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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키 Oct 23. 2018

[6화] 축구를 그만두고 연필을 잡은 청년, 한승빈

불확실한 길을 내딛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는 말


어릴 때 가출한 적이 있었다. 축구선수가 꿈이었는데 아버지가 반대하는 바람에 집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가출했었단 걸 지금은 기억조차 못 하신다. 왜냐면 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가출은 4시간 만에 짧게 끝났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사건은 싱겁게 끝났다. 당시에 내 꿈을 막으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축구선수로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적은지 알아?"
그 확률이 얼마나 적은지는 커서 알게 됐다. 초등학교에서 프로 축구팀까지 갈 확률은, 단 '0.8%'. 그중에 국가대표 선수가 될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한다. 손흥민, 박지성 같은, 슈퍼스타 되기가 더 힘든 건 말할 것도 없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축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축구선수 지망생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축구판에서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축구밖에 모르던 사람들은 지금 뭘 하며 살고 있을까? 오늘은 축구의 테두리에서 빠져나온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한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 "한승빈".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22살짜리 풋풋한 청년이다. 승빈 씨는 10대의 전부를 쏟았던 축구를 그만두고, 이제 제2의 인생을 찾아나가고 있다. 승빈 씨가 자신의 인생을 쏟았던 길에서 방향을 바꾼 뭘까? 또 어디로 방향을 틀고 있을까?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았다.
  

<축구선수에서 평범한 대학생으로>


오늘 인터뷰 주인공, '한승빈'


요즘 뭐하고 지내셨어요? 

요즘 주 중에는 학교 수업 다니고 주말에는 카페 알바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카페 알바요? 원래 하시던 운동이랑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사실 운동 그만두고 나서 축구 코치 알바도 할 수 있었는데 고민을 좀 했어요. 그쪽 일이 페이가 괜찮기도 하고, 하던 일이니 편하거든요. 그런데 운동을 할 때도 항상 생각한 게 있었어요. 사람이 한 가지에만 몰두하다 보면 그 분야에선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걸 못 보게 되더라고요. 운동하면서도 항상 그만두는 걸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 시기가 언제일지 뚜렷하진 않았지만, ‘그만두고 나면 어떤 걸 해보면 좋을까?’, ‘내가 어떤 걸 하고 싶지?’ 이런 걸 생각했었어요. 
  
많은 알바 중에 왜 카페 알바를 하게 됐어요?(웃음
큰 의미는 없어요.(웃음) 원래 카페 알바하기 전에 이것저것 해봤어요. 운동을 그만두고서 대만 여행 가려고 일용직 일도 많이 했었죠. 택배 상하차도 해보고, 무대 철거도 해봤고요. 그러다 최근에 카페 알바를 하게 됐는데 다른 알바들보단 뭔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8개월째 하고 있어요.
 

카페 알바하다가 사람을 구해서 방송까지 탔다고 한다. 


학교 다니면서 알바하면 힘들지 않아요?
힘들었어요. 지난 학기엔 쉬는 날 없이 학교 끝나고 매일 일했었거든요. 시험 기간만 조금 쉬고.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니까 몸이 못 버티는 거예요. 운동할 때 체력이랑 생활 체력이랑 완전히 다르더라고요.(웃음) 너무 힘들어서 피부도 다 뒤집어졌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알바를 주말에만 하고 학교생활에 전념하고 있어요. 
  
그럼 축구라는 익숙한 테두리에서 벗어나 여러 일을 해봤는데 어때요생각했던 대론 가요?
일단 운동할 때보다 마음은 편해요. 
  
