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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식 Apr 18. 2017

소멸해가는 2인칭 죽음을 바라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절대 피할 수 없는, 결국은 감당해야만 하는 ‘죽음’이라는 자연적 섭리를 두고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이 지니는 위상과 의미에 따라 흥미로운 구분을 짓는다.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며 알 수 없는 것이다. ‘2인칭 죽음’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2인칭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에게도 언젠가 다가올 사건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3인칭 죽음’은 나와 무관한 죽음, 사회적이고 인구통계학적인 죽음으로, 죽음을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으로 취급한다(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변진경 옮김, 『죽음에 대하여』, 돌베개, 2016). 이에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신자유주의의 이상이 2인칭 죽음의 완전한 소멸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염려한다. 2인칭 죽음은 거의 사라지고 ‘돈’이라는 불멸의 유사 2인칭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당신’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삶은 2인칭을 왜소화한다. 그리고 3인칭에 불과한 허구의 존재인 영화 속 주인공을 ‘당신’의 자리로 끌어와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사라져 가고 있는 2인칭 죽음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일 지도 모른다(허문영, 『보이지 않는 영화』, (주)도서출판 강, 201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러한 염려에 대한 코엔 형제의 빼어난 영화적 응답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2인칭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2인칭 죽음의 죽음’에 대해 묻는다. 영화는 신자유주의가 태동하던 1980년의 황량한 텍사스를 배경으로 마약 거래 현장에서 우연히 2백만 달러를 발견한 르웰린 모스와 그를 뒤쫓는 안톤 쉬거, 그리고 이 둘을 모두 뒤쫓는 보안관 에드 톰 벨을 번갈아가며 비춘다. 모스는 쉬거의 위협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바쁘고 쉬거는 표정 하나 변화 없이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벨은 악랄하기 짝이 없는 최근 범죄들에 대해 여지없이 무기력하다.


[캡처 1] 사냥하던 사슴을 바라보듯 멕시코 갱을 바라보는 모스. 하이에나처럼 먹잇감의 주변을 서성인다.
[캡처 2] 벨의 시점 쇼트에 의해 3인칭 죽음으로 비춰지는 모스.

 모스는 2백만 달러라는 거대한 돈을 유사 2인칭으로 대체하는 것에 거리낌 없는 인물이다. 모스는 사슴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마약 거래 현장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돈가방을 챙긴다. 무사히 집에 돌아왔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모스는 일어나더니 물통에 물을 채우고는 다시 마약 거래가 있었던 장소로 향한다. 물통에 물을 채운 이유는 마약 거래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멕시코 범죄자가 물을 달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 본성에 깃든 일말의 죄책감이라는 단어로 모스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스가 돈가방을 획득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모스는 먼발치에서 나무에 기대앉아있는 멕시코인을 바라본다. 그는 시간까지 재며 끈기 있게 그가 죽었는지 아닌지 관찰한다. 마치 사냥감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말이다([캡처 1]). 이렇게 냉정하던 그가 정말 죄책감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존자에게 물을 주러 갔을까? 모스는 영화 초반 마약 거래 현장을 처음 발견할 때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3인칭 죽음을 목격하고 그 속에서 생존자를 발견한다. 생존자는 모스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3인칭의 존재였지만 모스의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2인칭의 존재로 변모하는 중이다. 그가 살아남는다면 돈을 훔쳐간 자신의 존재를 증언할지도 모르니 모스는 불안하여 오밤중에라도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만약 그를 살리려 했다면 물 대신 구급약품을 챙겼을 것이며(아니면 애초부터 돈가방을 훔치지 않고 경찰에 신고부터 했을 것이다), 그를 죽이려 했다면 총만 챙긴 채 물을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존자가 원했던 물을 가져가는 모스의 행동은 직접적으로 죽이기도 싫지만 직접적으로 살리기도 싫은, 생존자의 죽음에 최대한 개입을 하지 않은 채로 철저하게 그와 3인칭으로 남고 싶은 모스의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만약 생존자가 살아있었다면 모스는 그에게 물을 주고 죽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가 원하는 것을 해줬을 뿐 그의 죽음에 아무런 관련이 없어.’라는 투로 말이다. 우리는 모스가 쉬거에게 먼저 찾아가겠다며 큰소리쳤지만 그가 부인과 함께 도망치려 했고, 결국 허무하게 멕시코 갱들에게 살해당한 것을 알고 있다. 영화 내내 모스는 관객과 가까운 2인칭의 주인공이었고 관객은 모스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코엔 형제는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모스와 쉬거를 뒤쫓던 늙은 보안관 벨에게 처음으로 시점 쇼트를 허락하는데 관객은 벨의 시점을 통해 모스의 죽음을 3인칭 죽음으로 경험하게 된다([캡처 2]). 2인칭 죽음을 3인칭 죽음으로 체화하기 위해 차갑고도 냉정하게 죽음들을 외면하던 모스가 타인에게 3인칭 죽음으로 비치는 아이러니. 모스는 결국 자신이 처음 발견했던 마약 거래 현장의 시체들과 마찬가지 상태가 된다.


