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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회의실

원 미팅 애프터 어나더

by 청년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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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업무 중 ‘회의 15분 전’ 알람이 뜬다. 일정표엔 “2시 30분 프로세스 개선 N차 회의.” N이 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많다는 뜻이다. 몇 번이나 진행됐지만 성과는 1그램도 없다. 회의마다 법카로 먹은 간식으로 쪄오른 살만 1000그램쯤. 그게 이 프로젝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결과물이다.


어째 회사는 프로세스 개선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대부분의 문제는 프로세스보다 사람에서 생기는데. 프로세스가 입이 있다면 억울하다고 할 거다. “마피아는 너희들이잖아”라면서.


간절히 바란다. 회의 취소 알림이 뜨기를. ‘회의 취소되었습니다.’ 이 한 줄이면 오늘 2시간을 구원받는다. 하지만 모임 10분 전이 되어도, 8분 전이 되어도,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아아, 오늘도 여지없이 진행되는구나.


노트북과 펜과 수첩을 들고 회의실로 향한다. 다들 표정은 비슷하다. 누구 하나 용기 내서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이 무의미함을 모르지는 않다. 다들 똑똑하고 멀쩡히 면접 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저 이 사람들도 수 년째 반복돼 오는 허공을 향한 "혁신 혁신"에 지쳐버린 거겠지.


팀장 한 명, 과장 두 명, 선임인 나. 총 네 명. 나는 노트북을 켜놓고 ‘회의록’ 문서를 연다. 이건 막내 몫이다.


“그 부분은 저희가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의견인데요, 방향만 조금 수정하면 될 듯합니다.”
“그럼 일단 공유해 놓는 걸로 하시죠.”와 같은 뻔한 말이 오고 간다.


단 한 문장도 결정되지 않은 채 회의록만 길어진다. 커서는 쉬지 않고 깜빡인다. 무슨 컴퓨터가 보내는 모스부호 같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목적을 잃은 지 오래다. 회사는 매년 한 번씩 ‘업무 혁신’을 외치며 직원을 굴린다. 처음엔 PI라고 해서 뭐 대단한 줄 알았다. ‘Process Innovation’. 그냥 그거였다. 줄임말은 멋있는데, 내용은 별거 없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처럼.


회의는 그렇게 흘러간다. 말보다 눈치가 더 많은 자리. 침묵보다 의미 없는 말이 더 많이 기록된다. “그러면 여기까지 하고 이 부분은 다음 회의 때 다시 보죠.” 팀장이 말한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저렇게 뻔뻔하게 이 의미 없는 짓을 계속하려는 걸 보니.. 어쩌면 그저 잘 따르고 순응하는 게 팀장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한다. 살짝 그가 가여워지기 까지도 하고.


과장 한 명이 캘린더를 열어서 다음 미팅 날짜를 정한다. 아직 최종 발표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노트북을 덮는다. 회의실의 공기가 조금 가벼워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모두가 뭔가 해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문 밖으로 나가며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쉰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 하나.


다들 이렇게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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