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찾아보는 인싸되는 법
2017년 말, 잠시 머문 회사가 있었다. 해외에 론칭할 사이트를 번역하는 업무를 맡아 2주간 출퇴근을 했다. 협력이나 회의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직원들 속에서도 대화 한마디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싫지 않았다.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동으로 관찰자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참 재미있었다. 작은 6층 건물의 모두가 서로의 안면을 알고 인사를 하는 화기애애한 회사였고, 서로 짓궂은 장난까지 수용할 정도의 친밀한 부서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평화 속에도 분명 모든 게 있었다. 겉도는 사람, 참는 사람, 맞서는 사람,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이들의 친절한 폭력까지도.
하루는 점심 식사 후 커피 내기 사다리 타기를 했다. 아르바이트인 나를 제외한 직원들이 참여했다. 부장님에서 과장님, 대리님, 이제 갓 인턴을 벗어난 사원까지. 각자 원하는 사다리 번호를 물어보는데, 대리님 한 분이 참여를 거부하셨다. 그러자 주위의 반응은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무작정 번호를 주는 사람도 있었고, 00이도 (신입사원) 한다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대리님은 꿋꿋이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게임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다행히 그 대리님은 “벌칙”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이 굉장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리님은 커피가 마시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타인의 찻값을 내줄 형편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커피를 사기 싫었을 수도, 아니면 그저 게임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라도 비난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리님은 공동체의 룰에 따르지 않아서, 그리고 보편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아까워하는 것처럼 보여서가 아니었다.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분위기를 흐려서"였다. 실제로 대리님의 게임 참여 거부 의사에 하급 사원들은 상급자의 눈치를 보았고, 침묵이 이어졌으며, 무안해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흐린 것이 정말 사다리를 타기 싫어한 대리님이었을까? 아니면 "모두의 평화"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 사람들이었을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는 인생에서 허무함을 느끼다가 어느 날 우발적 살인을 하게 된다. 법정에서는 살인 사건의 인과관계보다 관습에서 벗어난 뫼르소의 언행을 잣대로 그를 평가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왜 울지 않았지? 장례식 다음 날에 여자친구와 어떤 데이트를 했지? 범행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범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가 그저 "이방인"이기에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서도 안 된다.
내가 일했던 그 회사의 대리님은 왜 내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에 대한 발언권은 일체 받지 못했다. 사소한 게임을 둘러싼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인상 깊었다. 그녀는 그 순간 이방인이었다.
뫼르소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지도, 이해시키려고도 하지 않은 채 솔직함을 유지한다. 부조리한 세상의 게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의 선택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방인을 보는 우리의 태도가 책 속의 인물들과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리님의 이야기는 한 예일뿐이다. '새 해인데 왜 연락이 없어?' '나이가 몇인데 아직 저러고 있어?' '뭘 그런 거에 예민하게 받아쳐?' '회식을 빠진다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는 그 흔한 말이 마음 깊이 새겨지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보다.
<<우리는 왜 억울한가>>에서 저자는 말한다. "재판에서 역시 견해의 대립, 입장의 차이, 행동방식의 차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가혹한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남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근거, 구별되는 행동을 하게 된 이유, 그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환경 등이 소상하고 공정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재판"이 법정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고 있는 것보다 자주 타인을 판결대에 세운다. 하지만 나는 한 개인을 판단하는 데 조금 더 조심스러워져야 함을 느낀다. 나의 편견과 무지, 그리고 고집만으로 타인을 난도질할 준비를 하고 있던 건 아닌지. 누군가에겐 사소하지 않았을 선택을 내가 가볍게 보고 있던 건 아닌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동시에 다르다. 누군가의 삶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개개인의 심판은 오만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