운동할 때 마음이 불편했었어요?
제가 운동할 때 힘들었던 부분이, 단체 스포츠를 하니까 매뉴얼화된 생활패턴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점이었거든요.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기도 어려웠고요. 그리고 팀으로 항상 묶여있어서 부속화된 느낌이 들었어요. 저를 ‘한승빈’ 개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한양대 축구부 소속 선수'로 보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어떤 집단에 들어가서 튀는 행동을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웃음) 
어쨌든 그런 부분이 항상 아쉽단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나오고 나니까 운동이 쉽긴 쉽더라고요.(웃음) 어렸을 때부터 하던 거고 익숙하니까. (운동을 그만두고) 처음엔 적응하는 데 힘들기도 하고, 생각했던 대로 좋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나름 적응하고 있어요. 다행스럽게도 저는 다른 운동했던 학생들에 비해 학업 습관, 태도가 조금은 잡혀있거든요. 예전부터 운동하면서도 공부를 놓진 않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공부를 많이 놓나 봐요?
놓는다고 하기보단 교육받을 시간이 많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운동하느라 바빠서 공부하는 습관이나 버릇을 들일 시간도 부족하고요. 그래서 친구들이 대학교 오면 적응을 잘 못하더라고요. 대학교는, 고등학교처럼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더 끌고 가려는 시스템이 아니니까. 그리고 대학교에선 본인이 결과를 낸 만큼 책임을 져야 하니까, 더 도태되는 운동부 친구들도 많고. 그런 상황을 보면 좀 안타까워요.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 다른 쪽으로 전환하는 친구들이 좀 있나요
네. 보통 대학교 2학년 마치고 (축구팀에서) 많이 나오더라고요. 대학교에서 2년 정도 운동해보면 프로팀 갈 선수와 아닌 선수로 나뉘어요. 본인들도 자기 실력을 알거든요. 개중에는 여태까지 해왔던 거니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 하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에, 여기까진가 보다 싶어서 방향을 바꾸는 친구들도 많아요. 근데 안타까운 게, 공부나 다른 걸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향후 계획 없이 운동을 그만둬요. 그런 경우 뭔가를 시작하기가 굉장히 힘들 거라 보거든요. 
함께 운동했던 후배 중에도 운동을 그만두고 다른 걸 준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있어요. 제가 먼저 운동을 그만뒀다 보니 가끔 저한테 조언을 구하거든요. 근데 제가 어떻게 하라고 말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 친구랑 저랑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하고 지향하는 부분도 다르기 때문에 제가 섣불리 어떻게 하라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저도 아직 뭔가를 준비하는 단계라서. 
  
2002년 월드컵 4강, 유럽에 진출한 한국인 축구선수들. 이런 화려한 모습 뒤엔, 사회로 내던져진 많은 아마추어들이 있었다. 한때 축구판에 몸담았던 승빈 씨는,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그만두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에게 쉽사리 조언을 꺼내지 못했다. 너도나도 남을 가르치려 드는, 선생님이 많은 세계에서 승빈 씨는 유독 입이 무거웠다. 다른 사람의 고민을 섣불리 평가하지 않는 신중한 모습이었다.

<스페인에서 볼 좀 찼던 유학파>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 아버지가 반대하셨다고 했는데, 왜 반대하신 거예요?
아버지가 축구팀 감독님이신데...
  
성함이?
‘한정규’세요.

승빈 씨의 아버지는 과천 문원중학교에서 감독을 맡고 계셨다. 우승을 하도 많이 해서 '우승 제조기'라는 별명도 얻으셨다고. 국가대표 '김신욱'을 키워낸 명감독이다. 
 
이전에 축구선수도 하셨었는데, 오히려 이 분야를 잘 아시니까 더 반대하신 거 같아요. 그 당시에는 폭력도 심했고, 운동선수 길은 특출한 선수가 아니면 은퇴하고 할 게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께선 제가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제가 운동한다 하면 절대로 안 시킨다고 되게 강조하셨고요. 그래서 아버지를 되게 무서워했거든요. 초등학교 삼사 학년 때 취미로 클럽축구를 했는데, 축구부에서 선수 제의가 되게 많이 왔었어요. 근데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못하다가, 중학교 1학년 올라가면서 시작했어요. 당시에 아버지가 너무 늦었다고 하셨는데 설득을 많이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했어요?
제가 아버지를 너무 무서워해서 말도 제대로 못 꺼냈어요. 그래서 두세 달 동안 매일 편지를 썼어요. '운동 시켜달라고. 운동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겠다고.' 아버지가 아침에 나가시기 전에 가방 같은 데 편지를 꽂아놓고 그랬어요. 도저히 아버지 얼굴 보고는 얘기를 못하겠는 거예요. 당시에 아버지를 너무 무서워해서 그렇게 편지로 설득했었던 거 같아요. 

