다. 외지인은 그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시장에 가거나 버스를 타면 눈초리를 받는 혐오의 대상이다. 주민들은 외지인 때문에 살인사건들이 발생했다는 확인되지 않는 소문을 퍼트리지만 그 소문에 대한 근거는 전혀 없다. 외지인은 ‘곡성’ 주민들의 사진을 찍고, 그 찍힌 대상은 악귀가 씌어 주변 사람들을 살해하지만 이 사실은 영화의 결말에나 가서야 종구와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만 확인될 뿐이다. 외지인은 무속신앙을 믿는 이들에게는 악귀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기독교를 믿는 부제 이삼에게는 악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경찰은 아예 외지인은 용의 선상에서 제외시킨 채 그저 연쇄 살인사건을 집단 야생 독버섯 중독 사건으로 종결한다. 여기서 일광이라는 존재는 외지인과 주민들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역할로서 중요하다. 일광이 종구의 집을 방문하자 그의 집 마당에는 일광을 보러 온 주민들로 인해 시끄럽다. 일광은 ‘곡성’에서 이미 유명인사다. 주민들은 일광을 통해 구원받으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타락할 뿐이다. 일광은 일본 전통 속옷 훈도시를 입는 외지인이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한 무당(내지인)의 모습을 통해 주민들을 현혹한다. <곡성>에서 괴물의 모습은 단순히 외형만으로는 판단 불가하다.



나홍진의 오래된 기획

 <곡성>의 표면적인 의미는 의도적으로 파편화되어 있으며 내러티브가 진전됨에 따라 더욱 애매모호해진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의 내러티브가 상당히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외지인은 악마인가? 아닌가?’, ‘무명은 사람인가? 귀신인가?’, ‘이게 다 독버섯 때문이다’ 등 <곡성>에 드러난 의문들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일광은 쑥대밭이 되어버린 종구의 집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일광은 차 안의 짐을 정리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담겨있는 사진함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장면들은 일광이 종구의 조력자가 아니라 외지인의 조력자였음을 유추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일광과 외지인이 같은 편이라는 추측에 대한 또 하나의 근거는 두 명 모두 훈도시를 착용한다는 점이다. 이는 강력한 근거처럼 보일 수 있으나 여전히 확실한 근거는 아니다. ‘일광과 외지인은 각자 활동하는 악의 무리일 수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영화의 내러티브는 제대로 답변할 수 없다. 효진을 포함한 ‘곡성’의 피해자들이 전부 일광과 외지인의 합동 작전인지, 아니면 개별적 활동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러티브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독해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 영화 전체가 리얼리즘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건은 육하원칙의 사실보다는 ‘만약’과 ‘혹시’의 가정과 추측의 문제가 된다.


 결국 <곡성>은 ‘곡성’을 쑥대밭으로 만든 범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곡성>의 피상적인 기획이 선과 악 사이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하찮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심층적인 기획은 그 사이에서 종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는 나홍진의 모든 영화에서 드러나는 오래된 기획이다. 나홍진은 예전 <추격자>가 개봉했을 당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붉은 십자가를 발견할 수 없는 공간이 있나. 모든 살인은 십자가 아래서, 즉 신의 발밑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추격자>에서 전직 경찰 출신 포주인 엄중호는 미진을 찾기 위해 빨간 십자가로 뒤덮인 망원동을 뛰어다닌다. 연쇄살인마 지영민이 기거하던 지하에는 그가 그린 십자가상 그림이 있으며 그는 교회 집사 가족을 살해하고는 창녀들의 머리에 정을 박는다. 그는 예수를 향해 보란 듯이 십자가 아래서 살인을 저지른다. <황해>에서 김구남은 강남구 논현동에 도착해 김승현의 건물을 바라본다. 이때 김승현의 건물 바로 옆에는 성당이 있다. 버스회사 사장 김태원은 가족들과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기도하지만 자신이 살해를 지시한 면정학을 놓쳤다는 전화를 받자 교회의 화장실에서 분노를 터뜨린다. <황해>의 복잡한 층위의 치정과 살인사건, 그 다툼의 이면에서 기독교는 바로 옆에서 살인이 벌어짐에도 단지 악인의 이미지를 겉으로 포장하는데 기능적으로 쓰일 뿐이다. 나홍진이 그리는 서울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공간이지만 정작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의 전작들에서 종교는 전경에서 제시되는 인간들에게 접근하지 않은 채 그저 후경에 머물러 있다면 <곡성>에서 종교는 인간들과 함께 전경으로 제시되어 뒤섞인다. 무명이 바로 그렇다. 무속신앙은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 즉, 무당으로 불리는 중재자가 신령과 인간을 중재하는 종교이다. 자연의 정령, 중국의 유명 인사, 토착 신령과 조상신 등을 섬기는데 ‘곡성’에서 ‘무명’이라는 존재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이나 지역 수호신의 성격이 강한 산신(山神)으로 정의할 수 있다. 종구와 성복은 건강원 주인인 덕기와 함께 외지인이 거주한다는 산에 도착한다. 이때 이들은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덤과 나무에 흰색 천이 묶여있는 서낭당(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을 앞에 두고 차에서 내린다. 또한 영화 내에서는 ‘곡성’을 둘러싼 산맥과 풍경들이 등장하는 자연 쇼트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는 무명의 이미지와 자연스레 병치된다. 


