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그래비티>를 보면 의문이 드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래비티>에서 주인공 라이언 스톤은 우주왕복선 익스플로러의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던 도중 러시아 인공위성의 잔해물과 충돌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체험한다. 동료들은 전부 죽고 혼자가 된 라이언은 우주미아가 될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해나간다. 마침내 국제 정거장 ISS의 소유즈를 타고 중국 톈궁 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여 우주선 셴조에 힘겹게 탑승하게 된 라이언.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생사의 갈림길에 봉착해있는 상황에서 라이언은 감정에 복받쳐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그야말로 절정(climax)의 순간. 그런데 이 순간의 화면 구도는 조금 이상하다. 카메라는 격양되어 있는 라이언의 얼굴에서 서서히 멀어지더니 라이언을 미디엄 쇼트로 비춘다([캡처 1]). 물론 절정의 순간이라고 해서 카메라가 항상 피사체에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내내 우주를 유영하는 라이언에게 밀착하여 세세한 감정까지 담아내던 카메라는 이제 와서 라이언의 감정을 포착하는 데에 주저하는 걸까. 더군다나 라이언을 연기하는 배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산드라 블록 아니던가. 그녀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왜 이전과는 다르게 라이언의 얼굴에 접근하지 않고 오히려 멀어지는가?
카메라의 이러한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전까지 카메라가 라이언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영화 초반 라이언은 러시아 인공위성의 잔해물과 충돌하고 엄청난 속도로 지구와 멀어지는데 이때 카메라는 라이언을 익스트림 롱 쇼트로 바라보다가 라이언이 점점 카메라로 다가오자 롱 쇼트로 전환되고 이후 라이언에게 밀착하여 얼굴을 클로즈업하더니 뒤이어 라이언의 시점 쇼트로 전환된다. 그리고는 카메라는 아까의 역순으로 라이언에게서 천천히 빠져나와 다시금 롱 쇼트로 전환된다([캡처 2]). 카메라는 3인칭의 입장에서 라이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라이언 그녀 자신이 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빠져나와 다시 라이언을 바라본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점을 넘나드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너무나 자유로워 신비함과 공포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러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이후에 라이언은 무중력의 공간인 우주에서 멈출 수가 없고 카메라는 더 이상 라이언을 따라가지 않고 고정된 상태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본다. 이때 라이언은 동료 맷 코왈스키와 연락이 닿는다. 라이언의 수신기에서 맷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라이언은 저절로 카메라로 점점 다가와 익스트림 롱 쇼트에서 서서히 롱 쇼트로 전환된다([캡처 3]).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라이언은 계속 화면 끝으로 멀어져 아주 작은 점처럼 보여야 정상이다. 무중력 상태이기 때문에 라이언은 절대로 카메라에게 접근할 수 없지만 라이언은 이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만다. 그녀에게는 초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후 맷과 라이언은 우주선 파편에 맞아 숨진 동료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이동한다. 라이언이 시계의 타이머를 설정할 때에 화면은 라이언의 시점 쇼트이지만 라이언이 맷과 연결되어있는 끈을 잡아당겨서 카메라가 위로 180도 회전하는 순간 화면은 라이언의 바스트 쇼트로 바뀐다([캡처 4]). 카메라는 분명 라이언의 1인칭 시점이었는데 갑자기 라이언에게서 빠져나와 그녀를 3인칭으로 바라본다. 카메라는 3인칭 관찰자적 입장에서 순식간에 라이언이 되고는 다시금 관찰자가 된다.
