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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키 Sep 25. 2018

[5화] 주름 없는 손으로 고추를 따는 화가, 박한나

젊은 농부가 들려주는 '현실적인' 귀농 이야기


난 시골을 싫어한다. 사람들은 시골을 생각하면  공기 좋고, 물 좋은 휴양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자연 안에 파묻혀 있으면 자연스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면서. 하지만 내가 경험한 시골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 할아버지 댁은 시골이다. 어렸을 때 명절이나 방학 때마다 시골로 내려갈 땐 유배를 가는 기분이었다. 왜냐면 시골은 문명에서 떨어진 오지였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분리되어 현대 문명이 닿지 않는 곳. 과자를 사러 1시간 동안 구멍가게까지 걸어가야 하는 곳. 구멍가게에서도 오징어 땅콩, 맛동산 밖에 팔지 않는 곳. 치킨, 피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 KBS1 채널밖에 나오지 않는 곳. 나이 든 어르신만 있고 또래는 없는 곳. 
모든 시골이 그렇진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시골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 음식도 맛없고, 놀 거리도 없고, 친구도 없는 곳이었다. 만약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젊은 나이(24살~27살 현재까지)에 귀농을 한 친구가 있다. 오늘의 인터뷰 주인공 박한나의 이야기다.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시골을 삶의 터전으로 삼다니. 존경심이 들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한나 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고추농사가 바쁠 텐데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준 것이다. 게다가 '내가 영양까지 들어가 인터뷰를 해야 하나?'하며 걱정스레 첫차와 막차 시간을 알아보고 있는데 친히 안동으로 나와 주셨다. 내가 영양으로 들어갔다면 막차를 놓치고 꼼짝없이 그 안에 갇힐 뻔했다. 아무튼 이제 고마운 한나 씨의 이야기를, 귀농을 결심한 젊은 20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양 고추 홍보대사, 박한나>


오늘 인터뷰 주인공, '박한나'


요새 근황이 어떻게 돼요?
요새는 뭐 똑같죠. 밭에 가서 일하고. 이제 농사가 막바지에 다다라서 고추 수확하고, 세척하고, 고추 선별작업하면서 고객들에게 택배 보내고 있어요.
  

한나 씨가 찍은 예쁜 고추들. 고객들에게 보내지기 전.


고객들은 어디서 끌고 왔나요?(웃음)
고객들이요?(웃음) 어디서 끌고 왔냐면, 처음 귀농했을 땐 고객들이 없잖아요? 그래서 친척, 가족, 친구들부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핫 페스티벌'에 나가서 고객을 많이 만들었어요. 그게 서울시청 광장에서 영양 농부들을 위해서 부스를 열어주는 거예요. 영양에 사는 농민들이 건고추를 차에 싣고, 서울시청으로 와서 각 부스마다 고추를 팔아요. 저희도 그때 고추를 팔고 명함을 많이 뿌려서 고객을 만들었어요. 이번이 핫 페스티벌 3년 차인데 감사하게도 고객님들이 많이 주문을 해주셔요.

매년 서울시청에서 열리는 핫 페스티벌

                                                

이 집 고추가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럼 다른 집 고추들에 비해 한나 씨가 파는 고추가 특별한 점은?
고추 팔러 나온 기분인데, (웃음) 저희는 유황 고추를 키워요. 농약을 적게 살포하고 그 대신 유황을 많이 쳐요. 유황은 벌레를 줄여주기도 하고, 사람  관절에 좋다든지 여러 가지 좋은 작용을 하거든요. 물론 유황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법제 유황을 사용해요. 그리고 저희는 제초제를 안 쳐요. 왜냐면 제초제는 풀을 죽이는 약이라곤 하지만, 뭘 죽이는 약은 대부분 사람 몸에 좋지 않거든요.
  
그러면 잡초를 다 뽑아요?(웃음)
아니오?(웃음) 그걸 다 뽑는 건 정말 미련한 일이고요. 저희는 비닐을 깔아요. 고추를 심기 전에 밭을 한 번 갈고 나면 풀도 다 갈려서 흙밭이 돼요. 그리고 골을 만드는데, 골과 골 사이에 비닐을 깔아주는 거예요. 비닐은 검정 비닐을 사용하는데, 그래야 비닐 아래서 자라려던 잡초들이 햇빛을 못 받고 다 죽어요. 그리고 고추만 자랄 수 있게 고추 심는 부분만 파주는 거죠.


