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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영 Mar 31. 2024

아기 키우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미닫이 문이 있던 우리집

신혼집이 생겼다. 우리 돈으로 마련한 집은 아니고 시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물려받았다.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이웃이 우리의 이웃이 되었다. 이웃의 거의 대부분은 흰머리가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이웃들은 출근을 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가 많아 빌라 의자에 기대어 앉아계시거나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개천을 걸었다.


어느 날은 우리 집에서 누수가 발생해 아래층 천장 벽지가 전부 젖은 일이 있었다. 30년도 더 된 빌라라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피해를 끼쳐 죄송한 마음에 문을 두드렸는데 아래층 할머니는 성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허허 웃으며 맞아주셨다. ‘살다 보면 마르겠지’ 하며 크게 마음 쓰지 말라고 하셨다. 철저한 원인규명과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대에 만나기 힘든 귀한 너그러움이어서 오히려 쭈뼛거리면서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만 연신 하다 올라왔다. 바삐 살다가 불현듯 그 동네를 떠올릴 때가 있다. 시간도 인심도 넉넉하셨던 어른들과 조금만 걸으면 펼쳐지던 논과 밭들. 첫째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분만실에는 의료진이 일곱 명이 있었고 후처치 할 때에는 의사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출산 과정이기는 했으나 이렇게나 위중한가 싶었다. 나중에서야 이유 아닌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병원 내 주요 의료진이 나에게 전부 투입되었던 이유는, 내가 그날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은 유일한 산모였기 때문이다! 그 산부인과는 내가 살던 도시의 유일한 출산병원이었음에도 그랬다. 당시 출산율은 0.8로 10명의 가임기 여성 중 2명은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그걸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우량아로 태어난 첫째는 신생아실의 유일한 아기로 극진한 vip 대접을 받았다. 아기가 귀하니 간호사들끼리 서로 아이를 안겠다고 했단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나의 아이와, 그 뒤로 텅텅 빈 아기침대. 당시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풍경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에 실제 하는 아이에게만 깊이 몰두해 있었다.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도 귀했지만 주민의 상당수가 노령인구였던 그 동네에서도 귀한 편이었다. 지나가던 어른들은 아기 울음소리가 귀한 세상이라며 눈길 한 번 더 주고 미소 한 번 더 지어주었다. 아이는 기억할까? 연고지 없는 동네에서 오고 가는 많은 어른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노키즈존이 이슈가 되면서 아이만 보면 얼굴을 찌푸리는 시대와 아기가 귀해 얼굴만 봐도 웃음이 피어나는 시대를 동시에 살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내 아이에게 향한 시선은 따뜻해서 안도했다.


아이와 산책을 나가면 종종 유아차가 보였는데 그곳에는 높은 확률로 아기가 아닌 강아지가 탑승해 있었다. 그리고 더 높은 확률로 유아차의 주인은 할머니 또는 아주머니 또는 할줌마였다. 아이가 잠들면 잠시 벤치에 앉아 책도 읽고 일광욕도 쬐었다. 그러다 보면 머잖아 할머니 또는 아주머니 또는 할줌마가 말을 건네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주목할 점은 대화의 레퍼토리가 백이면 백 같았다는 점이다.


“아이고 요즘 같이 아기가 귀한 시대에 새댁 큰 일 했네!”

”하하 네 감사합니다. “

“아기가 남자예요 여자예요?”

”남자아기예요~“

“우리 자식도 얼마 전에 손주를 낳았는데 얼마나 토실토실한지 어쩌고 저쩌고”

또는

“우리 애들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 결혼할 생각을 안 해서 어쩌고 그래도 직장이 번듯해서 저쩌고”


대화가 본론으로 접어들면 필시 내가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나도 어른과의 대화가 고팠던 시점이라 나름 경청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듣다 보면 머릿속에 가계도가 그려지며 말하고 있는 이 여성의 서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생고생하며 자식을 기르다 이윽고 장성한 자녀가 부모 품을 떠나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모습.