어린아이가 축구를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아버지에게 편지 쓸 생각까지 했을까? 조그만 손으로 매일 편지를 끄적였을 승빈 씨를 상상하니 귀여웠다. 그런데 한편으론 대단해 보였다. 난 아버지가 무서워 축구를 시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승빈 씨는 어린 나이에도 용기 있게 아버지를 설득했다.

스페인에서 축구 유학을 했다고 들었는데거긴 어떻게 가게 된 거예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친한 후배분이 스페인에 가게 됐어요. 이제부터 그분을 ‘삼촌’이라 부를게요. 삼촌이 스페인에 가게 된 이유가, 원래 삼촌이 한국에서 초등학교 축구 감독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삼촌이 가르치던 선수 2명이 스페인 레알마드리드 유스로 가게 된 거예요. 처음엔 삼촌이 둘의 지도자다 보니 스페인으로 따라가셨다가 나중엔 아예 이민을 가셨어요. 선수들 캐어할 겸, 자녀들 공부도 스페인에서 시킬 겸 해서. 그 얘길 듣고 저도 되게 가고 싶었거든요. 뭔가 새로운 나라라는 환상이 있잖아요? 
그 후에 한국에서 1년 정도 더 운동을 하다가 아버지가 절 스페인으로 보내주셨어요. 삼촌도 스페인에 계시고, 한국에서 운동하는 거보다는 외국에서 하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하셔서. 그래서 팔렌시아라는 지역의 성당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운동을 하게 됐어요. 거기서 스페인 지도자분들이 저를 좋게 봐주셔서 나름 인정을 받으면서 잘했던 거 같아요. 당시에 제가 15살이었는데, 16세 팀 감독하는 분의 눈에 들어서 한 살 많은 형들이랑 함께 운동을 했거든요. 

스페인 유학 당시 승빈 씨의 모습


스페인에서 운동할 때 한국이랑 다른 점이 있었어요?
한국은 선후배 관계도 있고, 코치 선생님이 굉장히 두려운 존재잖아요? 별거 안 했는데도 괜히 위축되고, 뭔가 잘해야 할 거 같고.(웃음) 그래서 긴장을 많이 하면서 운동을 했었는데. 사실 스페인도 지도자가 선수 지적하고, 욕도 하고, 다 똑같아요. 근데 그걸 받아들이는 선수 문화가 다른 거예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더라고요. 코치가 막 화내는데 선수도 본인의 주장을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게 되게 신선했어요. 
  
그럼 승빈 씨가 코치한테 뭐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웃음) 저는 포워드(공격수)였는데, 감독님의 신뢰를 많이 받았었어요. 근데 하루는 경기가 너무 안됐어요. 그때 경기가 안 풀리는데 감독이 계속 저한테 뭐라 하는 거예요. 제가 골을 못 넣어주고 있으니까. 근데 저는 답답한 거죠. 왜냐면 같은 팀 선수들이 못 받쳐주고 있는데 저한테 뭐라고 하니까. 그래서 제가 짜증 내면서 얘기했거든요. ‘왜 나한테 그러냐고! 아래쪽에서 패스가 안 되니까 내가 지금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고!’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나니까 감독이 저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거예요. 아까 팀 전체가 경기에 집중을 못 하니까 너를 지적을 했다고. 그러면 다른 선수들도 영향을 받아서 경기에 더 집중을 하게 될 거 같아서 그랬다고.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선 권위자의 말에 토 달지 않고 복종하는 게 미덕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면 예의가 없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리고 스페인은 운동하면서 학업을 함께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요. 한국에서는 제가 운동하면서 학업을 병행하면, 그걸 되게 특별한 케이스처럼 여겼거든요. ‘운동선수가 운동만 잘하면 되지 공부까지 하니.’ 이러고. 근데 스페인은 그게 너무 당연한 문화인 거예요. 축구부를 운동선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학생인데 축구 동아리를 하는 애들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속으로 뜨끔했다. 어렸을 때 TV에서 똑똑한 운동선수를 소개하는 걸 봤었다. 의사 자격증, 변호사 자격증, 경제학 석사를 가진, 많은 운동선수들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쓸 데 없이 공부나 하고 있네. 그 시간에 운동이나 더 열심히 하지.' 공부를 병행하면서 운동선수로 성공하는 사람도 많은데 괜한 오지랖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글을 쓰다가 잘 써지지 않으면 다양한 영상을 보거나 산책을 나간다. 그러고 나면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가지에 매몰돼있다 보면 그 일이 질리기 마련. 운동도 예외는 없다. 

