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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JINism Jul 28. 2016

절대 현혹되지 마라 哭聲.

영화 곡성에 대한 다른 시점.

 안녕하세요? 무진군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글을 쓰게 만든 영화 곡성에 대해서 리뷰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뒤늦은 리뷰이지만, 영화를 관람하신 분들이 아니라면, 추천하지 않는 리뷰입니다. 영화를 보시고 이런 시선이 있구나.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진군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고 VOD로 시청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면비가 잘려 여러 요소들을 아우르지는 못한 점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 리뷰에 쓰인 모든 스크린 샷은 Daum영화에서 영화사가 제공한 캡처 사진을 사용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이글의 모든 사진 저작권은 제작사와 제작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나홍진 감독의 이야기였던 곡성은 "가족영화"다 에서 출발한 영화 리뷰입니다.

사실 제 리뷰가 나홍진 감독의 생각과 얼마나 같은지는 잘 모르겠네요. 혹 나홍진 감독님이 읽는다면, 좋긴 하겠군요....:)








이제 영화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저 역시 미끼를 물었습니다." 당연히, 이렇게 모니터를 마주하고 글을 써내려 가는 것 자체가, 미끼를 문 것 이겠죠. 나홍진 감독은 알려진 영화로는 추격자, 황해를 거쳐 곡성까지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나홍진 감독의 영화는 처음입니다. 추격자도 황해도 주변에서 말리는 분들이 많았고, (아마도 저의 성향이나 감상의 포인트가 좋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어쩌다 보니 다 지나가 버려서 곡성이 되어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영화의 시놉시스부터 보겠습니다.


시놉시스는

낯선 외지인이 나타난 후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사건들로 마을이 발칵 뒤집힌다.
경찰은 집단 야생 버섯 중독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리지만
모든 사건의 원인이 그 외지인 때문이라는 소문과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경찰 ‘종구’(곽도원)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여인 ‘무명’(천우희)을 만나면서
외지인에 대한 소문을 확신하기 시작한다.
딸 ‘효진’이 피해자들과 비슷한 증상으로 아파오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종구’.
외지인을 찾아 난동을 부리고, 무속인 ‘일광’(황정민)을 불러들이는데...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여러 가지 감독의 장치인 시놉시스와 그리고 영화의 첫머리에 나온 내용입니다.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감독의 치밀한 계산 안에 있는 홍보와 영화의 제작. 그리고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포스터로 시작된 카피는 "현혹되지 마라"라고 해서 4인의 개인 포스터가 존재합니다.

일단 이 작품이 되는 주인공의 4인입니다. 이 4명이 이야기하는 내용에 "현혹되지 마라" 일수도 있지만,
이 4인의 인물이 만들어 가는 내용에 "현혹되지 마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관객은 미끼를 물게 되어있습니다. 곡성이 시작하면서 성경 글귀가 하나 나옵니다.  영화의 첫 문장이자 첫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손과 내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복음 24장 37-39절


 이 장치는 참 아이러니한 장치입니다. 실제 곡성에서도 마지막 외지인의 "나를 만져 보아라"라는 장면에서 재 반복이 되지만, 악마의 속임, 기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나홍진 감독의 관객에 대한 속임과 기만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의아해하실 수 있는 분들이 많을 거라 여겨집니다. 첫 번째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에 포스터에서 감독은 신신당부를 합니다. "현혹되지 마라"라고, 시작과 동시에 "나는 너희에게 의심을 주겠다. 이 영화는 오컬트적인 공포 영화 인가? 현실을 반영한 지옥도인가?"입니다.


 사실 보는 동안 내내 무진군도 귀신의 존재와 신의 믿음 무당의 존재와 우리나라의 민간신앙, 일본의 전설, 설화, 기타 등등의 오컬트 적인 요소를 보는 재미에 푹 빠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재미있네 라던 찰나 종구의 "아빠 경찰인걸.. 아빠가가 잘 해결할껴.. 아빠가.. "라는 독백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시점부터 이 영화의 새로운 공포는 시작됩니다. 무명이 누구 편이냐. 일광이 누구 편이냐. 외지인이 무엇이었냐?라는 부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감독은 "공포" 물로의 충실한 연출과 요소 그리고 소재들을 배치하여 현혹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포 영화의 기본으로 보면 큰 차이 없이 재미나게 볼 수 있는 영화 입니다만.... 마지막의 종구의  대사는 다시 공포영화를 시작하게 만드는 영화 곡성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해외에서도 분명 이런 공포를 느끼는 분들도 계실 거라 생각하고 국내 관객 분들도 충분히 느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은 영화 중반에 빠져 있는 관객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뭐시 중허냐구 도데체가 뭐시 중허냐구!!! 뭐시!!!.... 뭐시!! 글케 중허녀고..!!!!! 뭐시 중헌지도 모르면서... 자꾸 캐묻고 지랄이여.. 지랄이.."...


