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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식 Dec 28. 2017

남북 전쟁에서 존 포드까지 : 쿠엔틴 타란티노의 정치학

<장고:분노의 추적자>와 <헤이트풀8>을 중심으로


 2017년 8월 12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Charlottesville)에서는 남부 연합기, KKK단 휘장 그리고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하늘을 뒤덮었고 나치 경례를 하는 극우주의자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집회에 반대하기 위해 모인 반대 세력과 무력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승용차 한 대가 군중을 향해 돌진하여 수십 명이 다쳤고 여성 한 명은 안타깝게 사망했다. 승용차를 운전한 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트럼프와 관련 있는 집회에 간다.”라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선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끔찍한 사건을 두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양쪽(both sides) 모두 책임이 있다.”라며 극우주의자들과 대립한 반대편도 함께 비판했다. 마치 인종주의를 옹호한 듯한 트럼프의 발언에 대해 극우세력의 대표들은 트위터를 통해 ‘트럼프가 진실을 말했다’며 환영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하였지만 약 150년이 지난 후 트럼프는 인종갈등의 불씨에 기름을 부으며 남북 전쟁을 다시 부추기고 있다. 공화당의 대선주자가 링컨에서 트럼프로 바뀌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집권 이후 백인우월주의자인 트럼프가 당선되는 과정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파탄 난 것도 모자라 민주주의의 적이 시스템 내부에 있음을 미국 스스로가 증명했다고 봐야할까. 오바마의 당선과 재선은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유권자들의 개념에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고 이는 할리우드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했다. 오바마의 8년 동안 할리우드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이 전 세계를 지키며 미국적 가치를 수호하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미국 서부극의 우주 확장판 <스타워즈> 시리즈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헬프>, <노예 12년>, <셀마>, <러빙>, <히든 피겨스>, <펜스>, <문라이트>, <겟 아웃> 등 흑인 차별 문제를 다루면서도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지속해서 생산해냈다. <노예 12년>은 흑인 감독이 만든 영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유권자들은 당선확률 91%의 힐러리 클린턴 대신 9%의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하는 또 다른 이변을 낳았다.



[캡처 1]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 KKK단의 전신으로 보이는 베넷 일당은 닥터 슐츠의 함정에 빠져 비명횡사한다.

안티-존 포드(anti-John Ford)

 그러나 할리우드의 노력이 헛된 수고로만 전락하지는 않았다. 흑인 차별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하나같이 백인 사회에서 핍박받는 흑인들을 보여주며 인종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에 만족했다면 한 발짝 더 나아가 흑백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파헤친 영화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 불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서부극이다.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 주인공 장고와 닥터 슐츠는 빅 대디라고 불리는 베넷 선생의 농장에 숨어있던 브리틀 형제를 처단한다. 화가 난 베넷은 장고와 슐츠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데 이들은 하얀 복면을 쓰고 복면의 불편함에 대해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더니 닥터 슐츠의 총 한 방에 비명횡사한다([캡처 1]). 백인 우월단체 KKK단은 남북 전쟁이 지난 이후 출현했다는 점에서 베넷 일당은 KKK단의 전신인 듯 보인다. 타란티노는 2012년 미국의 온라인 매거진 「더 루트(The Root)」와의 인터뷰에서 이 우스꽝스러운 단속반(Regulators) 시퀀스에 대해 D.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을 의식하고 만들었음을 밝혔다. 또한 <국가의 탄생>의 원작 소설 『클랜스맨(Clansman)』의 저자 토머스 딕슨 목사와 D.W. 그리피스로 인해 KKK단이 1960년대 초까지 기승을 부렸고 <국가의 탄생>에서 KKK단원으로 등장한 존 포드를 ‘미워한다(hate)’라고 했다. 존 포드를 ‘미국 서부극의 거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의 영화는 앵글로색슨의 우월성을 맹신하면서 다른 인종의 인권을 묵살한다는 것이다.