익스플로러가 파괴된 것을 확인한 라이언과 맷은 줄 하나로 연결된 채 국제 정거장 ISS로 천천히 이동한다. 태양에 비치는 지구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라이언과 맷은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다. 라이언은 맷과의 대화에서 딸이 하나 있었지만 학교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미끄러져서 허무하게 죽었고 연락을 받을 당시에는 운전 중이었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는 그냥 출근하고 운전하며 아무 멘트가 없는 라디오를 무심히 듣는 것이 지구에서 하는 일의 전부라고 대답한다. 딸이 죽을 당시의 행동을 반복하고 삶의 의지를 잃었다는 점에서 라이언은 사실상 지구에서 죽은 존재나 다름없다. 그러한 라이언이 죽음과 공포의 공간인 우주에 불시착한다. 우주는 무중력과 무한의 공간으로 방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끝이 없는 우주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방향을 정할 수 있을까. 라이언은 딸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죽은' 인간이다. 이러한 라이언이 암흑만이 가득한 우주에 들어가는 순간 라이언의 방향성은 제거되고 라이언과 우주는 동일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성의 상실은 180도 법칙을 비롯한 기본적인 영화 문법들이 유효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실제 촬영이었다면 불가능하지만 우주선 밖에서 인물들의 행동이 전부 CG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러한 카메라의 자유로운 움직임들은 기존의 영화 문법들을 가볍게 무시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약 20여 분간 라이언은 죽음의 공포를 겪게 되는데 이때 카메라는 관찰자와 주인공을 넘나들며 관객들이 3D 입체효과가 극대화된 스펙터클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시점 전환은 한마디로 '카메라의 눈과 나의 눈이 일치하여 내가 우주가 되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우주이고 라이언인 동시에 영화를 보고 있는 '나'다.
※ 참고
- 네이버 영화 매거진 - 스페셜 리포트 : 영화의 시점 QnA
- 네이버 영화 매거진 - 스페셜 리포트 : 영화연출의 세계, 180도의 법칙은?
그렇다면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캡처 1]의 장면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자. 맷과 라이언은 국제우주정거장 ISS로 다가가던 도중 속도를 줄이지 못해 ISS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맷은 라이언을 살리기 위해 그녀와 연결되어 있던 케이블 연결 고리를 풀고 쓸쓸히 우주로 멀어져 간다. 라이언은 홀로 ISS의 소유즈에 탑승하지만 연료가 없어 이동할 수 없다. 라이언은 휴스턴 우주 센터와 AM 주파수로 연결을 시도하던 도중 우연하게 라디오를 듣던 아닌강이라는 남자와 교신하게 된다. 희미하게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아기의 옹알이, 그리고 아닌강의 웃음소리와 자장가. 라디오에서 그렇게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생명의 소리를 우주에서 듣게 되는 라이언은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만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라이언은 삶을 포기하기 위해 조용히 산소 공급장치를 끄고 죽음을 준비한다([캡처 5]). 죽음을 준비하는 라이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아기 울음소리의 안타까운 대조. 이 장면의 화면 구도는 [캡처 1]과 같은데 라이언을 기준으로 연장선을 긋고 편의상 라이언의 좌측을 A, 우측을 B로 가정해보자([캡처 1]과 화면 구도가 같은 화면들은 여러 번 반복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이 가정을 똑같이 적용하도록 한다). 이때 카메라는 A에 위치하여 라이언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후 라이언이 산소 공급장치를 끈 채로 조용히 앉아있는데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맷이 해치를 열고 들어와 라이언의 옆에 위치한다. 맷은 연료가 없으면 연착륙 장치를 사용해보자고 제안하지만 라이언은 시뮬레이션에서 매번 추락시켰다며 비관적으로 대답한다. 그러자 맷은 소유즈의 시스템을 하나씩 끄며 라이언을 다그친다. 맷은 계속 가기로 했으면 그 결심을 따라야 하고 두 발로 딱 버티고 제대로 살아가 보자며 라이언을 설득한다. 카메라는 점점 라이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는 맷의 마지막 대사 이후로 카메라가 다시 옆을 바라보자 맷은 사라져 있다([캡처 6]). 맷은 라이언의 환상이었다. 맷은 영화 처음부터 끝없는 수다와 실없는 농담을 늘어놓으며 장난기가 많은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는 지구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줄 알고 우주로 멀어지는 그 순간에도 솔로비예프의 우주 유영 기록을 깰 거 같고 갠지스 강 위에 태양을 보고 환상적이라는 농담을 던진다. 라이언과 정반대의 인물이 환상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삶을 포기하기 싫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라이언의 무의식이 필사적으로 발현되었다고 믿는 것이 옳을까. 이 장면 또한 라이언을 기준으로 A와 B로 나누어보자. 카메라는 A에 위치하여 둘을 바라보고 있다. 라이언 역시 A에 위치해 있고 맷은 B에 위치하여 삶을 포기하려는 라이언을 다그친다. 라이언은 이미 지구에서 죽은 인간이라면 맷은 영화 내내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맷이 없었다면 라이언은 소유즈까지 올 수도 없었다. A가 라이언의 공간이라면 B는 맷의 공간이고 A가 죽음을 준비하는 공간이라면 B는 삶을 지속하려는 공간이다. 두 공간은 희미하게 나뉘어 있고 카메라는 라이언과 동일시되어 라이언의 감정을 드러낸다. 카메라는 A에 위치함으로써 라이언이 아직은 삶보다는 죽음을 택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알린다.
