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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규 Jul 28. 2018

[서평] 17세 소년의 성장소설 <그해, 여름 손님>

<그해, 여름 손님> 책리뷰 : 소년, 조금 색다른 운명을 만나다

[서평] 17세 소년의 조금 특별한 성장소설 <그해, 여름 손님>

<그해, 여름 손님> 북리뷰 : 소년, 조금 색다른 운명을 만나다


* 이 글은 이동규 작가가 시민기자 자격으로 언론사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글의 원본입니다.

http://omn.kr/qxb3


책 표지 (출처 : 잔 출판사)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위대함

    

문학 용어 중에 ‘시점’이라는 것이 있다. 작품이 누구의 관점에 의해 어떤 깊이로 서술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다. 정규 교과과정을 거치면 누구나 문학 기법으로서 시점을 배운다. 그리고 각 시점이 갖고 있는 나름의 효능도 공부한다. 그 중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효과는 일반적으로 '서술자의 내면과 생각을 독자에게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식으로 배운다.


이 책은 17세 소년인 서술자가 <그해, 여름 손님>으로 만났던 24세의 성인 남자 올리버와의 관계에 대해 시종일관 자신의 관점으로 서술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동성애 소설이다. 동성애는 타부, 즉 사회의 금기다. 금기인 만큼 동성애를 경험해본 이도, 경험 중인 이도 많지 않다. 그래서 소수의 동성애 얘기는 다수의 이성애자들 입장에서 크든 적든 불편할 수밖에 없다.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책 <그해, 여름 손님>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무기 삼아 동성애에 관한 세간의 편견을 정면 돌파하려고 시도한다. 소설 속에서 서술의 주체가 17세 남아(男兒)가 아니라 사춘기를 겪는 소녀라고 바꿔서 생각해보면, 문장 문장마다 그렇게 주인공이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인격체처럼 느껴질 수가 없다. 17세 남자아이 엘리오는 본인 스스로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을 가감 없는 문장들로 쉴 새 없이 토해낸다. 이 소설 안에는 나름대로 서사도 있고 플롯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엘리오의 1인 독백극이나 다름없다. 엘리오는 감정이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대로, 생각이 정리되면 정리 되는대로, 그리고 또 마음이 바뀌고 관념이 새로워지면 그것대로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솔직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문장으로 털어놓는다.


이렇게 솔직담백한 문장들을 경독(傾讀)해나가다 보면, 웬만큼 극단적인 反동성애자가 아닌 이상 엘리오의 비정상적인 사랑을 조금은 정상적인 사랑으로 용인해줄 여지가 충만해진다. 엘리오는, 그리고 작가는, 독자에게 이 해프닝을 이해해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 소설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문장들은 오로지 엘리오 본인만의 심리와 사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설득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읽다보면 문득 머리를 긁적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동성애든 이성애든 결국 ‘사랑(愛)’의 감정이라는 점은 별반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네.”


문학 기법으로서 ‘시점’이 소설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면, 그리고 반드시 1인칭 주인공 시점이어야만 그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일종의 작법상 ‘이데아(Idea)’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일 것이다. 이 소설은 시점 덕분에 읽는 이들에게 불편함을 덜어준다. 그리고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진 독자는 잠시간 죄의식을 가졌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엘리오의 스토리에 상대적으로 호감을 갖게 된다. 세뇌는 덤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출처 : SONY Pictures)


"하지만 나는 두려움이 좋았다. 정말로 두려움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조상들은 내가 두려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두려움의 밑면이었다. 양털은 배 부분이 가장 부드러운 것처럼, 나를 밀어붙이는 대담함이 좋았다."(163p/308p)     


"난생 처음으로 어딘지 무척 소중한 곳에 도착한 느낌, 이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원히 나이기를 바라는 느낌, 두 팔이 후들거릴 때마다 완전히 낯설지만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닌 무언가를 찾은 듯한 느낌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170p/308P)     