[캡처 3] 조커와 쉬거의 결정적인 차이는 돈을 대하는 태도이다.

 모스가 2인칭 죽음의 소멸을 위해 애쓴다면 쉬거는 이미 그 소멸이 완료되어 애초부터 2인칭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쉬거는 가축 도살용으로 쓰이는 캐틀건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구멍을 내어 죽이며 고용된 청부업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방해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같은 편의 사람들도 서슴없이 죽인다. ‘나’라는 1인칭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전부 3인칭, 더 나아가 인간을 마치 가축처럼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이 아닌 ‘악(惡)’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쉬거는 가끔씩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사람을 죽일 건지 결정한다. 동전 던지기를 당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얼핏 1/2의 확률로 생존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미약하게 남아있는 쉬거의 인간성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애초부터 동전 던지기를 당할 이유가 없는 이에게 이것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쉬거가 제안하는 동전 던지기에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폭력만이 자리한다. 모스의 아내 칼라 진 모스가 동전 던지기를 거부하고도 쉬거에게 살해당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살해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쉬거가 그녀의 집을 나오며 부츠에 피가 묻었는지 확인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쉬거가 그녀를 살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쉬거가 이토록 많은 인물들을 살해하는 이유가 2백만 달러의 돈가방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쉬거는 모스를 쫓는 과정에서 자신을 방해한다면 동전 던지기도 제안하지 않고 즉시 처형하지만 가게 주인과 모스의 아내에게만 동전 던지기를 먼저 제안한다. 가게 주인은 쉬거의 심기를 약간 불쾌하게 만든 죄가 있을 뿐이며 쉬거는 모스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돈가방을 주지 않으면 아내를 죽이겠다’는 모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스의 아내를 찾아간다. 이들은 2백만 달러를 추적하는 과정에 있어 쉬거를 방해한 적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2백만 달러라는 돈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인물들이기 때문에 쉬거는 친절(?)하게도 캐틀건과 산탄총 이전에 동전 던지기를 먼저 제안한다. 역대 할리우드 영화 사상 최고의 악당을 선정함에 있어 안톤 쉬거만큼이나 사악한 악당으로 자주 거론되는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다크 나이트>의 조커다. 조커는 산처럼 드높게 쌓인 돈다발을 보고도 아무 거리낌 없이 돈다발을 불태워 잿더미로 만든다. 돈만 밝히는 악당은 필요 없고 돈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며 모든 걸 다 태워버리겠다는 조커. 반면 쉬거는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고용된 카슨 웰스와의 대화에서 돈가방은 어차피 자신에게 올 거라며 여유가 넘친다. 레갈 모텔에서 모스가 환풍구에 돈가방을 숨겼던 사실을 알아차린 쉬거는 모스가 죽은 데저트 샌즈 모텔에 방문하여 환풍구에 숨겨져 있던 돈가방을 가져가며 자신의 말을 끝내 사실로 만든다(열린 환풍구 바닥에는 자욱한 먼지 사이로 무언가 끌린듯한 자국이 있다. 그리고 환풍구 밑에는 동전이 놓여있다. 모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돈가방을 환풍구 안에 숨겼을 것이다. 카메라가 비어있는 문고리와 동전 던지기에 쓰이던 동전을 보여준다는 것은 쉬거가 캐틀건으로 문고리를 날려버리고 동전으로 환풍구 나사를 열어 돈가방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한다-[캡처 3]). 조커는 닥치는 대로 고담시티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만들기 위해 분주하지만 쉬거는 그저 자신의 이익에 방해되는 자들이 거슬릴 뿐이다. 쉬거의 행동의 기저에는 분명 2인칭 죽음의 죽음과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돈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함께한다.


[캡처 4] 쉬거와 문 하나를 두고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벨. 그러나 어느새 쉬거는 사라지고 없다.

