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생충>을 보고 놓쳤을지도 모를 부분들
* 스포일러를 포함하는 글입니다.
기생충은 영화 속의 대사처럼 굉장히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수많은 상징들이 점처럼 분포되어있고, 그 점들을 순서에 맞게 선을 그었을 때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그림이 나타나는 영화입니다. 이 리뷰는 제가 발견한 점들을 이어 그려낸 <기생충>의 그림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도식적으로 드러나는 구조는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계급구조입니다. 하류층은 반지하에 삽니다. 창밖으로 누군가의 노상방뇨조차 노출되는 곳입니다. 그곳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무방비하게 흘러들어오는 공간입니다. 반면 상류층은 전형적인 업타운에 삽니다. 창밖으로도 그 어떤 사생활도 노출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가꾼 정원만 보일 뿐입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상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류층은 그런데서 살고 상류층은 저런데서 삽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 접점 없는 두 개의 계층이 저택이라는 공간에서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상류층은 하류층을 직감적으로 냄새로 감지합니다. 그 냄새는 지하철이라는 대중교통의 냄새로 대변됩니다. 자기만의 승용차와 운전기사를, 프라이빗한 공간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냄새입니다.
이 긴장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씬은 소파 위에 누운 조여정 부부와 테이블 아래 기어들어간 송강호 가족이 같은 공간에 위치하는 순간입니다. 상층과 하층, 대저택과 반지하의 구도가 거실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서 송강호 가족은 이선균/조여정 부부의 대화에서 나오는 모멸적인 비난들(하류층 냄새)과 배설적인 욕구들(애무와 신음)을 위에서 아래로 무방비하게 흘려듣습니다. 그 오물이 자식들의 귓가로 흘러들어도 부모들은 아무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숨을 죽일 뿐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젖은 채 무력하게 살던 집을 내주듯이.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층의 운명입니다.
인디언이 자주 등장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비유일 것 같습니다. 인디언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자, 유럽의 이민자들에게 내몰려 주권을 빼앗긴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민자들이 보장하는 법과 제도,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보금자리 안에 기생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메리카에는 또 다른 기생충들이 있습니다. 불법이민자들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메리카드림을 안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아메리카에 잠입합니다. 영화에는 각각 여기에 해당하는 3가지 그룹이 등장합니다.
원주민 - 벙커에 사는 하녀와 남편
시민 - 조여정 부부
불법이민자 - 송강호 가족
원주민과 불법이민자들은 '기생충'의 자리를 놓고 밥그릇 싸움을 합니다. 누구보다 서로에게 잔인해집니다. 동시에 연민도 느낍니다. 하지만 생존은 연민을 압도합니다. 생존문제 앞에서 가난한 이들은 선할 수 없습니다. "나도 돈만 많으면 너그러워질 수 있어. 돈 많은 사람들은 구김이 없잖아"
그들의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시민은 그들의 그런 생존분투를 모릅니다. 윗집의 소란은 층간소음이 될 수 있어도, 저 아랫층의 소란은 윗층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인디언이란 단지 놀이의 소재이고, 코스프레의 대상이자, 현실과는 먼 환상 속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악인인 건 아닙니다. 단지 지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무지할 뿐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행복만으로 충분하기에 굳이 아랫층의 불행에 몰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기생충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의 단면입니다. 누군가는 상층, 누군가는 하층. 누군가는 원주민, 누군가는 시민, 누군가는 불법체류자. 그러나 이 배치는 누군가의 의도도, 누군가가 선하고 악해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회 구조 안에서 그들은 그 위치에 놓였을 뿐이고, 그 위계 속에서 이 모든 희비극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독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관객의 눈앞에 들이밉니다. 자기가 목격한 현실의 단면을 작위적인 전개와 과장된 연기를 통해 확대하여 관객의 눈앞으로 들이밉니다.
수석도 결국 돌입니다. 다만 근사한 케이스에 담겨있고, 외양이 그럴듯하고, 누군가가 이것이 수석이라고 소개하기 때문에 수석이라고 불릴 뿐입니다.
이건 정확히 최우식의 처지입니다. 그는 근사하게 포장된 학력과, 번듯한 생김새와 친구의 소개로 대저택의 수석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수석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그의 계획입니다. 영화에서 말하는 계획이라는 것은 곧 자신의 의도대로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불굴의 4수생은 그런 믿음 안에서 자신의 계획 속으로 가족들을 데려옵니다.
하지만 최우식은 늘 불안합니다. 그는 자신이 단지 돌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잠시 사랑의 단 꿈을 꾸기도 합니다. 입술과 입술이 맞물려있는 동안,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도 구분 없이 합치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입술을 떼면 자신이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들킬 거라는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진짜 수석이 되기 위해, 수석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나게 됩니다. 수석이 가격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머리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수석은 결국 다시 계곡의 흔한 돌 중 하나로 돌아갑니다. 최우식은 반지하 생활로 돌아갑니다.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건 그의 아버지가 겪은 일의 복습이기도 합니다. 대만카스테라 가게를 차릴 때만 해도 송강호는 계획이 있었을 겁니다. 그것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겁니다. 성공의 단 꿈을 꾸었을 겁니다. 하지만 실패합니다. 계획이 연거푸 수포로 돌아가며 송강호는 무계획주의자가 됩니다. 계층상승의 가능성을 포기합니다. 그 정신만이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식에게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이 됩니다.
하지만 최우식은 아버지와 다릅니다. 이 모든 소동 끝에도 최우식은 계획을 간직합니다.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오르는 단 꿈을 버리지 못합니다. 사다리의 끝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고 가족의 행복을 되찾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말에 등장하는 최우식의 상상은 비극입니다. 영화 <라라랜드>의 결말부에 펼쳐지는 환상처럼, 최우식의 상상은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건 계층이동이 갈수록 폐쇄되어가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자수성가를 꿈꾸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서 누차 반복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섬뜩함을 떨치기 힘듭니다. 영화의 잔상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불러낸 현실의 망령들 때문입니다. 이보세요,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 이제 어떡하죠? 감독은 묻습니다. 구체적이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것들이 우리의 현실에서 기시감으로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그 질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답변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