 이 발언으로 인해 타란티노는 즉각 논란에 휩싸였고 미국의 영화전문지 「필름 코멘트(Film Comment)」의 비평가 켄트 존스는 존 포드의 많은 영화를 나열하며 타란티노의 잘못된 단어 선택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KKK단을 노골적으로 영웅화하여 주제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국가의 탄생>은 차치하더라도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감독과 비평가들로부터 위대한 감독으로 칭송받는 존 포드를 건드렸으니 타란티노는 제 무덤을 판 것이나 다름없다. 타란티노의 발언은 분명 동의하기 어렵다. 아니, 동의할 수 없다. 존 포드가 만든 백 편이 넘는 영화들이 인종차별적이라면 어떻게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의 영화인들과 시네필(Cinephile)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조차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매도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타란티노의 문제적 발언이 ‘나의 영화는 존 포드의 영화와 전혀 다르다!’라는 일종의 거대한 선언처럼 들렸다. 필름 누아르, 서부극, 사무라이 영화와 무협 영화 등 서로 다른 장르적 요소들이 마구 뒤섞여 자유자재로 결합하고 잔혹한 폭력과 장광설의 수다가 난무하는 화려한 영화적 스타일에 가려 있어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어느샌가 그가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필시 정치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타란티노가 근대사를 확립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서부극을 일부러 택했다면 서부극의 정전(正典)을 확립한 존 포드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추측은 곧 확신이 되었고 단속반 시퀀스는 그 선언의 시작이었음을 깨달았다.



<장고:분노의 추적자> - 사법권 신화 해체하기

 기원전 8세기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부터 21세기 대한민국의 막장 드라마까지 인간에게 있어 복수라는 주제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사적 복수’는 항상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법’이라는 공적 심판과 충돌하는데 이는 서부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역사적 배경이 없더라도 대부분의 서부극은 남북 전쟁 후부터 프런티어(the Frontier) 종언을 고한 서부 개척시대까지를 다룬다. 이 시기의 미국은 현대 사회의 기본인 법이 형성되기 시작되는 시점이었고 서부극은 사법권이 확립되는 과정을 사적 복수라는 폭력과 대립시켰다는 점에서 복잡다단한 층위를 갖는다. 서부극에서의 영웅은 사적 복수를 통해 무법자 또는 악당을 처단하고 문명화된 공동체를 지켜낸 후 그 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다시 서부로 떠난다.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 문명을 떠나 더 깊은 프런티어를 찾아 나서는 영웅들의 내러티브는 사적 복수 대신 사법권을 신화화한다. 존 포드의 영화도 그렇다. <역마차>에서 링고 키드는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플러머 형제들에 복수하는데 그 과정에서 사법권을 가진 보안관 컬리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다.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동생 제임스의 죽음을 두고 클랜튼 일가에게 복수해야 할 때 우연하게도 보안관 자리를 제의 받아 문제를 해결한다. 사적 복수가 더 이상 정당성을 갖지 못하고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토대를 둔 사법권이 정당성을 갖게 됨으로써 서부극은 사법권을 신화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 사법권의 크나큰 오점은 흑인 노예 제도를 합법화했었다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서부극 2편이 남북 전쟁을 기준으로 그리 머지않은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고:분노의 추적자>는 남북 전쟁 발발 2년 전을 배경으로 주인공 장고는 강제로 헤어져버린 아내 브룸힐다를 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사적 복수의 화신이다. 현상금 사냥꾼 닥터 슐츠는 이러한 장고를 사법권을 가진 현상금 사냥꾼으로 성장시키는 조력자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 닥터 슐츠는 텍사스 도트리의 마을 보안관을 총으로 죽이고는 연방 보안관에게 마을 보안관이 소떼를 훔쳐서 수배 중이었음을 밝힌다. 남북 전쟁 이전에도 미국의 사법권은 보안관이 마을을 수호하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허술하게 무법자가 합법적으로 보안관이 될 수 있음을 영화는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닥터 슐츠는 브룸힐다라는 이름이 지크프리트 전설에서 따왔음을 장고에게 알려주고 게르만 민족의 신화와 전설이 담긴 중세시대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지크프리트를 소환하여 장고에게 투영한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시작부터 장고가 미국 사법권 신화의 영웅이 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그리고는 지명수배자의 아들 앞에서 냉정하게 수배자를 시체로 만들며 현상금 사냥꾼의 지위를 확고히 갖춘 닥터 슐츠를 사적 복수의 세계로 떨어뜨리는 데 성공한다. 장고와 닥터 슐츠는 브룸힐다를 구하기 위해 미시시피에서 네 번째로 큰 목화농장 ‘캔디랜드’의 소유주 캘빈 캔디를 만난다. 그 곳에서 슐츠는 달타냥이라는 노예가 도망가다가 붙잡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캔디는 달타냥을 구매하는데 쓴 500달러를 누가 보상할거냐며 달타냥을 나무라는데 이때 슐츠는 달타냥에 대한 캔디의 조롱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대신 변제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캔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타냥을 개들에게 물어 뜯겨 죽게 한다. 이 사건은 곧 슐츠의 트라우마로 발전한다. 장고와 닥터 슐츠는 오랜 고생 끝에 브룸힐다의 소유권을 12000달러라는 거금을 통해 합법적으로 구매하게 되지만 슐츠는 달타냥이 개들에게 물어 뜯겨 죽는 장면이 파편적으로 떠오르며 괴롭기만 하다. 닥터 슐츠가 캔디와 악수만 하게 된다면 브룸힐다는 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슐츠는 악수를 거부한 채 캔디를 총으로 죽인 이후 자신 또한 총에 맞아 죽고 만다. “미안해, 참을 수가 없었어.” 수많은 무법자들을 사법권의 이름으로 처단하던 닥터 슐츠는 사법권이 통하지 않는 악당 캘빈 캔디에게 결국 사적 복수를 감행한다.