검정 비닐이 깔린 고추밭


그러면 잡초가 전혀 안 자라나요?
아니오. 그래도 잡초는 자라죠. 사실 그것 때문에 농사 초반 많이 힘들었어요. 원래 잡초는 그때그때 약을 쳐서 씨를 말리지 않는 이상은 잘 안 죽거든요. 하루 이틀만 방치해도 쑥쑥 자라서 일주일 뒤면 제 키만큼 커져있고. 그래서 웬만하면 약을 치면서 농사를 짓는데 아버지는 제초제를 안 쓰겠다는 고집이 확고하셨죠. 고추는 잡초와 함께 키우는 작물이라면서... 아버지가 실제로 주위 사람 말을 잘 듣는 편도 아니고 고집이 있으셔서 그대로 밀어붙이셨거든요. 그래도 지금은 그 고집이 도움이 되었어요. 소비자들에게 판매할 때는 제초제를 쓰지 않는다는 게 큰 장점이 되었죠!

                                               한나 씨가 운영하는 블로그, 블로그를 보고 구매를 하는 손님들도 많다. 

영양은 고추 농사가 제일 유명해요
그렇죠. 영양 고추니까. 핫 페스티벌이 영양에만 있는 것처럼. 혹시 청양이 왜 청양고추인지 아세요? 청양 고추가 사실 ‘청’송하고 영‘양’이 함께 연구해서 만든 고추가 청양 고추거든요. 사람들은 청양에서 키우는 게 청양 고추라 생각하는데 원래는 청송과 영양에서 나온 게 청양고추인 거죠. 원래 영양은 고추로 유명했던 곳인데 요즘엔 영양에 산다 하면, ‘영양이 어디야?’ 하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도 처음 들었어요전 양양인 줄 알았어요내가 인터뷰하러 강원도로 가야 하는구나 싶었죠. 
맞아요. 양양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귀농하기 전에 아빠가 영양으로 간다기에 그런 곳이 있는지 처음 알았거든요. 영양은 원래 예전에 유명했는데 지금은 좀 많이 잊혀진 곳이에요.

영양은 강원도에... 아니 경상북도에 있다! -출처: 구글 지도


굳이 영양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음~ 땅값이 싸서.(웃음) 진짜 아무 연고도 없어요. 부모님이 귀농하고 싶으셔서 그냥 찾다, 찾다, 찾다가 아는 분이 영양을 추천해서, 아빠가 차 타고 내려가서 영양으로 딱 결정하신 거죠. 
   
그럼 하필 많고 많은 작물 중에 왜 고추를 선택했는지 궁금한데요.
도시에 있을 때, 엄마 아빠랑 삼촌 땅을 빌려서 텃밭을 100평 한 적이 있어요. 근데 100평이 큰 거 같지만 이것저것 심다 보면 그리 크지 않은 평수거든요. 가지, 오이, 토마토 호박, 고추, 땅콩, 고구마, 감자 이런 걸 조각조각 심었는데, 그때 유일하게 잘한 게 고추였거든요. 그래서 고추를 하게 된 거예요. 
  
다른 농작물은 시원치 않았나요?(웃음
고추가 그나마 나았죠.(웃음) 근데 많고 많은 것 중에 제일 어려운 작물을 하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고추가 제일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왜냐면 배추 같은 건 한 번 물을 주면 자기가 알아서 자라는데, 고추는 자라면서 줄을 한 번씩 묶어줘야 돼요. 안 묶어주면 얘들이 길게 자라면서 바람만 불어도 쓰러지거든요. 그래서 줄을 한 번 묶고, 두 번 묶고, 한 다섯 번은 묶어야 돼요. 
  
고추가 몇 갠데 그걸 일일이 묶는다고요?(웃음)
그렇죠! 아까 사진 보셨잖아요. 그래서 손도 많이 가요.


이 넓은 고추밭 고추를 일일이 묶는다고?


근데 다 묶어주고 또 2주 지나면 고추들이 훌쩍 커요. 그래서 2~3주 간격으로 계속 고추를 묶어줘요. 일 다 하고 뒤돌아서면 또 일거리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고추를 키우냐고 하세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버지가 고집 있으시고,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하시는 스타일이라. 게다가 자기만의 철학이 확고하세요. 그래도 항상 그 고집으로 저희 집안을 올곧게 이끌어 오셔서 저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 같아요. 처음엔 시골에 왔다는 사실이 멘붕이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너무 잘 적응하고 있고. 이제는 엄마 아빠한테 감사한 부분이 많고. 
  

