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구하는 다정

by 은진송


인간관계에 한해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을 챙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여기서 ‘챙기는’에는 꽤 다양한 형태가 있다. 누군가는 선물을 잘 챙길 수도 있고, 연락과 같은 안부를 잘 챙길 수도 있고, 삶의 때마다 발생하는 이벤트를 챙길 수도, 관심사나 취향 같은 것을 챙길 수도 있다. 생일 선물 따위를 챙기고, 뭐하냐고 가끔 묻고, 졸업은 했느냐 저번에 말했던 회사는 어떻게 됐느냐 같은 사건들을 묻고, 너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았냐면서 각종 정보 따위를 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건 열 번에 한 번 정도고, 그마저도 약속 정하기처럼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하는 사람이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연락하지 않는 나의 유구한 역사는 중학생 때부터 있어 왔다. 다만 내가 나와 알게 된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관심이 너무 많아서 그 관심을 억제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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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이 진행하는 유튜브, 적수다에서 다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코미디언 원소윤은 다정에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발산하는 다정과 수렴하는 다정. 발산하는 다정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는 티를 내는 다정이라면 수렴하는 다정은 모르는 척하고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다정이 있을 거라고. 그에 따르면 그런 종류의 다정은 '함구하는 다정'이라 할 수 있단다.


상냥함이나 다정함 같은 따뜻한 성질의 성격을 가졌다는 평을 듣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약점으로 분류되곤 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부담 없이 연락을 취해오는 사람들의 성격을 부러워했다. 약속을 잡는 일을 버거워하기보다 즐거워하며, 웃는 얼굴로 저번에 그건 어떻게 됐냐고 묻는 사람들이 가진 따뜻함의 소양을 닮고 싶었다. 매사에 냉소적이고, 주변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늘 당신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굳이 어깨를 두드리지 않아도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쳐주길 원했다.


나는 내가 두드리는 어깨가 너무 아프게 느껴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다. 대답하기를 원치 않았는데, 내가 불러서 억지로 대답하는 것일까 봐 걱정한다. 춥지 않은데, 억지로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는 것일까 봐, 덥지 않은데 귀찮게 부채질을 해주는 것일까 봐 생각이 많다.



어릴 때부터 슬쩍 본 것만으로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얻는 기술이 있었다. 그런 것들은 때론 나를 괴롭게 했다. 내가 보는 것을 타인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은체하면 뭘 좀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건방진 사람이 되기 일쑤였고,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 당사자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본 것을 보지 못한 체했다.


하지만 진짜 모르는 것과 알지만 모르는 것으로 두는 사람은 태도에서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대학 합격 여부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과 이미 수시로 대학을 붙은 사람이 수능장에서 보이는 태도는 다르다. 수시로 대학을 붙고 수능을 보는 사람은 응당 더 여유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시점에서, 알지만 모르는 내 태도는 모종의 여유로움으로 환원되었던 것 같다. 이 여유로움에 끌린 사람들이 종종 내게 찾아와 그들의 무언가를 ‘아는’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내게 했다. 나는 그들의 비밀을 많이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타인에게 이것저것 아는 척을 하고 다니지 않으니까. 연락도 먼저 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며 상냥하게 챙기지도 않으니까.



모르는 척하고 기다리는 다정. 비겁한 뒷걸음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다정이 되어 돌아왔다. 굳이 말 걸지 않고, 굳이 불러내지 않고, 굳이 물어보지 않는 것도 다정이 될 수 있었다. 찾아와서 울면 눈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주고, 찾아와서 속상한 일을 토해내면 그칠 때까지 들어주는 것도 다정이 될 수 있었다. 힘내라거나 할 수 있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 것도,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냐고 캐묻지 않는 것도, 다 다정이 될 수 있었다.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202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