[캡처 2]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 '남북 전쟁 3년 전’이 아닌 ‘남북 전쟁 2년 전’으로 표기된 자막.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장고:분노의 추적자>는 ‘1858년 남북 전쟁 2년 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캡처 2]). 그러나 남북 전쟁은 1861년에 발발했다. 이는 6·25 전쟁을 ‘1947년 6·25 전쟁 2년 전’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흑인 노예제는 남북 전쟁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으로 여겨지는 남북 전쟁의 발발연도를 잘못 적은 것은 정말 단순한 실수일까? 쿠엔틴 타란티노는 괴짜일 뿐 바보가 아니다. 슐츠의 죽음 이후 장고는 현상금 사냥꾼이 아닌 무법자의 이름으로 캔디 집안을 박살낸다. 장고는 피 튀기는 총싸움 속에서 끝끝내 살아나 캔디의 누나와 부하들 그리고 캔디보다 더 악독한 흑인 집사 스티븐을 처단한 뒤 캔디랜드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다. 이러한 장고의 해피엔딩은 실제 역사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하지 못했던 행동을 장고가 대신하여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란티노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오프닝 자막을 통해 이 영화가 1860년에 남북 전쟁이 발발하는 대체역사물임을 알린다. 스티븐은 죽기 직전 장고에게 “검둥이 하나가 백인을 다 죽이진 못해. 넌 결국 잡혀!”라고 말한다. 1861년에 남북 전쟁이 발발하는 미국이라면 스티븐의 말대로 장고는 결국 잡혀 죽고 150년이 지난 이후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1860년에 남북 전쟁이 발발하는 미국이라면 장고는 정말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고 역사는 실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타란티노는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세상을 향해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던 흑인이 아니라 남북 전쟁 이전에도 흑인이 백인을 이길 수 있는 세계를 짧은 자막 하나로 창조해낸다.