스페인 유학은 언제 끝이 났어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말쯤에 왔거든요. 3년 쪼끔 덜 채우고 왔던 거 같아요. 
  
그만두게 된 이유는 뭐예요?
당시에 스페인에서 자국 선수를 보호하는 법이 생겼어요. 만 18세 미만 외국인 선수들은 상위리그(높은 수준의 리그) 경기를 못 뛰게 하는 제도거든요. 그 법 때문에 어린 외국인 선수들은 실력이 좋아도 계속 하위리그에서 뛸 수밖에 없게 됐어요. 그래서 대학교 진학도 있고, 한국이 그립기도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죠. 
  
법 때문에 못 뛰게 되었을 때 아쉬움은 없었고요?
반반이었던 거 같아요. 그 법이 나오고 나서 한국에서 두 달간 쉬는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고민을 많이 했었던 거 같아요. ‘하위리그에서도 내가 독보적으로 잘하면 좋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반이랑,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란 생각 반이었어요. 왜냐면 타지에서 생활하는 게, 이방인 입장에서는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저를 대놓고 욕하지 않아도, 저희 사이에 흑인이 있으면 뭔가 이질감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것들도 있었고. 그래서 한국에서 편하게 축구할까 생각하다가, 1년만 더 해보자 하고 갔어요. 가서 하위리그지만 열심히 해서 나름 성과도 괜찮았고 리그 우승도 했었어요. 근데 현실적으로 거기서 엄청 열심히 하더라도 저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너무 적은 거 같아서.
  
보호선수 법이 통과되고 1년 더 해봤던 거죠그러다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돌아오게 된 거군요그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많이 후회되진 않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교도 갈 수 있었으니까. 아쉬움은 좀 남지만... 
  

<오랜 시간 걸었던 길이, 문득 내 길이 아니란 생각이 들 때>


축구는 왜 그만두게 된 거예요우리나라 명문대인 한양대에서 축구를 했었잖아요.

저보다 날고 기는 선수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고등학교 때 리그 우승도 하고, 득점 1등도 하면서 나름 열심히 했는데도.

리그 우승 사진
대회 MVP를 수상하는 승빈 씨


득점왕을 하고 우승까지 했는데도 승빈 씨보다 날고 기는 애들이 있어요
저희 리그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 저만큼 하는 선수도 너무 많은 거예요. 그리고 제 그릇이 보인다고 해야 되나? 어느 순간부터 제 한계가 보인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걸 이겨내고 하는 선수들 중에 성공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이 더 많잖아요? 처음엔 한양대란 팀에 가서 되게 기뻤어요. 한국에서 알아주는 학교에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니까 영광스러웠거든요. 근데 가서 나름 열심히 했는데 한계가 보였어요. 기량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크게 뛰어나지 않았고, 경기도 그만큼 못 뛰었고요. 그러다 보니 점점 ‘이 길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학업에 더 치중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독님이랑 면담을 하게 됐고, 축구를 그만두게 됐어요.
  
축구를 그만둘 땐 부모님이 뭐라 안 하셨어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말씀드렸었거든요.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를 더 하든지,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다고. 처음에는 아버지도 제가 대학생도 됐으니까 이해를 해주시긴 했는데, 지금 당장 그만두면 축구 인생에서 후회가 남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2학년까지 해보고 아닌 거 같다 싶으면 그때 결정하자고 하셨거든요. 근데 제가 1학년 때 한 번 다쳤어요. 그 이후에 관리를 못해서 몸도 많이 불고. 감독님이 몸 다시 만들어라 하셨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당시에 게임도 많이 못 뛰니까 의욕도 없고 ‘굳이 살 빼야 되나?’ 이렇게 생각하다가 
  