누군가는 새 인생을 얻은 듯 날아다니기도 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해 가슴 한편에 품고 살기도 했다. 아마 평생 보내지 못할 수도 있을 거였다. 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기도 한 이 보편적인 엄마들의 생애를 들으며 떠올렸다. 나도 해서가 크면, 가장 중요했던 존재가 내 품을 떠나면 뿌듯하면서도 무언가 헛헛해 자꾸만 내 이야기가 아닌 자식의 이야기를 하게 될까?


아직 가지 않은 길이지만 알 것 같기도 했다. 아이는 지금도 내 삶을 송두리째 차지했고 앞으로도 점점 지경을 넓혀갈 것이었다. 그렇게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어도 마음에는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겠지.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그런 거겠지.


그녀들은 유아차에서 잠만 자는 이 작은 존재가 인생을 곱씹어보게 한다는 점에서 육아는 어찌 됐건 실보다 득이 많을 거란 걸 알려주었다. 그 무렵 내가 일상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남편, 그리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그런 어른들 뿐이었다.


유아차에서 잘 자던 해서


아기를 정말 낳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기 낳아 기르는 사람들은 전부 나 모르는 곳에서 한데 모여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내가 비슷한 환경에 있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갈구한다는 점이었다. 육아 인프라가 없는 동네에서 아기를 키우는 건 가끔은 한낮의 망망대해를 떠도는 돛단배에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아이는 아직도 통잠을 안 자는데 그쪽 아이는 어때요? 육아하면서 살림하기 참 쉽지 않지요? 아기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 정말 몰랐어요 등, ‘육아’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밖에 나가면 아기엄마가 있을까 싶어 유아차를 낑낑대고 끌고 내려와(30년 된 구축 빌라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정비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도보를 지나 카페에 가면 청소년은 있어도 아기는 보이지 않았다. 놀이터에도. 공원에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정자에 앉아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비둘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뿐이었다.



가끔이나마 아기와 아기엄마를 마주칠 수 있는 곳은 소아과였다. 두 돌 이전의 아기는 시기별로 맞아야 하는 예방접종이 있어서 한 두 달마다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 그때마다 몸무게가 잘 느는지 체크하고, 수유와 이유식 상담을 하기도 한다. 아기는 돌까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면역력이 있어 크게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 병원치료로 돈 들 일이 거의 없다.


한 번은 이유식으로 익힌 계란 노른자를 먹였다가 그대로 다 토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소아과에 데려간 적이 있다. 첫째를 출산한 산부인과와 한 건물을 공유하는 병원이었다. 의사는 의외로 계란이 아이들에게 알레르기를 유발하기도 하니 잠시 섭취를 중단시켰다가 한 두 달 뒤에 다시 먹여보라는 처방을 내렸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납을 하는데 병원비가 300원이라는 것이 아닌가.


“금액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3,000원이 아닐까요?”

“이 금액이 맞아요. 아기들은 병원비도 참 귀엽죠.”


300원을 결제하면서 송구스럽기도 하고 이 소아과는 뭐로 먹고사나 하며 병원을 나온 기억이 있다. 그렇게 그 동네에서 조금은 외롭고 웃기면서 한산한 육아를 했다. 그러다 신혼부부 특별공급 청약에 덜컥 당첨되어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육아맘들이 모여있는 신도시에 살며 기존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너는 그 동네에서 꼬박 일 년을 무럭무럭 자랐지


최근 우연히 이사 오기 전 동네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도시의 유일한 출산병원인 산부인과는 올해부로 분만실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의료수가가 이해타산에 맞지 않기도 했겠지만, 태어나는 아기가 점점 줄어드니 운영을 지속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 울음소리는 더 귀해졌을 것이고, 어떤 신혼부부는 아이를 낳으려다가도 인프라가 없어 아이를 가지지 않는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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