<도시 소녀, 갑자기 시골 소녀가 되다>


어쩌다 영양으로 귀농을 하신 거예요가고 싶어서 간 거예요?
어허....... (한숨)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제가 이 나이에 귀농할지도 몰랐고. 스물넷? 다섯? 언제 귀농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졸업하고 1년 있다가 바로 했어요. 사회생활 1년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건 경험한 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에서 바로 농부로 넘어간 케이스예요. 
  
귀농을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어떻게 결정하게 됐어요?
제 진로나 목표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냥 남들처럼 직장 다니면서 똑같이 살고 싶었어요. 원래는 일산에 살았거든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쭉 살아서 거기가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거기서 직장 구해서 딴 친구들이랑 똑같이 일하면서 살 거라 생각했죠. 
근데 아빠가 귀농을 생각하고 계셨더라고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리도 계속 알아보셨고. 원래는 저까지 내려갈 필요까진 없었는데, 귀농하기 전에 아빠가 건강검진을 받았어요. 엄마가 귀농하기 전에 당신 건강검진받아보자 하셨는데 보통 아빠들은 그런 거 안 하려고 하시잖아요? 근데 엄마가 ‘어차피 시골 내려가면 병원도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받을 거 다 받고 내려가자.’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았는데, 검사 결과 간암 2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그때 아빠가 수술받으시고 몸이 확 나빠지셨어요. 원래는 설비하고 무거운 중장비 하시는, 체격이 건강한 분이셨는데. 아무튼 아픈 아빠를 엄마랑 단둘이 둘 수 없어서 제가 귀농을 하게 됐어요. 오빠하고 저 둘 중에 한 명은 내려가서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오빠는 자리를 잡고 저는 자리를 못 잡은 상황이라 제가 당첨된 거죠.
  
거의 자의 반타의 반으로
그렇죠. 그리고 도시에서 방을 얻을만한 돈이나 여력도 안됐고요. 그래서 내려가게 됐어요. 
  

<이루지 못한 꿈, '그림'>


도시에 살다가 갑자기 귀농하고 나서 힘들진 않았어요?
처음 1년은 많이 속상해서 울었어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못 하게 됐으니깐.
  
원래 하고 싶은 게 어떤 거였는데요?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직장 생활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림도 그리고 싶었어요. 근데 그림을 그릴 거면 차라리 도시에서 그리는 게 유리했죠. (웃음) 여기 와서 고추를 따느라 그림에 열중할 수도 없고,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팔고 싶은데,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판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근이나 감자랑 물물교환을 할 수도 없잖아요. 모든 면에서 도시가 좋았었는데 그런 걸 못해서 속상했죠. 
  
그림은 원래 잘 그렸고요?
잘하진 못했어요. 그냥 무난하게?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어요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다는 게 애매한 게, 어렸을 때부터 낙서처럼 쭉 그려왔어요.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건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게 된계기가 있었어요
그전(대학교 4학년 전)까진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 주변 친구들이 좋아해 줬어요. 그리고 그림 그리는 시간 동안 기분이 너무~ 좋고, 쉬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4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고 페이스북 페이지에 꾸준히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비밀에 부치고 시작했죠. 

한나 씨가 운영하는 페이지, <손수그림>, <한알> 팔로워 수가 합치면 거의 만 명이다.


아빠가 그림 그리는 걸 싫어하셨다고요?
싫어했다기보단 잘 모르셔서 그러셨어요. 지금은 아빠가 제 그림을 되게 좋아하세요. 예전에 제 그림을 못 보셨을 때는 그걸 쓸 데 없는 일이라 생각하셨죠. 제가 고등학교 때 방에서 시험기간인데 공부 안 하고 그림을 그리면 ‘얘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 이러셨죠.(웃음) 학생은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야 하는데 제가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아무튼 그렇게 페이지를 운영하다가 두 번의 기회가 찾아왔었는데, 귀농하면서 아깝게 날아갔고요. 
  