 혹자들은 ‘왜 이리 무명이 무능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곡성>은 무명이 무능하다고 드러내는 영화다. 나홍진의 영화에서 종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종구는 없어진 효진을 찾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무명과 마주한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 집에 들어가면 다 죽을 것이다.”라는 무명의 말에도 불구하고 종구는 집에 가기 위해 돌아선다. 이때 무명은 종구와 꽤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를 막기 위해 순식간에 그의 팔을 붙잡는다. 그 순간 종구가 바라보는 무명은 새파란 피부를 가진 귀신의 모습이다. 외지인이 악귀가 아니라 무명이 악귀라는 일광의 거짓된 증언과 더불어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준 무명을 두고 종구는 무명을 괴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외지인과 일광은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괴물이라면 무명은 괴물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정상성이다. <곡성>에서의 인간은 선과 악, 정상성과 괴물을 구별할 방법이 없다.



언캐니의 미학 – 죽음의 공포

 그렇다면 <곡성>에서 드러나는 공포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읽어본 평 중에는 허지웅과 박수민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듯 보인다. 허지웅은 “이 영화를 본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같은 종류의 소재를 다룬 호러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곡성>에서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략) 시종일관 매우 이상한 공기를 뿜어낸다. 이건 매우 이상한 영화다.”라고 하지만 그도 이상한 공기의 근원은 찾지 못했다(「극한의 공포 <곡성>의 악(惡)이 범상치 않은 이유」, 『씨네21』, 제1055호). 박수민은 그 이상한 공기의 근원을 ‘모호함’이라고 제안한다. “그가 세편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추구한 감정은 모호함이다. (중략) 이 모호함이야말로 자신의 작품 세계와 주제에 가장 합당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주제는 바로 악이다.”라고 언급한다(「<엑소시스트>, <소서러>, <곡성> 악(惡)의 탐구」, 『씨네21』, 제1056호). 충분히 흥미롭지만 나는 이 감정의 ‘모호함’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1919년 프로이트는 「Das Unheimlich」라는 중요한 글을 발표했다. 그 전까지의 미학이란 숭고함, 기쁨, 감동 등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었지만 프로이트는 그 반대의 측면인 괴기함, 공포,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역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흔히 ‘언캐니(uncanny)’로 번역되는 독일어 단어 ‘unheimlich’의 어원과 의미를 추적한다. 독일어에서 ‘heim’은 집, 주거, 고향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파생한 ‘unheimlich’는 ‘악마적인 것’, ‘소름 끼치는 것’을 의미하고 ‘heimlich’는 ‘편안한 것’, ‘친근한 것’을 의미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heimlich’가 ‘숨어 있는’, ‘위험한’, ‘알 수 없는’, ‘무의식적인’, ‘탐구를 해봐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인’ 등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결국 두 단어의 경계는 모호해지는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것은 원래는 집과 같이 친숙한 것이었지만 나중에 억압되어서 사라진 듯하다가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낯설고 두려운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캐니’는 그 자체로 새롭거나 낯선 어떤 것이 아니라 친숙했던 것이 억압되었다가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언캐니의 공포가 <곡성>을 휘감고 있는 ‘모호함’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곡성>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은 그 자체로 친숙하면서도 낯설거나 혹은 친숙함과 두려운 낯설음이 동시에 나열되고 반복된다. 자연을 담은 풍광 쇼트들은 영화 내내 수시로 등장하고 이는 ‘곡성’의 조용함과 편안함을 드러내는데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종구는 아내와 성관계를 갖다가 효진에게 들킨다. 종구는 난감해하며 효진에게 ‘어디까지 봤냐’고 캐묻지만 효진은 별거 아니라며 오히려 종구를 다독인다. 역전된 부녀관계는 웃음을 자아내고 해가 저물어가는 호숫가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아늑함도 잠시, 종구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화재가 일어난 집에서 제정신이 아닌 여자에게 공격을 당하며 공포에 떤다. 그리고 그 여자는 다음날 아침 나무에 목을 매달린 채 발견된다. 마냥 평화롭게 보였던 ‘곡성’은 어느새 두렵고 낯선 죽음의 기운이 감돈다. 영화의 중반부, 카메라는 산에 둘러싸인 ‘곡성’을 비추는데 화면 한가운데에는 마치 화산의 분화구처럼 조그맣게 솟아오른 지형이 있고 그 안을 찬란한 햇빛이 비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장면에서 햇빛이 비추는 곳은 아마도 종구가 사는 마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지나간 이후, 효진은 아침부터 평생 먹지 않던 생선을 게걸스럽게 마구 먹어대며 기괴함을 드러낸다. 분홍색 머리핀을 고르며 예쁘냐고 물어보던, 종구에게 있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딸이었던 효진은 이 장면 이후부터 괴물로 돌변한다. 종구의 옆을 지키던 동료 성복 또한 귀신에 씌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괴물이 되어버린다. 영화 내내 친숙했던 존재들은 어느새 불쑥 언캐니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곡성>에서의 살인사건은 모두 집 안에서 벌어진다. 친숙했던 존재들이 살인을 벌이는 현장이 언캐니의 공간인 집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집은 친숙한 것과 관련된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공적인 시야 밖에 존재하며 감춰진 것과 관련된다. 집은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비밀들을 감싸고 숨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종구는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가기 위해 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고쳐 신는다. 이때 종구의 장모는 밥을 먹고 가라며 종구를 타박한다. 이 장면과 대조적으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일광이 종구의 집에 들어가자 오프닝에서 종구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효진이 멍하니 앉아있다. 집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있고 종구의 아내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었으며 종구는 그녀의 옆에서 마치 죽은 듯이 앉아있다. 평화롭고 한가롭게 밥을 먹던 집이라는 친숙한 공간은 순식간에 언캐니의 공포로 뒤덮이고 가족이라는 정상성은 괴물에 의해 완전히 해체된다.