이미 축구에 많이 정이 떨어진 상태였던 거 같은데요
떨어진 상태였어요. 그러다 2학년 여름쯤에 감독님께 그만두겠다고 했었는데, 감독님이 ‘여태까지 몸도 못 만들어놓고 대학교 와서 제대로 경기 뛰지도 못했는데 지금 그만두면 아쉽지 않겠냐? 한 학기 정도 제대로 해서 시합도 뛴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라.’하셨어요. 그래서 두 달 동안 마음먹고 10kg 뺀 다음, 경기를 뛰고 골도 넣었어요.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봤죠. ‘이 길을 더 가도 괜찮을까? 아니면 다른 길이 나을까?’ 고민하다가, 다른 걸 하는 게 더 맞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말씀드리니 감독님도 수긍하시더라고요. 

한양대 유니폼을 입은 승빈 씨의 모습


그래도 후회 남기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네요.
개인적으론 그래요. 근데 오히려 아버지가 더 아쉬워하셨을 거 같아요. 여태까지 했던 게 더 안정적인 길인데, 그걸 박차고 나왔으니. 

지금은 별말 안 하시고요?
그래도 조금 걱정하시긴 해요. 당신 자식이 편한 길을 갔으면 좋겠고,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고 하니까 좋아하시진 않아요. 근데 제 입장에서는 지금 할 수 있을 때 부딪혀보고 도전하는 게 인생에서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부모님은 다 똑같다. 자식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덤덤히 지켜만 보는 부모가 어딨겠는가? 본인이 갔던 길보단 자식이 가는 길이 더 편했으면 좋겠고, 그 길이 탄탄하길 바랄 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하는 잔소리가 많아지는 것 같다.
근데 아버지 못지않게 승빈 씨도 힘들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정을 쏟았던 길을, 본인의 손으로 그만둘 때 느낌은 어땠을까? 기존에 다져놨던 익숙한 길을 버리고, 가본 적 없는 길을 선택할 때 막막한 감정은 어떨지. 


혹시 운동했던 시간이 후회가 되진 않아요? 운동 말고 다른 걸 했다면 더 빨리 뭔가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라든지.
주변 친구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난 지금과 같은 사고방식이나 생각을 갖지 못하고, 별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됐을 거야.'라는 말이에요. 
운동을 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물론 지금보다는 그 일에 조금 더 앞서갈 수 있었겠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저는 축구를 할 것 같아요.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좋아해서. 그리고 운동선수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어려움을 혼자 극복해내는 법도 배웠고, 유학생활이란 값진 경험도 해봤거든요.  
그래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왜냐면 운동할 당시를 생각해보면 재밌고 값진 시간이었지만, 사실 너무 힘들었거든요. 스스로를 항상 채찍질하고 얽매이며 살았던 것 같아요.

<건장한 청년의 여리여리한 감성>


그렇다면 승빈 씨가 선택하려는 길은 어떤 길일까? 헬스 트레이너? 코치? 아니다. 운동에서 동떨어진 카페 알바를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승빈 씨는 운동에서 벗어난 길을 알아보고 있었다. 승빈 씨는 건장한 외모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작고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는 수줍은 청년이었다. 내가 불편해서 그런 걸지도.

대학교 전공은 뭐예요
스포츠 코칭 전공이에요. 그런데 학과가 스포츠 코칭이긴 하지만, 체육대학에서 기본적으로 심리학이라든지 이것저것 다양하게 배워요. 그래서 만약 전문가가 되려면 어떤 걸 공부하는 게 좋을까 생각했을 때, 스포츠 심리학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스포츠 심리는 어떤 거예요처음 들어보는데.
스포츠 심리는 선수 개개인의 심리 상태가 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불안감이 많은 선수는 어떻게 하면 그 감정을 이겨낼 수 있는지 이런 부분을 다뤄요. 사실 심리적인 문제는 감기처럼 아팠다가 나을 수 있는 부분이에요. 근데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정신과에 가거나 심리상담을 한다 하면 안 좋게 봐요. 

해외에선 운동선수들이 심리 문제를 공공연히 얘기하고 치료한다. NBA 선수 케빈 러브(좌), 더마 드로잔(우)


그리고 지금 스포츠 판에서는 프로팀이 아닌 이상, 이 부분을 감독이나 코치가 다 맡아서 할 수밖에 없는 구조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지도자가 이런 부분을 맡는 거보다는 전문가가 하는 게 더 좋거든요. 그런 방식이 지금은 도입되긴 어렵지만, 미래 가능성을 보며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제 전공 분야에선 심리학 쪽으로 공부해볼 생각을 하고 있어요.