<헤이트풀8> - 프런티어(the Frontier) 신화 해체하기

 <장고:분노의 추적자>가 1860년에 남북 전쟁이 발발하는 타란티노의 낭만적 서부극이라면 <헤이트풀8>은 1861년에 남북 전쟁이 발발한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은 미국을 다루고 미국의 흑백 갈등이 15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이유를 탐색한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프런티어 신화는 타란티노에 의해 철저히 해체당한다. 1890년 미국 인구통계청은 인구 밀도가 1평방 마일 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 지역과의 경계를 ‘프런티어(the Frontier)’로 정의하고, 미국에 더 이상 프런티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할 때만 하더라도 대서양 연안에 몰려있던 13개 주가 전부였지만 약 100년 만에 미국은 더는 개척할 프런티어가 없었다. 이러한 프런티어의 종언을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프레드릭 잭슨 터너는 1893년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중요성(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이라는 미국 역사 연구의 판도를 뒤집은 논문을 통해 미국인들의 서부 개척이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부의 광활한 자유 토지(free land)에서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시초가 되었다고 했다. 미국의 국민성을 유럽에서 찾고 있던 기존의 역사관과 달리 ‘미국의 역사가 프런티어의 역사’라는 터너의 역사관은 미국의 주체사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프런티어는 끝났지만 프런티어 정신은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수 천 편 이상 제작된 서부극을 통해 미국인들의 문화에 강하게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애리조나주의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를 무한한 프런티어의 공간으로 창조해낸 존 포드가 있다.


[캡처 3] <수색자>에서 이든은 드넓은 모뉴먼트 밸리를 향해 나아가며 화면과 점점 멀어진다.
[캡처 4]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쇼산나는 기관총 세례를 벗어나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서부극에 대한 개념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고전적 서부극이 착한 백인이 나쁜 인디언을 물리치고 공동체를 지켜낸다면 수정주의 서부극은 백인들이 공동체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인디언들에게 행한 폭력의 잔인성을 폭로한다. 또한, 서부극은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미국의 삶과 기원의 문제를 통해 미국의 건국 신화로 작동하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 질서/무정부, 개인/공동체, 문명/야만, 자연/문화, 카우보이/인디언 등으로 대립한다. 문명은 끊임없는 신화적 경쟁을 벌이며 야만을 만나는데 이러한 대립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엔딩으로 대표된다. 존 포드의 <수색자> 엔딩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집 밖에서 데비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든을 따라가다가 사람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후 카메라는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문밖에 홀로 남아 있는 이든을 비춘다. 이든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드넓은 모뉴먼트 밸리를 향해 나아가며 화면과 점점 멀어진다([캡처 3]). 영웅은 문명을 떠나 프런티어를 찾아 나서야 하고 문명과 야만의 기본 갈등은 ‘문’이라는 경계선을 두고 작동한다. 타란티노의 전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쇼산나는 한스 란다 대령이 지휘하는 나치 일당의 기관총 세례를 벗어나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 카메라는 집 내부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화면과 멀어지는 쇼산나를 바라본다([캡처 4]). 분명히 이 쇼트는 즉각 <수색자>의 엔딩 쇼트를 떠오르게 만들지만 정작 타란티노는 이러한 연상 작용을 불쾌하게 여겼다. 타란티노는 2009년 영국의 영화전문지 「사이트 & 사운드(Sight & Sound)」와의 인터뷰에서 쇼산나가 도망치는 장면을 보고 <수색자>가 떠올랐다는 진행자의 질문에 ‘거북하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존 포드의 어머니가 존 포드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촬영했을 거라며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영화를 보면서 다른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진행자의 가벼운 넋두리에도 불구하고(더군다나 타란티노는 수많은 영화에서 레퍼런스를 인용하는 영화광이기 때문에) 타란티노는 유독 자신이 다른 감독들보다 그러한 얘기를 더 많이 듣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캡처 5] <헤이트풀8>에서 인물들은 잡화점 안팎을 오고 갈 때마다 문을 부술 듯이 걷어찬 다음에 망치질해야만 한다.
[캡처 6] <헤이트풀8>에서 오비와 크리스 매닉스는 거센 눈보라로 인해 제대로 서있기 조차 힘들다.