지적 불확실성의 향연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에서 프로이트의 언캐니에 관해 자세히 논한다. 프로이트는 「Das Unheimlich」에서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 두 가지 정동을 구별한다. 첫 번째는 과거에 이미 죽은 자가 현재로 귀환할지 모른다는 공포이며, 두 번째는 살아있는 주체가 미래의 어느 순간에 다가올 필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을 상상해야 하는 곤혹스러움이다. 우리가 확신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는 산 것과 죽은 것, 이성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구분이 흐려지는 곳에서 불확실한 공간이 된다. 분명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인지, 또는 그 반대로 생명 없는 것들이 실은 살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지적 불확실성’은 죽음과 연결된 상황에서 언캐니의 한 요소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언캐니의 경험이란 과거의 어떤 것을 일단 확실하게 극복한 것 같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이를 미신이 지속되는 현상과 동일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 그리고 시체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귀환한 죽은 자, 심령 그리고 유령’을 경험하는 많은 사람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죽은 자의 혼령은 때때로 산 자들을 방문하는데, 이때 자연은 그 자체가 혼령들이 거주하고 생명을 부여받는 장소라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곡성>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죽음에 연관된 언캐니의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죽음에 관련된 두 가지 정동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기에(경험하는 순간 그 사람은 산 자가 아니다)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는 공포를 내재한다. <곡성>에 등장하는 무속신앙은 심령술을 기반으로 한 샤머니즘의 일종이고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으며 자연은 그 자체가 혼령들이 거주하고 생명을 부여받는 장소이다. 명백히 무명은 ‘곡성’의 자연이자 서낭신이다. 종구는 일광에게 외지인이 살아 있는 데 어떻게 귀신이냐며 묻는다. 일광은 외지인이 죽었다 살아난 존재라며 분명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또한 외지인은 여러 나라의 주술 문화를 섞은 듯한 국적 불명의 주술을 통해 박춘배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고 마치 좀비처럼 살아난 박춘배는 종구 일행을 공격한다. 생명 없는 것들이 실은 살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구를 둘러싼 ‘지적 불확실성’은 종구를 구원하려던 무명마저 괴물로 오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신이라 다름없는 초월적 존재인 무명은 이 사이에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이쯤에서 관객들의 감정적인 동요를 이끌어내는 일광과 일본인의 굿판 교차편집 시퀀스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광은 외지인에게 살을 날려서 없애버릴 거라며 종구의 집에서 살날림굿을 진행 한다. 본격적으로 일광이 굿을 하는 동안 외지인은 자신의 집에서 박춘배의 사진을 두고 자신만의 의식을 행한다. 일광의 굿과 외지인의 주술 의식이 번갈아가며 교차편집되는데 일광이 정승에 못을 박는 순간 효진이 몸을 비틀며 아파하다가 이윽고 외지인도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일광이 살을 날리는 대상이 효진인지 일본인인지 불분명하게 설정하여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시키고 싶었다.’는 나홍진의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일부 평론가들은 일광이 살을 날리는 대상이 효진인지 일본인인지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들을 현혹한다고 비판했다. 