  
글을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얘길 조금 들려줄 수 있나요?
지금도 ‘시’를 좋아해서 많이 읽어요. 시를 언제 처음 접했나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삼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시를 쓰셨어요. 그때 매주 숙제로 시 쓰기를 내주셨거든요. 시를 그때 처음 접했던 거 같고. 그리고 스페인에 있을 때, 유럽은 단점이라면 단점이 학교 운동 외에는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당시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게 필요해서 시를 굉장히 많이 읽었고, 끄적끄적 쓰기도 했어요. 그러다 시에 깊게 들어가기 시작한 시기는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당시에 도서실을 자주 다녔는데, 사서 선생님이 저에게 '정호승 시인'을 추천해주시면서 시를 더 좋아하게 됐어요. 그러다 우연히 학교에 한 작가 선생님이 강연을 오셨는데, ‘제가 작가님 글을 너무 좋아한다.’고 했어요.
  
정호승 시인이 오셨나요?
아니오... 다른 분이 오셨는데 김...?(이름을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
  
모르는데 안다고 그냥 막 던진 거 아니에요?(웃음)
네. 그냥 막 던졌어요. (웃음) 근데 그분이 ‘박준’이라는 시인의 책을 선물해주셨어요.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책을 읽고 있어요. 박준 시인이 굉장히 젊은 분인데, 그분을 알게 된 후로 제가 그분한테 푹 빠졌어요. 강연이 있으면 다 따라다니면서 거의 연예인 보듯 하며 지냈었거든요. 직접 만나서 조언도 들었고. 

승빈 씨가 찍은 박준 시인
박준 시인이 승빈 씨에게 써준 글


그리고 신춘문예(신문사에서 매년 개최하는 신인 작가 발굴 행사) 있잖아요? 저는 당선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태까지 썼던 시를 모아서 거기에 내보기도 했어요. ‘내가 꼭 시인이 돼야지.’ 이런 생각보다는 제 생산 활동을 계속 어딘가에 보여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취미활동이라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시 활동을)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글 쓰는 승빈 씨


<인생 제2막, 아직은 불확실한 길>


미래가 불안하진 않나요?
항상 불안한 것 같아요.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지금 제가 가고 싶은 길이 있어도 그 일이 잘 되리라는 법도 없고, 갈 길을 못 정했을 때는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건 누구나 겪는 과정이니까.
  
지금은 어떤 상태인 거 같아요? 갈 길을 정하셨나요?(웃음)
지금은 길을 선택하는 시기는 아닌 것 같고, 간을 보면서 이 길, 저 길 찔러보는 시기인 것 같아요.(웃음)
  
3~5년 뒤에는 뭘 하고 있을 거 같아요?
일단 3~5년 사이에는 (군대) 제대를 했을 거고요.(웃음) 제 인생 목표가 책을 출간하는 일이에요. 아마 책을 만들기 위해서 내용을 써 내려가고 있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일단 그 내용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있을 것 같아요. 그 이유가 스페인에 있을 당시 축구만 하느라 여행을 잘 못 다녔거든요. 남들은 스페인으로 배낭여행을 오는데 저는 축구만 하고 있으니까. 그게 너무 아쉬워서 최근에 대만 여행도 갔다 왔고, 여력이 될 때마다 여행을 다니려 해요. 


대만 여행 사진


그리고 주변에 세계여행을 하는 분도 많고, 여행 관련 유튜브 영상을 올리는 분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 보면 세계여행 갔다 왔다 해서 삶이 180도 달라지진 않겠지만, 뭔가 얻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여행을 많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제대하고 나서는, 제가 스페인어를 할 수 있으니까 스페인어권인 남미로 여행 갈 계획을 짜고 있어요.

  
여행작가가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제가 우연히 한 여행작가분의 책을 접하게 됐는데, (가방을 가리키며) 오늘도 그 책을 가져왔어요. 최갑수라는 분의 책인데 이 책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여행에서 느낀 점을 정리한 책이에요. 원래 시를 쓰셨던 분이라 그분 특유의 감성이 있는데 그런 것들로 여행책을 내시는 분이에요. 

