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악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싫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누군가가 꿰뚫어 보는 기분, 그래서 꿰뚫리는 기분. 시선은 대체로 미끄럽고 판단은 여지없이 딱딱하다.
딱 한 명, 내가 이 사람에게 파악당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기분 나쁘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그 아이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거나, 내가 하려고 했던 행동을 말하며 “이렇게 하려고 했죠?”라거나,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을 짐작하며 “이렇게 생각해서 그렇구나.”라며 내 행동과 생각을 자신이 파악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 말들이 종종 반복되면서, 사소한 위화감 같은 걸 느낄 때도 있었다. 간파당하는 기분이란 마치 게임 세상에 떨어진 내가 NPC를 조우하는 기분과 비슷하다. 그곳의 누구도 나를 조종하고 있지 않지만, 어째선지 그들의 방향대로 흘러가게 되는, 그런 묘한 기분.
그럼에도 나는 그 애가 싫지 않았다. 그 애를 딱히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애는, 나를 깎아내리고 자기가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나를 파악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 게임 속 NPC처럼 내가 뭔가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 어느 때에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것 같았다.
걘 나를 알고 싶어서 나를 파악한 것이다.
사람이 무언가에 기분 나쁨을 느낀다면 대개 그것은 본인의 결핍이나 약점과 관련이 있다. 내가 판단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나라는 사람이 ‘나’의 관찰을 토대로 상대를 쉬이 판단해 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에게 그걸 당하기 싫은 거다. 생각해 보면 그간 얼마나 편협했는가.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린 판단들 중에 상대를 위하여 내린 판단은 거의 없다. 모조리 나를 위한 판단이었다. 저 사람이 나와 맞는 사람일지 또는 그렇지 않을지, 저 사람이 내게 이로울지 또는 그렇지 않을지, 같은 판단. ‘저 사람’이 그 자체로 궁금해서 파악해 보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 애는 내가 불쾌하거나 쾌한 지점을 알아맞히려 했다. 불쾌해 보이면 쾌하도록 한마디를 거들고, 쾌하면 더 쾌하도록 한 마디를 얹었다. 상대의 좋은 점을 골라내어 칭찬하고, 상대가 거슬려 하는 지점을 같이 치워주려고 노력했다. 걘 그랬다.
위화감이라는 게 어떻게 괜찮을 수 있었을까. 그건 내가 느낀 그 위화감이라는 게 다른 종류의 위화감이었기 때문이다. 그 애가 나를 관찰하는 시선은 끈적하거나 미끄럽지 않았다. 산뜻했다. 그 시선에는 산뜻한 애정이 있었다. 내가 많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나를 위한 감각에 기반한 관찰. 내가 상대에게 그다지 나눠주지 않았던 ‘상대를 위한’ 감각에 기반한 관찰.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은 묘하게 이질적인 감각을 낳지만, 거기에 애정이 있을 때 그것은 다만 관심이 된다.
내 눈에도 그런 애정 필터 하나쯤 끼우고 살았으면. 섣불리 누가 어떻다고 종언해 버리기보다, 누구는 이래서 그러는가보다 하고 이해하는 필터. 그래서 가끔은 내가 NPC가 되어주는 필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