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을 뒤돌아본다. 내 짧은 서른 살 인생에서 올 한해 본 영화의 수가 다른 스물아홉 해 동안 본 영화의 수보다 많은 것 같다. 원래도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올해는 거의 잡식에 가까울 만큼 하루에도 두세 편씩 영화와 드라마를 해치웠다. 외출이 금지된 재택근무 직장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연극과 뮤지컬도 극장이 문을 닫아 거의 보지 못했다. 당연히 공연 글도 많이 쓰지 못했다. 침체된 시장 속에서 소재가 부족한 한 브런치 작가는 내 방에서 점점 말라 가는 식물과 같은 꼴이었다(물론 그들은 마르고, 나는 확찐자가 되었지만). 그러던 중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렸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넷플릭스였다.
넷플릭스가 뮤지컬을 만들기라도 했냐고? 아니, 정확하게는 '뮤지컬 영화'를 만들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더 프롬〉
12월에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론칭된 뮤지컬 영화 〈더 프롬The Prom, 2020〉의 이야기다. 사실 뮤지컬 영화는 수익성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뮤지컬은 영화나 드라마만큼 대중적인 장르가 아닌 데다가, 그중에서도 뮤지컬 영화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무려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글러브상을 거친 수작인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2013〉이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뮤지컬 영화 중 가장 높은 순위에 있음에도 국내 관객수 590만밖에 되지 않고, 낭만과 사랑의 상징인 〈라라랜드La la land, 2017〉가 400만 관객도 동원하지 못한 것을 보면 뮤지컬 영화는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넷플릭스가 오리지널로 뮤지컬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더욱 기대가 됐다. 도대체 어떤 걸 만들려고?
ⓒ 넷플릭스
뮤지컬은 크게 퍼포먼스에 중심을 둔 극과 드라마에 중심을 둔 극으로 나뉜다. 뮤지컬 영화 역시 다르지 않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더 프롬〉은 '퍼포먼스 뮤지컬'에 가깝다. LGBTQ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지만, 주인공들이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배우들인 데다 졸업 축제인 '프롬'을 소재로 하는 만큼 화려한 퍼포먼스와 카메라 앵글, 에너지 넘치는 노래와 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준다.
당연히 캐스팅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는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제임스 코든, 키건 마이클 키, 앤드류 라넬스 등 호화로운 캐스팅으로 가득하다. 대부분 뮤지컬, 혹은 뮤지컬 영화를 경험한 배우들이기 때문에 스크린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더없이 완벽하다.
ⓒ 넷플릭스
줄거리는 간단하다. 토니상을 받을 만큼 유명한 베테랑 브로드웨이 배우 디디와 배리는 자신들의 공연 〈엘라노어〉가 브로드웨이로부터 혹평을 받고 그들이 자신들만 생각하는 나르시시스트라는 비판을 받자, 공연의 홍보와 함께 비판의 목소리를 없애기 위해 대뜸 남을 돕는 사회운동에 나서기로 한다. 마침 인디애나 주에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졸업 파티인 '프롬(Prom)' 참석을 거부당하고 있는 '엠마'라는 학생이 있었고, 그들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브로드웨이와 결이 맞는 엠마를 도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디애나주로 떠난다.
이 얼마나 교조적이며 무식한 발상인가? 성소수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을 어른들이 '굳이' 찾아가 편협한 학부모와 학생들을 교화하고 다양성이 존중받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엠마를 도와주는 어른들이다소 무례하지만 꼰대스럽지 않고, 상대를 도발하되 지나치게 설교하지 않으며, 결국은 엠마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단순하고 담백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 넷플릭스
개인적으로 놀라운 것은 이 뮤지컬 영화의 노래다. 원작 뮤지컬이 있는 작품답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넘버들이 모두 정말이지 환상적이다. 브로드웨이의 이야기를 다루는 네 배우들의 영역은 마치 뮤지컬 〈시카고〉를 보는 것 같고, 엠마와 학교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하이스쿨 뮤지컬〉을 보는 것 같은 청량한 느낌도 든다.
특히 엠마의 답답한 상황과 스스로의 다짐을 보여주는 노래 'Just Breathe'는 마치 〈모아나〉의 'How Far I'll Go'를 듣는 것 같은 깊은 떨림을 주었고, 앤지(니콜 키드먼 분)가 엠마에게 "자신의 빛을 찾으라"고 이야기하는 넘버 'Zazz'는 뮤지컬 〈위키드〉의 'Popular'가 생각나는 유쾌하고 센스 있는 장면이다.
(넷플릭스가 유튜브에 공개한 아래 영상을 꼭 보길 바란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다시 듣고 있는데, 정말 너무 좋다!)
ⓒ Youtube 'Netfilx Film Club'
영화 내내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디디 알렌(메릴 스트립 분)이다. 나에게 메릴 스트립은 〈맘마미아!〉의 도나로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 13년 전, 소피의 엄마로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르며 대배우의 포스를 뿜어낸 메릴 스트립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다른 배우들을 압도하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스크린 안에 당당히 서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엠마 역의 조 엘런 펠먼은 이 영화가 데뷔작임에도 작품의 분위기에 잘 맞는 연기와 노래로 중심을 잡아주고, 제인스 코든과 앤드류 라넬스의 감초 같은 연기도 극을 너무나 유쾌하게 한다. 니콜 키드먼의 분량이 적은 것이 다소 아쉽지만, 전반적으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도 많은'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 넷플릭스
"전반적으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얼빠진 즐거움과 킬링 대사 몇 줄 때문에 충분히 호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해외 평에서 내 마음과 가장 비슷한 문장을 하나 꼽아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얼빠진 즐거움'과 '킬링 대사'다. 드라마의 개연성이나 내용과는 관계없이 퍼포먼스 뮤지컬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장면 전환, 음악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말 그대로 '순삭'해버렸다. 크리스마스를 위한 킬링타임 영화로는 더할 나위 없다. 혹시 추운 겨울, 외출은 어렵고 따뜻한 집에서 신나게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주저 없이 〈더 프롬〉을 선택해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다양한 뮤지컬 영화들, 그중에서도 〈더 프롬〉과 같은 대작이 나온다는 것은 뮤지컬 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영화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만큼, 더욱더 많은 뮤지컬 영화가 스크린에서 함께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