사랑과 우정 사이의 성장일기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은 이전에도 많았다. 앞으로도 넘쳐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여름 손님>에는 기왕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엘리오 스스로도 자신이 겪은 올리버와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기가 겪는 일련의 혼란스러움을 억지스럽게 자신의 성정체성 문제나 사회 속 성소수자들의 인권 문제와도 결부시키지 않는다. 이 소설은 결코 거대담론을 다루지 않는다. 철저히 미시적인 사항들을 해부하듯 펼쳐놓는다. 엘리오는 철저할 정도로 시간의 흐름에 맞춰 ‘현재의 자신’만을 노래한다. 그 노래에는 독자에 대한 강요도 없고,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도 없다. 엘리오는 불특정 다수의 동성애 상대로서 올리버를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올리버이기 때문에 이처럼 기괴하고 생경한, 그래서 일생일대의 유일한 해프닝을 겪고 있다고 의아해하는 편에 가깝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난 이 소설을 '게이 소설'류(類)나 '퀴어 소설(Queer물)'류로 분류하는 견해에 반대한다.(마찬가지로 이 소설을 영화화한 <콜미바이유어네임(Call Me by Your Name)> 역시 퀴어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소재가 조금 독특한 '성장 소설'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해석일 듯하다. 엘리오는 자신이 “그해, 여름”에 겪었던 사건의 ‘특별함’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어본다. 엘리오는 그 ‘특별함’을 간혹 우정으로도 이해했다가, 간혹 사랑으로도 이해하면서 ‘매년 여름’을 견디어 나간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매시간 매분 매초 단위로 나이를 갱신해가는 엘리오의 성장 일지를 읽으면서 독자 역시 다소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것이 애당초 그런 성격이지 않은가. 성장은 변화다. 변하는 대상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힘들다. 살다보면 가끔 그러한 것들이 있다.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고 그것을 그냥 그 자체로 인정해야만 비로소 겨우 그것의 존재 가치가 느껴지는 것들 말이다. 엘리오는 자신의 사연을 이용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중일지도 모른다. 흡사 릴케가 <인생>이란 시를 통해 말했던 것과 같이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이기에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맞이하라”고.


우리는 어쩌면 엘리오의 사랑을 제 아무리 정의하려고 해도 결국 실패할지 모른다. 우리는 그저 “길을 걷는 아이처럼” 엘리오가 읊조리는 성장기를 “흩날려오는 꽃잎”마냥 “선물로 받아들이”면 그뿐일지도 모를 일이다. 판단을 유보하는 것의 미학. 이 소설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두 번째 매력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출처 : SONY Pictures)


“앞으로 아주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 두려워하지 마라. …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도 모르지. …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있으면 끄지 말고 잔혹하게 대하지 마라. … 순리를 거슬러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결핍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할 때 줄 것이 별로 없어져 버려. 무엇도 느끼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야.”(273~274p/308p)      



서로가 바꿔 부른 이름그것은 그 해 여름 지지 않을 태양이 되었다     


<그해, 여름 손님>은 국내 번역본의 제목이고, 이 소설의 원래 영어 제목은 <콜미바이유어네임(Call Me by Your Name>이다. 실제로 소설을 읽다보면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라는 주문이 자주 등장한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징표나 상징과 같은 행위이다. 굳이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특정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이름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부연할 나위가 없으리라. 하물며 이름을 새로 만들어서 붙여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하던 본인의 이름을 상대에게 선물하는 행위는 상대방을 내 몸만큼 영원히 아끼겠다는 서약이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서로의 진심을 깨닫고 둘 모두 더 이상 진심으로부터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 해, 여름> 밤, 엘리오와 올리버는 침대 위에서 서로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서약을 처음으로 완성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들의 서약은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빛처럼 각자의 가슴에 깊고 선명하게 각인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찬란한 순간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주저 없이 이 대목을 꼽고 싶다. 


이전 판 책 표지 (출처 : 잔 출판사)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엘리오의 혼란은 어떻게 정리될까? 그들이 세공한 오렌지 빛 서약서는 매년 여름이 저물어도 ‘지지 않을 태양’처럼 그들을 하나로 묶어둘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이 함께일 수 없다면 그때는 그들이 서로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엘리오 입장에서 올리버를 알게 된 순간은 자신의 삶을 그 이전과 이후로 경계 짓게 만드는 일대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올리버 때문에 엘리오의 삶은 결이 달라졌고, 층위가 변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끝까지 감내한 독자들도 일대 인식의 변혁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동성애도 한낱 이성애만큼이나 굉장히 우연적이고 불가항력적이지만 그만큼 자연스러운 감정에 불과하다는 인식, 그것이 이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특별한 메시지가 아닐까. 화창한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에서 태양 빛을 쬐며 엘리오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만 같다. “이상한 것이 아냐. 조금 다른, 운명일 뿐이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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