두 번의 기회는 어떤 거예요?
귀농하기 직전에 두 가지 제안을 받았었어요. 청계천에서 하는 그림 전시에 참가할 수 있는 초대장이 왔었고, 제 그림에 대한 상품을 만들 기회가 있었어요. 원래는 그걸 하고 싶어서 아빠랑 엄마한테 말했어요. 그림을 그려서 작품을 전시하거나, 상품을 만들어 팔려면 온전히 거기에 매달려야 되거든요. 경상북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아빠한테 부탁했었어요. 한 달만 서울에 있다 오면 안 되겠냐고요. 근데 그때 아빠가 단호하게 거절하셨어요. 갓 귀농할 때인 데다, 아빠가 수술하고 점차 회복할 때라 단호박처럼 엄하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제가 그거에 상처를 받았었어요. 그래도 이젠 아빠가 제 그림을 좋아하셔서 괜찮아요.
  
또 해 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 제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근데 지금은 그냥 취미 생활 정도로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 들어서 영상을 배우고 있는데, 영상을 그림만큼 잘하고 싶어요. 왜냐면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해줘서. 만약에 칭찬을 안 해줬다면 자신 없이 가슴 한편에 묻어뒀을 텐데, 좋다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다재다능한 한나 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귀농러가 들려주는 현실적인 농사 이야기>


얘기를 들어보니 귀농 초기에 많이 힘들었던 것 같은데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어요
친구들 못 만나는 거요. 제가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즐기진 않지만, 만나고는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아시나요?
  
나도 내향적 인간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남들을 만나는 것보다 혼자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은 사람. 하지만 너무 오래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외로워지는 사람.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혼자 있고 싶어지고 혼자 있으면 사람을 만나고 싶은 복잡한 혼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그 친구들을 만나면서 힐링 받는 것도 좋아하고. 그리고 도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이라든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다 있었는데, 귀농하면서 갑자기 모든 걸 못 하게 된 거예요. 천천히 하나씩 못하게 되는구나가 아니라, 영양에 오는 순간 ‘단절’ 
  
영양에 들어가고 나서 처음 도시로 나온 게 언제였어요
16년 4월에 귀농해서 16년 12월 겨울에 서울로 처음 올라왔어요. 8개월 동안 계속 일만 했죠. 왜냐면 4월이 고추 심는 시기였거든요. 가자마자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노동’을 한 거죠. 그리고 제가 귀농 전까지 노동을 그렇게 격하게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고강도의 노동을 하다 보니까... 아....... 너무 힘들어서 정신을 못 차렸어요. 
  
농사 노동은 대부분 고강도예요?
하............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근데 해가 지날수록 요령이 생겨서 이젠 멍청이같이 힘만 쓰진 않는데 어찌 됐든 힘을 써야 돼요. 왜냐면 고추를 수확해서 포대에 옮기는 것부터 힘이 필요하고, 그 많은 고추를 심으려면 계속 허리를 숙여 되고. 그래서 안 아프던 허리가 아프더라고요.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초반이라 요령 없이 힘만 써서 몸이 경직되고 그러다 보니 허리를 조금만 숙여도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 보니 허벅지 뒤쪽까지 땡기고요.

맛있는 고추를 키우려다 몸져누운 한나 씨


손에 흙 한 번 묻혀본 적 없는 한나 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어찌나 한숨을 많이 쉬던지 그간 세월이 쉽지 않았을 거란 걸 짐작만 할 뿐이었다. 우울한 한나 씨를 위해 질문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영양에서 고추농사를 할 때 어떤 게 제일 좋았어요
이게 돈으로 돌아왔을 때요.(웃음) 수확 전까지는 엄청 힘들어요, 근데 이걸 팔고 나서 용돈을 받을 땐 기분이 참 좋죠. 그리고 가을걷이 할 때요! 가을걷이는 모든 농사를 끝내고 밭 정리하는 거예요. 밭에 있는 비닐 뽑고 고춧대를 꺾고 밭을 한 번 갈아주는 거. 그때는 좀 해방감이 있죠. 귀농 초기 때는 그런 게 좋았고, 이젠 고추가 잘 자라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아요. 


가을걷이.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모습.


농사하면서 자부심이 들 땐 언제예요?
작년에 이용했던 고객들이 올해도 저희를 찾을 때? ‘작년에 너무 좋아서 샀어요!’하고 연락 올 때. 올해 그런 전화 진짜 많이 받았거든요. 물론 작년에도 전화를 받긴 했는데 올해는 더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작년에 TV에 처음 나오고 올해는 신문까지 나왔어요. 거기에 사람들도 우리 고추 좋다고 연락 오니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그래도 농사는 그림만큼 욕심이 나진 않아요.(웃음) 너무 힘들어서. 근데 제가 ‘농사가 힘들다, 싫다, 그림보다 별로다.’하는데,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말과 성취감이 더 크게 와닿는 거 같아요. 내가 온몸으로 한 수고를 보상받는 거라서. 