 <헤이트풀8>은 이러한 불쾌함에 대한 타란티노의 영화적 대답이다. <헤이트풀8>에서 현상금 사냥꾼 존 루스와 그와 동행하는 수배자 데이지 도머그는 ‘레드 락’으로 이동하던 도중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 마커스 워렌 소령과 예비 레드락 보안관 크리스 매닉스를 만나게 되고 이들은 거센 눈보라를 피해 ‘미니의 잡화점’에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출입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이 고장 났다는 주변 사람들의 시끄러운 외침 속에 이들은 문을 발로 세게 걷어차 겨우 열고는 추위를 녹일 겨를도 없이 문을 고정하기 위해서 나무를 대고 못을 박기에 바쁘다. 등장인물들은 잡화점 안팎을 오고 갈 때마다 문을 부술 듯이 걷어찬 다음에 망치질해야만 한다([캡처 5]). 나는 이 우스꽝스러운 행위가 단지 타란티노 특유의 수다스러운 유머 코드로만 보이지 않는다. 춥다며 문을 닫으라는 시끄러운 외침과 더불어 인물들이 문에 행하는 거센 망치질은(그것도 여러 번 반복된다) 마치 타란티노가 ‘나를 존 포드와 비교하지 말라!’며 관객에게 행하는, 소리 없지만 굉장히 격렬한 몸짓으로 느껴진다. ‘문’이라는 경계를 부수는 이 정치적 제스처는 단순히 <수색자> 엔딩 쇼트와의 외적 유사성을 뛰어 넘어 겨울이라는 계절을 배경으로 삼아 이분법적 신화론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타란티노의 영화적 배경은 공동체가 개척해야 하는 황야의 프런티어 이미지가 아니라 항상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공간으로 제시된다(<장고:분노의 추적자>의 텍사스 역시 겨울이 배경이고 주인공 일행은 추운 겨울이 끝나고 나서야 남부의 미시시피로 이동하여 복수를 수행한다). 존 루스의 마차를 끌던 마부 오비와 크리스 매닉스는 뒷간과 잡화점 현관을 이을 밧줄을 설치하기 위해 뒷간으로 향하는데 하얀 설원 위에는 조그마한 뒷간만 덩그러니 서 있다. 이들은 말뚝을 박기 위해 애써보지만 거센 눈보라로 인해 제대로 서있기 조차 힘들다([캡처 6]). 은은하게 들리던 배경음악은 점점 커지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다. 타란티노는 이야기의 전개에 불필요한 이 장면을 무려 1분이나 보여주며 이들의 위태로움을 부각한다. 이후에도 오비는 총을 버리기 위해 뒷간으로 갔다가 얼어 죽을 뻔하고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며 몸서리를 친다. <헤이트풀8>의 서부 사나이들은 황야라는 프런티어에 당당히 서 있기는커녕 화장실조차 제대로 갈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리고는 아무도 오지 않는 오두막 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문과 모뉴먼트 밸리를 체계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은 타란티노의 가장 우습고도 아주 진지한 개그이다.



[캡처 7] <헤이트풀8>에서 모브레이는  벽난로 쪽이 조지아,  바(Bar) 쪽이 필라델피아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림 1] 남북 전쟁의 주요격전지는 동부에 몰려있다.