최갑수 시인의 책
승빈 씨가 최갑수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근데 제가 이분을 꼭 따라가겠다는 건 아니고 여행지에서 제가 느꼈던 감정을 글로 쓰고, 영상을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승빈 씨는 방학 때 영상 편집 기술까지 배웠다고 했다. 단순히 글로 본인의 느낌을 남기는 걸 넘어서, 다양한 수단으로 본인의 경험을 남기고 싶어 했다. 계속 본인의 길을 탐색하면서 그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려는 의지가 있었다. 삼십이 넘어선 나는, 문득 승빈 씨 나이(22살)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내 인생이 그 시절엔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진지하게 길을 찾는 승빈 씨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미래에 전성기라 생각하는 시점엔 어떤 걸 하고 있을 거 같아요?
질문의 의도랑 다를 수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가서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시기는 30대 중반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20대엔 제가 할 수 있는 경험을 하고 그걸 토대로 30대 중반에 전문적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참을 뜸 들이다가) 쪼끔 허무맹랑한 소리 같을 수 있는데, 저는 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라는 사람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가 더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최종적으로는 강연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필요한 게, 다양한 경험이랑 학습 콘텐츠도 있고, 강연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 같은 거겠죠? 그런 것들이 삼십 대 중반 정도에 준비가 돼서 강연 쪽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일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저 나이가 많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제가 가진 걸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제가 가진 걸 혼자만 갖고 있지 않고 책으로 내고, 강연도 하고,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조금 철학적인 질문인데,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이상적인 기준이 있어요
큰 성공, 부와 명예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보단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 그리고 고민을 털어놓고 얘기할만한 사람? 이 되고 싶어요. 그런 사람이 진짜 어른이라 생각하거든요. 근데 어떻게 보면 이 기준이 뚜렷하지 않잖아요? 만약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해도 사는 내내 그런 모습일 거란 보장도 없고, 내면의 모습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지만 저는 그런 모습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승빈 씨는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승빈 씨는 이미 어른이 돼있었다. 운동을 그만두는 많은 후배들이 승빈 씨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기 때문이다. 다른 선배들도 많은데, 왜 특별히 '승빈 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까? 그건 승빈 씨가 어른이기 때문일 것이다. 승빈 씨만 본인이 어른이 됐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마치며>


제가 이 인터뷰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많이 고민했어요.


승빈 씨가 인터뷰 섭외 단계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인터뷰 취지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었는데, 본인은 아직 길을 정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승빈 씨는 이제 막 모험을 시작한 탐험가 같았다. 축구를 그만두고, 학교 공부를 하면서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니고, 영상을 찍었다. 아직 구체적인 진로를 정하지 않고 이것저것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승빈 씨 인터뷰는, 현재 이야기보다는 축구를 했던 시절 이야기로 많이 흘렀다. 
사실 나도 승빈 씨의 인터뷰를 진행할지 말지 고민했었다. 아직 길을 탐색하는 단계에 있는 승빈 씨가, 미래에도 계속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거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빈 씨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은 본인이 개척하는 길을 가겠구나.'
왜냐면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길을 선택하는 기준이 주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대하던 부모님을 설득해 축구를 하고, 축구가 본인의 길이 아니란 생각이 들 때 그만두고, 돈을 벌어 해외여행을 다니고, 신춘문예에 본인의 시를 내보는 여러 선택들. 승빈 씨는 인생 모든 선택을 주체적으로 해나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있는 방향 키는 확실히 잡혀있었다. 본인이 좋아하는, 그리고 잘하는 길을 선택하려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승빈 씨는 본인이 인터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인터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승빈 씨는 지금 본인의 형태가 갖춰지지 않아 불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미래에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승빈 씨가 찍은 사진과 쓴 글을 소개하며 이 인터뷰를 마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한 편의 시(詩) 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당신도 쉽게 흔들리고 볼품없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글자들이 모여 계절을 만들고 그리움을 만드는 그런 시 한 편일 것이다.



                                                                                  새로운 길이 계속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2018.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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