 벨은 영화 내내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살인 사건들에 대해 진저리가 나있다. 그는 모스와 쉬거를 뒤쫓으면서 수많은 시체들을 마주하고 신문에서는 노인들을 죽이고 사회보장 연금을 챙긴 캘리포니아 부부에 대한 기사를 접한다. 돈과 마약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고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동료 보안관의 말에 벨은 깊은 한숨으로 동조할 뿐이다. 벨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뒤이어 수십 년간 보안관으로 근무하며 자신과 관계없는 3인칭 죽음을 2인칭 죽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는 한계상황에 도달했다. 벨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내레이션을 통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판돈을 더 올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나러 나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목숨을 걸기는 싫지만 만약 상황이 닥친다면 피하지 않겠다는 벨의 선언. 러닝 타임 내내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던 영화 내에서 쉽게 잊지 못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의 후반부, 벨은 모스가 죽은 데저트 샌즈 모텔에 다시 방문한다. 범죄 현장을 넘지 말라는 노란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모스가 죽은 114호실의 문 자물쇠는 사라져 있다. 이는 연쇄살인마 안톤 쉬거의 범죄현장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쉬거의 침입을 직감한 벨. 텅 비어있는 문고리 구멍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벨과 쉬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벨은 긴장한 표정으로 용감하게 문을 열지만 쉬거는 이미 자리에 없다([캡처 4]). 쉬거는 환풍구에 숨긴 돈가방을 찾아내어 이미 사라졌고 벨은 그 이후에 도착했다. 인기척 때문에 문 뒤에 숨어있던 쉬거의 섬뜩한 모습은 벨이 도착하기 이전에 벌어진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시간대의 두 사건을 교묘하게 붙여놓아 마치 동시간대에 벌어지는 일처럼 편집된 셈이다. 영화 내내 시간의 순서대로 모스, 쉬거, 벨을 추적하던 카메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것도 너무나도 짧은 순간 시간을 잠시 거스른다. 벨은 내레이션을 통한 자신의 선언을 지켜야 할 순간이 다가왔고 그것을 이행하지만 막상 카메라는 그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이 장면 직후 벨은 엘리스 아저씨의 집을 방문한다. 하나님이 살펴주실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벨에게 엘리스는 벨의 삼촌이자 보안관이었던 맥이 강도단에게 살해되었던 당시를 묘사하며 벨이 당한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고 다가오는 현실은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이 기다려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이라는 엘리스. 영화 내내 벨과 쉬거를 만나지 않게 하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문 하나를 두고 마주칠 뻔하게 만들더니 결국은 둘의 충돌을 허락하지 않는 코엔 형제의 이러한 영화적 선택은 수십 년 동안 보안관의 자리에서 텍사스를 수호해 온 벨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도의이자 도리 아니었을까. 벨은 영화 초반 내레이션을 통해 옛날 보안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총을 멀리하던 옛날의 보안관들이 현재의 시대를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다고 한다. 총이 없어도 범죄를 소탕하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총이 있어도 소탕은커녕 범죄를 이해하기도 힘든 세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벨은 2인칭 죽음뿐만 아니라 3인칭 죽음도 2인칭 죽음화하여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애써왔다. 벨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범죄와 맞서 왔지만 엘리스의 말대로 잔인하고 각박한 현실은 벨의 노력을 외면한 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2인칭은 점점 왜소화 되고 2인칭 죽음은 점점 소멸해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적 선택은 단순히 벨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2인칭 죽음을 사유하는 벨이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한 귀중한 결단이다.


[캡처 5] 교통사고를 당한 쉬거를 쳐다보는 듯한 벨. 원작 소설에서는 표현 불가능한 영화적 기법이다.

 벨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에게 자신이 꾼 두 개의 꿈에 대해 언급한다. 첫 번째 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아버지가 준 돈을 잃어버린 거 같다고 하는 꿈이고 두 번째 꿈은 밤에 눈 덮인 산을 아버지와 벨이 말을 타고 가는데 아버지가 벨을 앞질러 가더니 담요를 두르고 벨을 맞이하기 위해 어둡고 추운 곳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꿈이라고 한다. 두 개의 꿈에 대하여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해보고 싶다. 2인칭의 자리를 돈으로 대체하지 않고 있는 벨에게 있어 첫 번째 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돈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두 번째 꿈에 등장하는 불은 아버지가 소중히 보호하는 무언가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혹시 자신에게 있어 2인칭 혹은 3인칭의 존재인 ‘타인’에 대한 메타포가 아닐까. 벨과 그의 아버지는 모두 보안관이었고 보안관의 사명은 범죄에 맞서 타인을 보호하고 세상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벨과 그의 아버지는 타인의 죽음을 사유함으로써 수많은 죽음들의 의미 없음과 그 죽음에 대한 관심 없음에 저항하는 바로 그곳에 정확히 자리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살펴보자. 교통사고를 당한 쉬거가 천천히 걸어가는 뒷모습 이후로 화면은 천천히 디졸브 되어 창 밖을 바라보는 벨의 모습으로 장면 전환된다. 두 장면이 느리게 전환되어 겹쳐지는데 이때 벨은 마치 쉬거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캡처 5]). 벨은 아직 쉬거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걸까. 하지만 쉬거는 자취를 감췄고 벨은 보안관을 그만두었다. 소중히 간직하던 불은 꺼져버린 것일까? 아니다. 아버지가 벨에게 불을 전달했듯 벨 또한 그 불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면 된다. 그렇게 불은 꺼지지 않고 번질 수 있다. 벨은 지금껏 불이 꺼지지 않게 노력했지만 이제는 그 불을 전달해야 할 시기에 도래했고 그 시기는 코엔 형제의 중요한 결단으로 인해 마련되었다. 불은 나에게도 전달되었고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미 불을 소중히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많은 국민들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3인칭의 죽음들을 자신과 가까운 2인칭의 죽음처럼 애도했고 3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 죽음들을 잊지 않고 있다. 세월호는 이제야 인양되었고 아직도 9명은 수습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거라 믿는다.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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