초(超)스피드로 미국 근대사 재현하기

 <헤이트풀8>은 울트라 파나비전 70(Ultra Panavision 70)으로 촬영되었다. <벤허>, <서부 개척사>, <발지 대전투>, <최고의 이야기>, <카슘 공방전> 등에 사용된 2.76:1의 와이드 비율을 자랑하는 이 70mm 렌즈는 더 많은 피사체를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을 통해 광활한 대지와 그 곳에 모인 엄청난 군중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화려한 전투의 스펙터클을 강조하는데 제격이다. 그러나 <헤이트풀8>에서 촬영된 외부의 풍경이라고는 영화 초반 등장하는 와이오밍의 하얀 설원이 전부다. 오히려 타란티노는 그 설원을 가로지르는 마차의 내부로 들어가 소란스러운 수다의 풍경을 보여주기에 바쁘다. 그리고는 미니의 잡화점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스펙터클의 절정을 담을 수 있는 렌즈를 가져다가 영화의 대부분을 내부에서 촬영하고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조차 내부에서 촬영되었다는 점에서 타란티노는 의도적으로 광활한 프런티어의 스펙터클을 제거하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프런티어 신화를 해체하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대체해야 할 무언가를 다시금 외부에서 찾지 않았다는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는 무척이나 과감하게도 잡화점 전체를 미국이라는 거대한 풍경으로 치환시켜 버린다. 모브레이는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이었던 워렌 소령과 남군이었던 스미더스 장교의 다툼을 막기 위해 잡화점을 반으로 나누어 스미더스 장교가 앉아있는 벽난로 쪽이 조지아를 대표하고 존 루스가 있는 바(Bar) 쪽이 필라델피아를 대표한다고 말한다(그리고 이 장면은 70mm의 렌즈를 통해 좌우로 극단적으로 나뉘어 강조된다-[캡처 7]). 조지아는 미국 남동쪽, 필라델피아는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의 미국을 절반으로 갈라 동과 서로 나누었을 때 남북 전쟁은 제대로 개척되지 않은 서부지역을 제외하고 사실상 동부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그림 1]). 남북전쟁 때 북군이었던 워렌은 스미더스의 아들을 자신이 죽였다며 남군이었던 스미더스에게 시비를 건다. 말싸움 끝에 워렌은 바에 서서 벽난로에 앉아있는 스미더스에게 총을 발사하는데 이는 북군이 남군을 이기는 남북 전쟁의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축약이나 다름없다. 조그마한 남북 전쟁이 끝난 이후 존 루스와 오비가 커피를 마시고 독살당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그 과정에서 오스왈도 모브레이, 조 게이지 그리고 밥이 모두 도밍그레 일당이었음이 드러나고 영화는 이들이 도머그와 한패이고 거짓말로 일관했음을 알린다. 타란티노는 무려 한 챕터를 소비하여 조디 도밍그레가 남매지간의 데이지 도머그를 존 루스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잡화점의 직원들을 살해하고 잡화점 바닥의 비밀공간에 숨는 과정을 친절하게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도밍그레 일당이 무법자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미니의 잡화점에 방문하기 이전부터 흑인/백인, 북군/남군으로 정치적 대립을 해오던 워렌과 매닉스는 ‘갑작스러운’ 적의 침입에 ‘갑작스럽게’ 한패가 되는데 왜냐하면 이는 실제로 미국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캡처 8] <헤이트풀8>에서 밥의 얼굴은 총알이 아닌 폭탄을 맞은 것처럼 폭파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미국은 남북 전쟁 이전에 멕시코 전쟁을 일으켰다. 멕시코는 전쟁에 패배하여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등 영토의 반 이상을 미국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전쟁 이후 캘리포니아에서는 황금이 채굴되어 골드러시가 시작되었고, 텍사스에서는 석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국과 멕시코는 당연히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워렌은 커피에 독을 탄 범인을 찾기 위해 총을 겨누고 멕시코인 밥을 심문한다. 미니는 과거에 ‘개와 멕시코인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을 걸었을 정도로 멕시코인을 싫어했었는데 그녀가 밥에게 잡화점을 맡겼을 리가 없다며 워렌은 밥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밥의 가슴에 총알 두 발을 쏜 워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미 시체가 된 밥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총알 두 발을 쏘는데 이때 밥의 얼굴은 총알이 아닌 폭탄을 맞은 것처럼 폭파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캡처 8]). <헤이트풀8>에 등장하는 수많은 죽음 중 가장 비과학적으로 과장된 죽음의 대상이 멕시코인이라는 점은 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크게 승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존 루스와 오비가 사망한 이후 남아있는 인물들은 동부를 대표하는 바와 벽난로에 있지 않고 반대편으로 넘어와 서부에서 사건을 이어나가는데  사법권을 가진 현상금 사냥꾼 워렌과 보안관 매닉스가 현상금이 걸려 있는 무법자들을 서부에서 처단한다는 점에서 이는 남북 전쟁이 끝난 이후 서부 사나이가 무법자를 만나는 서부개척시대의 축소판이다. 미국은 흑인과 백인이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기도 전에 공동의 적 멕시코로 인해 한패가 되고 사법권 신화에 방해가 되는 무법자들을 처단하면서 한패가 된다. 그리고 150년이 지나 불법 체류자 추방과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을 핵심 공약으로 정한 트럼프가 당선된다. ‘나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오래된 격언은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타란티노는 무한할 것 같았던 프런티어를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개척하면서 흑백 갈등이 제대로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공동의 적을 만나 억지로 봉합된 미국의 균열을 고스란히 답습하기 위해 초(超)스피드로 근대사를 재현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신화는 철저히 타락한다.


