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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현 Aug 06. 2019

조선에도 스웩(Swag)이 있었을까?

수많은 '조선 쳐돌이'를 양산해 낸 창작 뮤지컬 수작!

요즘 우리나라는 스웩(Swag)의 시대인 것 같다. '힙'한 감성과 '저 세상 텐션'에 열광하고, 오죽하면 핫플레이스인 을지로까지 '힙지로'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은어의 변화가 하도 빠르다 보니 새로운 표현들도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끝물이기는 하지만 아직 20대인데, 회사를 다녀서 그런지 점점 사고가 고착화되는 것을 느낀다. 언어의 범주도 점점 좁아진다. 슬프다.


그렇다고 이 스웩을 따라잡기 위해 힙한 페스티벌들을 가보자니, 덜컥 겁이 난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친구들과 후배들이 신나게 페스티벌을 '플스(flex)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한 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그것이 내 은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든다. 내게 그런 에너지 폭발은 일 년에 한두 번이면 족하다. 나는 그저 〈록키호러쇼〉나 〈헤드윅〉 막공에서 뛰고 노래하고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 


잘 모르시겠지만, 뮤지컬 페스티벌도 꽤 흥나요! (ⓒ파라다이스시티 페이스북)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페스티벌은 내가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이다. 적절한 흥, 안온한 잔디밭, 내가 사랑하는 뮤지컬 넘버들과 배우들, 그리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광란의 밤까지. 하지만, 아쉽게도 올해는 야외 뮤지컬 페스티벌이 없다. 세상에.


이 사실은 나에게 하반기를 살아갈 이유 하나를 상실케 한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하반기를 살아갈 하나의 이유를 만들어 준 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오늘 이야기할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다. 사실 뮤지컬 페스티벌을 하지 못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이 작품 때문이다. 해마다 뮤지컬 페스티벌을 기획해 온 PL엔터테인먼트 송혜선 대표의 인터뷰를 인용한다.


1회 페스티벌이던 자라섬 때는 무대 뒤가 정말 행복했어요.
(…) 하지만 올해는 못 해요.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을 해야 하거든요!

                                                                                                     - 위드인뉴스, 송혜선 대표 인터뷰 中


뮤지컬 페스티벌을 제쳐두고 올릴 만큼 중요한 이 작품은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까?




들어는 봤나? 조선 스웩!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포스터 (ⓒPL엔터테인먼트)


필자가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을 처음 만난 건, 다름 아닌 작년 스타라이트 뮤지컬 페스티벌(SMF)에서였다. SMF를 PL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하였으므로, PL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작품을 공연 전에 뮤지컬 팬들에게 먼저 선보이는 자리였던 것 같다. 처음 라인업에 들어 있는 공연의 제목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솔직히 이랬다. 와, 진짜, 정말, 너무 구리다.


안 봐도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도 내가 이 바닥에서 공연을 본 게 거의 십 년 되는데, 지금까지 저런 류의 공연들은 죄다 망했다. 어쭙잖게 전통의 미를 살린답시고 현대의 장르를 결합한 결과는 열에 아홉, 아니 열에 열 '끔찍한 혼종'을 만들었고, 미디어는 항상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댔다.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현대적 세련미의 결합이라던가, 우리 가락과 현대 박자의 조화, 뭐 이런 것들이었지만 대부분 그것들은 마요네즈를 듬뿍 넣어 비빈 느끼한 비빔밥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스웨그(Swag)란다 스웨그.


작년 SMF(Starlight Musical Festival)에서 첫 선을 보인 뮤지컬 '외쳐, 조선!' (ⓒ 카멜월드와이드)


그렇게 그들이 무대에 등장했고, 위 사진같이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갑자기 랩을 했고, 호응을 유도했다. 랩은 랩인데, BGM은 국악 믹싱이고, 중간중간 들어가는 한자어를 활용한 언어유희는 약간 내 스타일이었고, 어깨가 약간 들썩이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어느새 '오애오!'를 외치고 있었다. 무대가 끝나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야, 본공 언제라고?




시조(時調) 스웩?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의 배경은 조선이나, 그 조선이 아니다. 가상의 나라 '조선'이다. 그냥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이라는 거다. 이 상상 속의 나라 '조선'의 국가이념은 '시조'인데, 한 역모사건으로 인해 시조가 금지된다. 시조 활동이 금지되며 백성들은 표현의 자유와 흥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시조를 전하려는 비밀시조단 '골빈당'이 활동하게 되고, 결국 15년 만에 '조선시조자랑'이 열리게 된다.


시조가 금지된 나라 '조선'에서 시조를 외치는 비밀시조단 '골빈당' (ⓒPL엔터테인먼트)


사실 스토리만 놓고 보면 진부하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현대의 '랩'을 조선시대 '시조'와 대비해 형식을 가지고 오고, 그 위에 홍길동의 '활빈당'에서 모티프를 딴 것 같은 '골빈당'을 등장시켜 탐관오리의 만행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정의를 지켜내는 스토리 말이다. 물론, 홍길동과 같은 영웅도 등장하는데, 그것이 이 극에서는 시조 천재 '단'이다. 아버지 성함은 홍자모,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름은 '홍단'이다.