한나 씨 농가는 이미 방송을 탔을 정도로 유명하다.


                                                                                                                신문에 나온 한나 씨네


그러면 고추밭을 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고추밭을 하면서 힘들었던 건, 고추에 오는 병 중에 제일 무서운 병이 탄저병이에요. 그게 비가 오면 찾아오는 병인데 고추가 새까맣게 타들어가요. 근데 작년에 탄저병이 찾아와서 고추밭 천 평 정도를 다 말아먹은 거예요. 몇 천만 원 수익이 나는 밭이었는데! 그래서 저희가 작년에 망했어요. 그리고 그 밭을 지나갈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정말 이쁘게 키웠는데 얘네들이 볼품없이 썩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까. 그래서 포기하고 그 밭을 거들떠도 안보니까 잡초도 엄청 무성해지고 정글처럼 변하더라고요. 

한나 씨를 가슴 아프게 했던 탄저병. 고추가 타들어가는 무서운 병.


그래서 고추 키울 때 병균이라든지 바이러스가 찾아올 때 정말 힘들었어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니깐. 게다가 작년에 고추 값이 좀 쌌어요. 그래서 돈은 돈대로 들고 제값은 못 받고 해서 힘들었죠. 그래서 왜 농사꾼들이 농산물 가격 때문에 서울시청까지 와서 항의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돼요. 물론 그걸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농사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네요. 자연재해라든지.
맞아요! 올해도 너무 무서웠어요. 태풍이 온다고 했었잖아요. 제가 원래 기도를 하는 성격이 아닌데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 제발요. 작년에도 아예 말아먹었는데 올해까지 이러면 안 돼요.’ 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다행히 태풍이 지나가긴 했는데, 올해 너무 더워서 고추에 문제가 생겼어요. 원래 지금쯤 고추가 수정된 게 다 열려야 되는데 더위 때문에 꽃이 말라죽은 게 너무 많았어요. 태풍은 없었지만 올해도 농사짓기 그리 좋았던 날씨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요새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잖아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귀농을 추천하기 망설여져요. 시골에는 귀농인을 위해 마련된 게 거의 없고, 여러 가지 불편하고 힘든 것들이 많아요. 사람들이 어~ 귀농하면 힐링하고~ 너무 좋고~ 마음의 편안과 안식~ 이런 걸 얻을 수 있다고 보는데. 아니! 저 고통 얻고, 허리 통증에 심적 부담 같은 것들을 귀농하면서 다 얻은 거 같아요. 귀농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한텐 좀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어요. 귀농을 너무 좋게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하고 농사 말아먹을 생각도 항상 해야 된다고. 
  
귀농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될 게 뭔 거 같아요? 미래의 귀농인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힐링은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웃음) 힐링이랑은 거리가 멀어요. 농촌에 살지 않고 놀러만 오면 힐링은 될 거예요. 근데 정착하고, 먹고살면서, 이웃 주민들과 살 마음으로 온 거라면 힐링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물론 살다 보면 마음의 안식이 자연스럽게 생기긴 할 테지만.
그리고 귀농하면서 또 중요한 건, ‘밑천’인 것 같아요. 시골 오면 도시보다 쌀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오! 오히려 물가가 더 비싸요. 왜냐면 도시는 경쟁사가 많아요. 그래서 더 싸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요. 근데 시골은 경쟁사가 없고 독점이에요. 그래서 시골에서 가격을 정하면 정한 대로 사야 해요. 그래서 돈도 있어야 되고, 편리하지 않을 거예요. 집 앞에 병원이 없으니 아프면 도심으로 나가야 해요. 그래서 차가 무조건 꼭 있어야 돼요, 제가 사는 곳은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아침 6시, 저녁 6시에 한 대씩 있으니까 그것도 다 생각하셔야 되고. 
  
