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design travel 제주 편 리뷰
(오랜만의 북 리뷰)
- d design travel이 얘기하는 애기구덕에 대하여
제주도를 몇 번이나 방문해 보았을까. 언젠가부터 세어보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꽤 많이도 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여행지라는 이름을 가진 곳 중 가장 많이 방문한 지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제주를 갈 때마다 한 번씩 꼭 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해녀들 있잖아, 뭔가 멋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처음엔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본인의 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만이 풍겨낼 수 있는 기운이 보였다. 육아를 직접 하다 보니 내공이 고스란히 체감된다. 그들은 위인이었다. 제주도에 흔한 해녀 벽화를 잘 살펴보자. 높은 확률로 아이들도 그려져 있다. 끈 달린 바구니 안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도 보이곤 한다. 보통 현무암 해변에 엄마와 같이 나와있다. 워킹맘 해녀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한 셈이다. 일터에서는 돌아가며 공동육아도 한다. 이거 아무나 못한다. 보통의 연대를 가지고는 힘들다. 불가능에 가까운 대단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과거에 제주 여성들은 아기를 낳아도 제대로 몸조리할 틈도 없이 바로 일에 복귀해야 했다. 그때 유용하게 사용한 것이 ‘애기구덕’이다.” (『d design travel 제주 편』, p98)
애기구덕. 이 책 덕분에 이름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제주에만 있다. 아기를 눕혀놓는 침대이자 일할 때는 발로 흔들 수 있는 요람이기도 하며, 이동할 때는 끈으로 묶어 짊어질 수도 있다. 바구니형 카시트의 시초다. 아이가 크면 수납 바구니로 쓰인다고 한다. d가 말하는 롱라이프 디자인이다.
제주에서 유명한 돔베고기 역시 토속말로 ‘도마에 올려진 고기’를 뜻한다. 일과 육아, 그리고 살림까지 병행하는 바쁜 제주 여성의 생활상이 담긴 향토음식이라고 같은 책에서는 설명했다. 해녀들이 멋져 보였던 건 이유가 있었다. 제주는 여성들의 라이프를 빼고선 설명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매거진 d design travel을 처음 보게 된 건, 오키나와 편(일본어판). 여행에 참고하려고 샀었다. 번역하며 읽을 시간까지는 없었다. 아쉽게도 마크된 장소정도만 체크했다. 한국어 번역본인 가나가와편도 사서 보았지만, '깐깐한 기준을 가진 팀이 취재한 일본의 어떤 지역이 가진 흥미로운 포인트' 정도로 감상이 그쳤다. 내가 일본인이었으면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 이 점은 일본인이 읽을 한국(제주) 편의 피드백이 궁금해지는 포인트다
그렇기에 큰 기대 없이 제주 편을 읽었는데, 이건모김건모 화들짝 놀랄 정도로 재밌는 것이 아닌가.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꼈다. 급기야 나는 아내찬스를 통해 주말 육아휴가를 얻어 북토크까지 다녀오는 모험을 강행했다.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이 몹시 궁금해서 안 가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d design travel 제주 편』에서 추천해 준 장소나 아이템들은 처음 들어본 것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것)들은 지역의 본(本)을 대변하는 상징이자 스피커로써 의미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핵심은 ‘제주다움’이었다. 편집부는 제주다운 장소와 사람(혹은 정신)을 신중하게 선정하고 객관적인 감사함을 담아 취재했다. 글에서 묻어났다. 선발했다기보다는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게들이 오래 지속되어 제주가 더 제주다워지길 바라는 염원도 딱 담백할 정도로 뿌려져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디자인은 분명 넓은 의미의 디자인, 그러니까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해결하고 싶은 솔루션이었다. d는 특히 롱 라이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나는 다음 제주도 여행에 쓰고 갈 색안경을 얻었다. 자주 가보았던 제주가 달리 보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때도 그렇고 보니 그럴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힘이 있다.
북토크에서 만난 편집장 신도 히데토 님, 그리고 한국인으로 참여한 이지나 님, 그리고 참여한 모든 스태프분들의 기운과 기세도 인상 깊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정적이고 순수한 광기(표현이 짧아 이 단어 밖에 고르지 못해 죄송하지만, 좋은 뜻입니다)를 오랜만에 봐서 개인적으로 벅찼다. 보기 좋았다. 물론 당연히 힘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꼼꼼하게 해낸 자들의 자부심이 보였다(해녀같다!).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이 마치 뿌듯함에 벅찬 마음을 다스리는 듯해 보였다. 왠지 나도 감격스러웠다. 집에 돌아와 취재기간 발행한 걸로 보이는 뉴스레터도 다시 찾아보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기 읽으며 부러운 기분도 들곤 했다. 문자 그대로 재밌어 보였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만드는 일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신도 히데토 편집장, 여행지 편집장으로서의 삶을 묻는 질문에)"
d design travel을 비롯하여 로컬을 조망하시는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이야말로 정말 대체불가능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뭣도 모르는 내가 한 이야기도 아니다. 골목길 경제학자 연세대 모종린 교수님은 '로컬은 복제할 수 없는 유일성을 가진 콘텐츠와 브랜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자. 지역이 대체불가능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유일무이하다는 뜻이고, 없어지면 안 된다 말이기도 하다.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봐야만 한다. 이 매거진 역시 그런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추천한다. 적어도 겉핥기식은 절대 아니다. 생각보다 진지한 매거진이다. 신념, 연구, 염원 같은 단어까지 떠오르기도 하는 책이다.
롱 라이프에 대한 메시지는 어쩌면 역설적이다. 영생은 없다. 필멸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향한 응원인 셈이다. 그래서 절절히 와닿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편집부의 슬라이드를 언급하며 마무리.
'관광'은 중국 주(周) 나라 시대의 역경(易經)에 ‘관국지광 이용빈우왕(觀國之光 利用賓于王)’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한다. 빛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이나 장소를 찾아가 살피고 배우는 것을 뜻한다. 세밀하게 살피고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곳에서 본 빛이 나에게 온전히 스며들게 하려면 눈을 똑바로 떠야 한다. 때때로 d design travel과 같은 색안경의 힘을 빌려도 좋다.
[추가적인 이야기]
1. 교토편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었지만 가본 곳이라 구매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제주 편을 보고 나니 당장 교토편도 봐야겠더라.
2. 어디서 살 거냐면 언리미티드 에디션 서울 아트북페어! d도 부스를 차린다고 한다. 특별배포물도 있다고 하니 이런 거 모으기 좋아하는 나로선 명분 풀충전. 여담인데 여기 웹사이트 간결하고 멋지다.
3. 운좋게 『d design travel 서울 편』의 워크숍에도 참여하게 되어 좋은 생각들을 많이 만났다. 다녀온 지 한 달이 다되어가는데 “서울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다. 요새 만나는 사람에게 빠짐없이 서울서울 거리며 물어보고 있는데 다들 어려워한다. 어렵다는 재밌다의 동의어다. 이다음으로는 도쿄 편이 번역된다고 한다. 비슷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하다. 기다릴 수 있을까. 나의 부족한 인내심이 일본어 공부에 박차를 가할 명분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