정한석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 놓은 쇼트들의 감각과 감정을 영화 스스로 간단하게 부인하고 나설 때 그 쇼트들로 인해 받은 감동은 어쩌란 말인가('곡성' 나홀로 유감, 국제신문, 2016-05-19).”라며 아쉬움을 드러냈고, 우혜경은 “‘현혹’(眩惑)은 나홍진이 관객을 향해 던지는 경고가 아니라 사실 그가 이 영화에서 쓰고 있는 반칙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곡성>의 ‘게임의 규칙’과 그것이 은폐하는 것, 『씨네21』 제1056호).”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아까 일광이 날린 살이 외지인한테 날린 게 아니라 효진이한테 날린 거야?’라고 의문을 느낄 때 굿판 시퀀스를 통해 느껴진 감정적 쾌감이 의문 섞인 궁금증으로 치환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이에 절반만 동의한다. 내러티브가 불친절하다고 하여 공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속에서 장르의 혼합은 비일비재하고 <곡성> 역시 다른 장르의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후던잇'(whodunit)’ 구조를 통해 범인을 잡거나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 장르의 영화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곡성>의 장르를 한 가지로 규정한다면 명백히 호러 장르이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호러 영화의 주된 장르적 쾌감은 지극히도 ‘공포’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굿판 교차편집 시퀀스는 한마디로 ‘지적 불확실성의 향연’이다. 죽은 자의 혼령은 산 자를 방문하여 괴롭히고 죽은 자는 죽음에서 현실로 돌아와 부활한다. 산 자와 죽은 자, 현실 세계와 사후 세계 사이의 충돌과 대립 속에서 지적 불확실성은 증폭된다. 우리는 그 간극에서 언캐니의 공포를 경험한다.



신은 과연 대답할 것인가

 나홍진은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은 인터뷰를 행하였는데 이 중에서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다. “어느 날 장례식장에 앉아서 ‘왜 저렇게 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시작됐던 것 같다. (중략) 한 존재가 소멸했는데, 이유가 없다는 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게 아닐까. (중략) 더 나아가 ‘신’으로 가면서 신은 선한가 또는 악한가, 실제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왜 방관하는지 등 여러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나홍진의 '곡성'에 들어갔다 완전히 현혹됐다, 부산일보, 2016-05-26).”


 위에서도 언급했듯 나홍진은 <추격자> 때부터 물음을 가지고 있었다. <추격자>와 <황해>가 십자가로 가득한 수도 서울을 배경으로 신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다면 <곡성>은 무명이라는 존재를 통해 신의 방관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대신 나홍진 본인도 그 질문이 너무나 직접적인 것을 아는 듯 전남 곡성과 이름만 같은 ‘곡성(哭聲)’이라는 가상도시를 만들어 그 안에서 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곡성’은 내러티브의 독해 불가능으로 인해 리얼리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홍진은 기독교인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과연 나홍진의 이러한 과격한 질문에 답을 할 것인가. 나홍진은 지금쯤 대답을 들었을까. <곡성>은 구원과 죽음에 대한 나홍진의 해석이자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호러 영화로서 빼어난 방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핵심을 관통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만일 신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홍진의 거세고 과격한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그 질문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불균질성을 앞으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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