가면 치킨도 못 먹죠?
당연하죠! 치킨 얘기하니까 너무 속상해요. 제가 매주 교회에서 아이들을 만나요. 시골에는 어르신들 아니면 유치원, 초등학생들 밖에 없어요. 중간이 없죠. 근데 얘네들한테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피자, 핫도그, 도넛, 이런 걸 먹고 싶다 해요. 그럴 때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어릴 때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누리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TV로 사람들이 치킨 먹는 걸 보는데 무슨 희망고문도 아니고. 물론 엄마, 아빠가 가끔 안동에 애들을 데리고 나오면 그때 먹긴 하겠죠. 근데 우리처럼 자주 접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좀 안타깝죠. 
  
내가 한 달 동안 시골에 유배를 갔을 때도 치킨이라곤 구경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한테 치킨 먹고 싶어! 매일 노래를 부르니까, 할아버지는 장에 가서 치킨..... 아니 닭을 사 오셨다. 진짜 살아있는 닭을. 치킨을 만들어본 적 없는 할아버지는 도끼로 닭의 머리를 쳤다. 닭들은 목이 달려있는 채로 날아다녔다. 그리고 할머니는 뜨거운 물에 닭을 담가 닭털을 손수 뽑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치킨은 껌 같았다. 닭이 사후경직 때문에 굳은 건지 아니면 토종닭이라 질긴 건지, 질겨도 너무 질겼다. 치킨을 씹는 건지 껌을 씹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튀김옷만 먹고 나머지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골은 그렇게 치킨을 모르는 곳이었다.

  
그럼 힐링 안 되고밑천도 있어야 되고, 문화생활 안 되고. 시골 살아서 좋은 건 대체 뭐예요?(웃음)
도시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파충류나 곤충도 많이 볼 수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고.

한나 씨가 찍은 여러 피조물들. 문명과 멀지만, 자연과 가까운 곳.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노동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바쁜 직장인들보다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만을 위한 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럼 노동에 대해선 주로 어떤 생각을 해요?
이 노동 끝에 나에게 돌아오는 게 있고...
  
돈이 있고?
으헉(당황), 내가 너무 돈돈 거려서 그래. 돈 그만 얘기할게요.(웃음) 노동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고 점점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그리고 저희 농가가 점점 사람들한테 알려진다는 게 너무 뿌듯하고.
  
그러니까 노동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느낀다는 거죠
그렇죠. 그리고 그냥 좋아요~ 어르신들은 고추를 보면 자식새끼 보는 기분이라는데(웃음) 저는 아직 그 레벨 까진 아니지만 그 마음을 쪼끔은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하는 시간엔 보통 어떤 거 생각해요?
나 자신보다는, 여기 살고 계시는 분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저희 아버지가 항상 밥 먹을 때마다 귀가 뚫리도록 하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계시는 어르신들 봐라. 다 허리 굽으시고 몸이 성치 않은 분들인데, 곁에 자식들 있는 거 한 집이라도 봤냐? 없다. 다 자식새끼들 서울에 올려 보내고 그분들만 여기 남아서 고생하고 있다.” 
  
그럼 딸한테 감사하셔야지!(웃음)
아버지가 그 생각을 좀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웃음) 그런데 어르신들을 보면서 ‘내가 이 시골을 살리겠어!’라는 정도 까진 아닌데, 그래도 이 시골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혹시 BYC라고 들어보신 적 있나요?
  
BYC? 내복 브랜드에요
경상북도에 오지 세 곳이 있는데 BYC는 그 셋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봉화, 영양, 청송.(웃음) 이 세 곳은 오지 중에 오지인데 사람들도 잘 안 찾아오고, 인구 수도 적고, 젊은 사람이 없고 고령화된, 전체적으로 침체된 곳이에요. 그래서인지 나중엔 BYC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기도 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자주 들어요. '영양이 좀 더 나은 곳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내 장래희망은 계속 농사꾼>


농사짓기 힘들어하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한나 씨는 계속 농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이야기는 벌써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경상북도인데도 불구하고 경주를 가보면 영양과는 너무 다르더라고요.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 있는 동네에 가보면 카페도 너무 예쁘고, 거리도 개성 있어요. 그리고 한 아이스크림 가게는 자기들 소 농장에서 직접 우유를 짜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요. 직접 키운 농산물로 식당 하시는 분도 있고. 그렇게 자기가 키운 작물로 상품을 파는, 건강한 마을이 있는 거죠. 요샌 영양에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일본 같은 경우는 카페에서 자기 작물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팔더라고요. 그런 걸 보니까 저도 좀 해보고 싶어요. 고추로 엿기름을 내서 파는 방법도 있고 하니까. 페이스북에 보면 젊은 사람들은 풍경 예쁘고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잖아요? 그런데 저희 동네에 풍력발전이 많아요. 정말 예쁜 곳이 많은데 잘만 하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마! 이게 영양의 흔한 풍경이다!