[캡처 9] <헤이트풀8>에서 인물의 위치는 변함이 없으나 초점이 변한 이후 인물간의 경계는 안개처럼 뿌옇다.

 도밍그레의 죽음 이후 카메라는 피를 흘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워렌과 다리에 총상을 입고 그의 옆에 앉아있는 매닉스를 비춘다. 도머그가 매닉스에게 거래를 제안하자 매닉스는 앉고 있던 의자를 침대 앞쪽으로 끌고 가 앉는다. 도머그는 워렌을 죽이면 현상금을 차지할 수 있다며 매닉스를 유혹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매닉스를 화면 전경, 워렌을 화면 후경에 제시한다. 화면은 매닉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워렌은 초점이 나가 흐릿한 형체로 보인다. 워렌은 도머그의 도발을 참을 수 없어 총을 난사하고 잡화점에는 워렌, 매닉스, 도머그만이 살아남는다. 총알이 다 떨어진 워렌은 매닉스에게 자신의 총을 달라고 하지만 매닉스는 무시한 채 도머그와의 협상에 귀를 기울인다. 매닉스는 ‘내가 워렌만 죽이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냐’고 도머그에게 묻는데 이때의 화면은 이전과 다르다. 카메라는 역시나 매닉스를 전경, 워렌을 후경에 비추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매닉스와 워렌 모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들의 경계는 안개처럼 뿌옇다([캡처 9]). 이러한 촬영 방식은 심도 분리 디옵터(split field diopter)라는 특수렌즈를 통해 가능한데 이를 렌즈 앞에 장착하면 z축 상의 서로 다른 거리에 있는 두 개의 피사체가 동시에 초점이 맞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의 한쪽 측면에 있는 매우 근접한 전경과 다른 끝점에 있는 후경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두 영역 사이에 있는 대상은 초점이 맞지 않게 되는 약점을 지닌다. 그래서 두 렌즈가 만나는 지점은 뿌옇게 보인다. 타란티노는 1970~80년대에 브라이언 드 팔마가 자주 활용했던 촬영기법을 갑자기 가지고 오더니 절정의 순간에 집어넣는다. 감독 대다수가 뿌연 지점을 화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게 하여 약점을 감춘다면 타란티노는 굳이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사실 심도 분리 디옵터를 활용한 장면은 영화 중반부터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그 장면들을 약점을 감추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찍었다). 영화 내내 커다란 70mm 렌즈를 통해 잡화점의 인물들을 좌우 x축으로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이들의 거리감을 강조하던 타란티노는 왜 갑자기 인물들을 z축이라는 다른 방향으로 뿌옇게 제시하는가.


[캡처 10] <헤이트풀8>에서 워렌과 매닉스는 또렷하게 보이지만 이들의 간격은 뿌옇다.