맷의 환상이 사라진 이후 라이언은 산소 공급장치를 재개하고 연착륙 장치를 사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때부터 라이언은 희망에 가득 찬 웃음으로 혼잣말을 하며 맷에게 부탁한다. 맷이 딸을 만나게 되면 엄마는 포기하지 않을 거고 딸을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는 라이언의 부탁. 라이언은 마치 영화 초반 끝없는 수다와 실없는 농담을 늘어놓던 맷처럼 행동한다. 맷의 삶의 의지는 라이언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때의 카메라를 살펴보자. 라이언이 연착륙 장치 매뉴얼을 꺼내자 카메라는 갑자기 A가 아닌 B로 이동하여 라이언을 바라보는데 카메라는 라이언이 소유즈를 떠날 때까지 B의 위치를 고수한다([캡처 7]). 라이언이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하는 순간 카메라는 A에서 B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라이언의 공간에서 맷의 공간으로, 죽음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라이언이 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한다. 라이언의 심경변화는 단순히 라이언의 말과 행동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카메라의 단 한 번의 이동으로 극적으로 묘사된다. 형식과 내용은 일치되고 카메라는 한 번의 이동으로 주제를 시각화한다. 이 얼마나 영리하고 세련된 움직임인가.
이제 남겨두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라이언은 우주선 셴조를 타고 드디어 지구를 향해 나아간다. 맷이 라이언을 구하고 우주로 멀어지는 순간까지도 라이언과 끝없이 대화를 시도했듯이 라이언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절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고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 모험담을 이야기하거나 여기서 10분 안에 불타 죽는다는 혼잣말을 계속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때의 화면 구도 역시 라이언을 기준으로 A와 B로 바라보자. 카메라는 서서히 라이언과 멀어지더니 우주선의 빈 좌석이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게 만든다([캡처 1-1]). 즉, 카메라는 라이언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에서 빈 좌석을 라이언과 동등하게 담아내기 위해 라이언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빈 공간에는 B의 공간에 있던 맷이 상징적으로 위치해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제목 '그래비티(gravity)'는 중력이라는 뜻으로 지구의 만유인력과 자전에 의한 원심력을 합한 힘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만유인력으로 인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지구는 지구 상의 모든 물체를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중력'이라는 과학적 단어는 영화를 통해 인문학적 단어로 탈바꿈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끊을 수 없는 관계,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바로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역설한다. 인간은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죽은 자들을 떠나보내고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묵묵히 살아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시각화하기 위해 감독은 절정의 순간, 보이지 않는 중력과 죽은 자들을 위해 빈자리를 담는다. 라이언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대화의 상대자는 맷이 될 수도 있고 딸이 될 수도 있으며 아닌강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지구에 살아있는 그녀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라이언의 옆에 있다. 딸의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했던 라이언은 결국 죽음의 공간 우주에서 삶을 되찾고 다시 지구로 귀환한다. 그리고 중력을 견뎌내고 지구 위에서 두 발로 당당히 일어선다. 지구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인지하고 수다가 구원이 되어 라이언이 삶에 대한 열정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맷 코왈스키라는 존재,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한 화면 구도의 변화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은 삼위일체 되어 아름답고 찬란한 절정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화면 구도와 단 한 번의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장중한 깊이와 품격, 숭고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그래비티>. 어찌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