역시 젊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향은 남달랐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저 작물을 잘 키워서 중간 상인들에게 파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한나 씨의 생각은 달랐다. 작물만 파는 게 아니라, 테마를 두고 예쁘게 포장해서 신세대에 맞는 상품으로 팔 생각이었다. 이런 젊은 농사꾼들이 더 많아진다면. 그래서 마을 공동체를 이룬다면. 사라져가는 BYC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미래 얘기로 넘어왔는데혹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있어요?
불안감은 없어요. 어쨌든 현재도 과거의 미래잖아요? 귀농하게 될 미래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가깝게는 미국으로 갈지 모르는 미래가 있어요. 친오빠가 미국으로 같이 건너가서 1년 정도 일을 하자고 계속 꼬시고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미래가 예측할 수 없다 보니 걱정을 안 하게 됐어요. 귀농도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하게 됐고,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상황이 조금은 익숙해진 거 같아요. 불안정한 상황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오면 오는가 보다, 가면 가는가 보다 하게 됐어요. 
  
가까운 3~5년 후에는 뭘 하고 있을 거 같아요?
영상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도 가끔씩 외주가 들어와요. 교회라든지, 어떤 단체에서 영상을 만들어달란 부탁이라든지, 로고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라든지. 그래서 프리랜서까진 아니더라도 영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면서 살 것 같아요. 
  
먼 미래를 그려봤을 때 뭘 하고 있을 거 같아요본인이 생각하는 종착지.
제가 도시생활이 익숙해서 도시가 좋긴 하지만, 제가 나이가 들고 더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영양에 있을 것 같아요. 농사와 관련한 일들을 더 하고 싶어요. 처음 1년 동안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거 같고. 먼 미래를 봤을 때 영양에서 제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한나 씨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 생각하는 철학적 기준이랄까?
도움을 주고 뭘 더 해주는 사람을 요즘은 ‘호구’라 부르잖아요? 부탁 거절 못 하는 사람.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거든요. 힘들어서 부탁 거절 못 하는. 그래서 부탁받은 걸 꾸역꾸역 다 해요. 근데 요즘 드는 생각은, 호구가 그렇게 안 좋은 것도 아닌 거 같아요. 오히려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면 부탁한 사람이 나에게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럼 나도 필요할 때 아무 때나 막 불러도 되나요?
음....... 아....... 근데 괜찮아요. 호구 좋아요~
  
필요할 때 언제든지 부탁하세요박한나 010-xxxx-xxxx....
  
물론 부탁만 하고 그 이후로 연락을 안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손해 보는 장사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항상 고맙다며 매년 작은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본인이 어려워하는 부분을 선뜻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겨서 더 좋다며 웃었다. 일면식도 없는 내가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선뜻 응한 이유도, 한나 씨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치며>


젊은 사람이 왜 귀농을 했을까? 그 동기가 궁금해서 시작한 인터뷰. 그런데 귀농 이유가 생각보다 주도적이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본인이 뜻하지 않았던, 부모님을 따라 반강제로 하게 된 귀농. 한나 씨는 여전히 도시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힘들기만 했던 농사가 이미 한나 씨의 삶이 되어있었다. 그림 얘기와 영상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지만, 영양을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얘길 할 때 이야기에 더 힘이 실려 있었다. 앞으로 농사를 계속 짓게 될까? 미국을 가게 될까? 그림을 그리게 될까? 미래는 한나 씨 말대로 알 수 없다. 한나 씨의 인생에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이상 미래도 예측할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농사를 하건, 미국을 가건, 그림을 그리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자신이 싫어했던 농사로도 꿈을 꾸는 한나 씨라면 다른 어떤 일이 다가와도 미래로 그려낼 힘이 있다. 심지어 매운 고추처럼 미래가 고통스러울지라도. 현재는 '과거의 미래'라 말했던 자신의 말처럼, 한나 씨는 미래였던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부탁을 들어주면 그 사람이 내 재산이 돼요.


                                                                                   한나 님이 재산 +1(필자)을 획득하였습니다.

                                                                                                                          2018.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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