 이 장면 이후 매닉스는 자신이 독이 든 커피를 마실 때 도머그가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워렌을 배신하지 않는다. 매닉스가 피를 많이 흘려 순간적으로 기절한 틈을 타 도머그는 반격을 시도해보지만, 그 사이 매닉스가 다시 일어나 도머그에게 심각한 총상을 입힌다. 매닉스가 힘겹게 일어나는 순간에도 타란티노는 심도 분리 디옵터를 통해 매닉스를 전경, 도머그가 총에 맞았음을 기뻐하는 워렌을 후경에 배치한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둘은 초점이 맞아 또렷하게 보이지만 이들의 간격은 초점이 흐려 뿌옇다([캡처 10]). 드 팔마는 스릴러 장르 특유의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해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행위를 동시에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흐릿한 간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오히려 그 간격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타란티노의 영화적 선택은 흑인과 백인이 무법자라는 공동의 적으로 인해 연합하지만 그 연대가 얼마나 안개처럼 희미한 봉합인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워렌과 매닉스는 같은 화면에 나란히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인종 갈등이라는 벽이 있다. 미국은 독립전쟁, 1812년 전쟁을 통해 영국을 물리치고 멕시코 전쟁, 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스페인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 참여해 대부분 승리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 체제에서도 승리했고 아프가니스탄과는 아직도 전쟁이 진행중이며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지 않는 북한과 끊임없이 대치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사실상 몰락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선두에 있던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의 갈등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매닉스가 현상금으로 인해 무법자와 친구가 될 뻔했듯 미국 사회 내부의 엉성한 연대는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어 분열될 수 있는 위기를 항상 내포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워렌과 매닉스는 잡화점 천장에 도머그의 목을 매단다. 그들은 도머그를 교수형시킴으로써 사법권을 통해 무법자를 처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법권의 신화는 이미 피로 얼룩졌다. 영화 초반부터 워렌은 링컨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당연히 백인들의 호기심을 샀었다. 그러나 편지는 가짜였고 매닉스는 그 편지로 손에 묻은 피를 닦고 던져버린다. 영화 내내 인물들의 주위를 맴돌던, 흑인 노예제 폐지를 위해 남북 전쟁을 일으켰던 링컨이라는 유령은 결국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고 만다. 워렌과 매닉스는 아무도 오지 않을 빈 오두막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의 미래는 곧 미국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타란티노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쉬쉬하던 미국 사회의 불안 요소들을 마구 끄집어내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뒤섞는다. 이전의 서부극들이 미국의 역사를 대표하는 프런티어의 스펙터클을 강조했다면 타란티노의 서부극은 기존 서부극의 모든 신화적 풍경들을 전부 다 해체하고 미국 내부의 문제를 파고든다. 그의 서부극에서 미국을 위한 신화는 존재할 수 없다.



위대한 적이 없었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역사적으로 한 국가의 대형 위기가 약 80년~100년 주기로 일어나는데 미국은 혁명, 남북 전쟁,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새로운 대형 위기가 닥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위기란 미국과 중국이 향후 10년 이내에 남중국해에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배넌은 샬러츠빌 사태 이후 트럼프를 떠났고 그의 예언을 극단론자의 헛소리로 간단히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의 대상이 중국 대신 북한으로 변경되었을 뿐 배넌의 예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끊임없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을 두고 트럼프는 김정은을 ‘로켓맨’, ‘완전 파괴’, ‘독재자’, ‘병든 강아지’로 비유하며 국가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보기 힘든 언사를 퍼붓고 있다. 이러한 트럼프의 거칠고도 무모한 발언은 그가 북한과 전쟁이 일어나도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배넌의 예언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안달 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임을 끊임없이 과시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도널드 트럼프의 슬로건이다. 샬러츠빌에 있던 극우주의자들은 이 슬로건이 쓰여 있는 빨간 모자를 쓰고 다녔다. 트럼프가 ‘아메리카 드림’으로 대표되던 찬란한 미국이 다시 한 번 가능하다고 외친다면 타란티노는 미국이라는 거대 공동체를 신화화하는데 공헌한 서부극을 갈기갈기 찢고 해체함으로써 미국이 다시(again)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을 만한 위대한(great) 적이 애초부터 있었는지 묻는다. 타란티노의 물음은 당연히 대통령이 바뀌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미국은 그릇된 신화와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치부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타란티노는 미국이 자성의 태도를 갖게 될 때까지, 앞으로도 누가 당선되든 간에 계속 미국 사회 정의의 본질을 물을 것이다. 그것이 위대한 존 포드를 거스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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