늘 청색 옷을 입고 다니는 주인공 '홍단' (ⓒPL엔터테인먼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이 매력적인 이유는 생경한 극의 형식과 지극히도 세련된 넘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이 스토리 라인을 씹어먹을 만큼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넘버의 형식을 시조 기반의 '랩'으로 가져갔다면, 처음에는 신선하지만 점점 진부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대놓고 B급 감성을 표방하며, 현대의 엔터테인먼트적 콘셉트를 극의 여러 곳에 차용함으로써 퓨전의 형식을 외려 매우 세련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예를 들면, 또 다른 주인공 '진'이 활동하는 국봉관(이는 아마도 '국뽕'에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은 현대의 '클럽'이며, 이들이 결국 임금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조선시조자랑'은 '전국노래자랑'을 차용했고(무려 진행자는 '엄씨'다, MC 아니고 엄씨), 2막에 주로 전개되는 조선시조자랑의 진행방식은 최근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모방했다. 이런 자잘한 포인트들이 모여 극의 분위기를 만들고, 점점 관객들을 몰입시켜 나도 모르게 '수애구'를 응원하고 '오애오!'를 외치게 한다. 분명, A급 퀄리티의 B급 감성은 힘이 있다.


극 중, 퍼포먼스와 개인기에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골빈당' 배우들 (ⓒNEWS CULTURE)


그리고 이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흥의 요소는 바로 '배우들'이다. 이는 공연의 흥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넘버도, 조명도 아닌 배우들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최고의 흥돌이 흥순이들은 다름 아닌 배우 자신들이다. 극을 관람하다 보면, 배우들이 극을 사랑하는 모습이 관객들에게 느껴질 정도이니 배우들 개개인이 극을 즐기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특히,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이 기존 대학로에서는 네임드 일지 몰라도, 일반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배우라는 점에서 이 극이 주는 의미는 크다. 특히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을 뮤지컬 데뷔작으로 무대에 선 양희준 배우는 팬들 사이에서 이미 '거물급 신인'으로 알려져 기대를 받고 있다. 원래 경영학을 전공하다가 군 제대 후 뒤늦게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하는데, 박은태 배우를 포함하여 경영학도 출신 배우들의 활약을 (경영학도로서) 응원한다!




'조선 쳐돌이'들을 양성해 낸, B급 감성 마케팅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제작사인 PL엔터테인먼트와 배우들의 B급 감성 마케팅이다. 국내 창작 뮤지컬이고, 초연이며, 소재의 특이성으로 보기만 해도 홍보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 극을 위해 제작사는 이른바 '약을 빨고' 마케팅을 하는 것 같은 B급 감성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 인스타그램 @swagagemusical

대표적인 홍보가 SNS를 통한 '용어사전'인데, 왼쪽에 보이는 이미지와 같이 '스웩'을 '수애구'로, 또

수애구'를 '壽愛口'로 해석하여 말도 안 되지만 말이 되는 언어유희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은 극의 진행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나, 한 단어와 이미지를 통해 극이 어떤 감성을 지니고 있는지 명확하게 인지시켜, 관객들이 빨리 극 속에 젖어들게 하는 데 일조한다. 필자 역시 SNS를 통한 마케팅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가 막상 공연을 보러 들어갔을 때, 위화감 없이 빠르게 극에 몰입하고 극이 보여주는 B급 감성들에 '오그라들지' 않았던 이유는 사전에 지속적으로 관객들과 소통했던 이미지와 말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마케팅의 백미는 '싱어롱데이'인 '국봉관 개장'에 있다. 이미 극 중에서도 '양반 놀음' 등의 넘버를 통해 관객들이 일부 참여하는 형태가 있지만, 이 공연은 마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같이 관객들이 '대놓고' 함께 노래 부르고 참여할 수 있는 싱어롱데이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SNS를 통해 노래와 가사를 '교육'하고 국봉관 개장 당일 배우들이 싱어롱데이를 안내하기까지 한다.

ⓒ 인스타그램 @swagagemusical

이렇게 극이 주는 신선한 소통은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소통의 키워드는 B급 감성이었지만,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채널은 A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소통과 노력의 결과로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에는 이 극의 팬을 자청하는 관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외쳐, 조선!'의 '쳐'자를 따서 스스로를 '쳐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처갓집 치킨의 마스코트 인형인 '처돌이'에서 시작하여 '처갓집 맛은 처 돌았지만, 처돌이는 처돌지 않았다고 해요'라는 유행어를 양산하며 '푹 빠졌다'는 뜻의 신조어가 된 '처돌이'를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의 팬들이 응용하여 스스로를 '조선 쳐돌이'로 부르며 '갓처 조선!'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팬덤이다.

  



ⓒ PL엔터테인먼트


사실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2017년 서울예술대학교 졸업공연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기존 창작 뮤지컬의 흐름을 보면, 학생들이 기획하고 제작했던 공연이 실제 관객들에게 선을 보이는 과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기에, 제작자는 과감하게 이 공연이 '배우와 함께 맨 땅에 헤딩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힘들었고, 새로운 길을 내는 과정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명백하게,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은 한국 창작 뮤지컬이 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이자 성공사례로 보인다. 90년대생 창작자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감성,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마케팅, 그리고 신선한 극의 형식까지 말이다. 이들이 하는 '맨 땅에 헤딩'은 조금씩 땅을 흔들고 있고, 그런 움직임들에 언젠가는 땅이 뒤집힐지도 모른다.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의 대사 중 하나인 '작은 외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작은 창작 뮤지컬이 한국 뮤지컬 생태계를 흔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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