뭣이 중할까요? 나홍진 감독이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영화 곡성은 공포의 시작을 "실제 사건"처럼 시작합니다. 현혹되지 마라 라는 포스터를 보고 기만의 장치로 성경의 예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무진군이 보고 있는 영화의 시선, 감독의 시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컬트 적인 요소는 감독의 장치라 생각합니다. "(오컬트에) 현혹되지 마라"입니다. 그럼 공포/심령물 같은 이 곡성이 뭐시 중허냐고?!?!?!!!! 라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가 후반부에 새로 시작되는 공포를 관객에게 던져 줍니다. 그로 인해, 열린 결말도 아닌 참 명확하고 씁쓸한 결말을 던져 줍니다... 어찌 보면, 저의 리뷰가 망상에 의한 곡성의 각색으로 보여 지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과감히 수술을 단행하여, 오컬트 적인 요소를 전부 배제한 상황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오컬트적인 요소가 사실이냐? 아니냐? 오컬트를 빼버리면, 이 영화가 뭐가 남나? 공포영화에 무슨 리얼리즘이냐? 등등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여태까지, 나홍진 감독의 영화는 사실에 있었던 "범죄"에 기반한다는 사실입니다..(문론 이것이 리얼리즘이나, 르포르타주, 혹은 다큐적인 요소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홍진 감독은 그 요소를 잘 섞어 내어 물음을 던지는 감독입니다.)


 이미 이 정도 이야기에서 제 리뷰의 방향을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제 진짜 곡성이 시작됩니다.



"곡성"의 사전적 의미는 곡소리입니다. 영화에서는 슬픔에 울부짖는 피해자의 울음 섞인 소리입니다.. 왜 제목이 곡성인지.. 마지막 장면에서 그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가족이자 피해자입니다.)을 위해 소리를 내어 곡을 해주는 사람이 무명밖에는 없습니다. 이미 다 죽었기 때문이지요. 죽음이란 소재가 어떤 표현일까 떠올려 봅니다.


저주라는 것은 어느 순간, 마른하늘의 날벼락입니다.
내가 원하던 원치 않았던,
저주 같은 범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 듯 피의자를 만나는 순간
피해자는 피해를 얻습니다.
그것이 그 어떤 이유와 상관없이....


 영화 곡성에서 사용하는 저주의 개념은 "성폭행(범죄)" 혹은 "성적 관계(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가족)에 의한 붕괴"입니다. 무진군은 곡성을  법정 드라마라고 보고 있습니다. 첫 사건은 치정사건으로 치부됩니다. 누군가가 바람을 피웠지요. 뒤에 나오지만 이방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성병을 얻게 됩니다.(영화에서 성병은 저주라는 오컬트적인 저주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그 이후에 저주처럼 계속 이방인에서 여성, 여성에서 다시 그 주변의 남성에게 저주가 전염되어 갑니다.


 성적관계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을 하자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라던가, 성범죄가 아닌 부적절한 관계로 시작 되어도, 실제 고통은 가장 가까운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뻗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잠시 영화 내 표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영화 내에서 저주의 실체는 성병에 대한 것입니다. 저주란 표현으로 쓰여진 성병은 그만큼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염을 시킵니다. 분명 저주의 전이 자체가 성적관계에 의한 전이가 발생합니다. 영화상의 저주(성병)의 대상과 가족을 몰살시키는 그 피해자가 남자이나, 혹은 여자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옮게 되니까요.(*실제로 영화상에서 처음 나오는 사건 이전에도 있었다. 라고 나옵니다.)




 영화상의 내용이 아닌 무진군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주(위의 기술한 성병)는 피해자라는 낙인이자, 가족을 포함한 가까운 피해자의 지인이 겪는 고통입니다. 영화상에서 표현된 그 저주 대상자(범죄 피해자)로 행해진는 가족의 살해는, 피해자와 그 피해자 주변인들의 무지, 혹은 그릇된 해결방법에 의한 피해자의 2차 혹은 3차 피해에 대한 피해자가족의 정신적인 붕괴가 죽음으로 표현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범죄의 피해자와 가족 혹은 가까운 이의 고통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진군이 생각하는 4명의 인물은 다음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포스터 대로 4인에게 현혹되지 않으려 무진군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을 현혹중입니다.)


*주>법정 드라마라는 것을 근거로한 등장인물의 역할입니다.


 종구 : 경찰이며, 성폭행 피해자인 "효진"의 가족

 일광 : 검찰

 외지인 : 검찰의 선배(이것은 둘의 카메라에 대한 집착에서도 연결됩니다.)

 무명 : 증인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비약 같지요?


 효진이가 피해를 당했는지 의심을 할때 효진이는 이렇게 합니다. "뭐시 중허냐고!!!!" 저주에 대한 의심이 아닌, 실제 사건을 마주하라는 외침이겠죠.


 그날밤 종구는 효진이가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압니다.
 영화에서는 저주에 걸려 악마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 딸로 보이지만, 사실은 효진이의 노트에 그려진 그림들은 성폭행 피해에 대하여 그려져 있습니다.(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전형적인 그림입니다.) 하지만, 종구는 이러한 딸의 행동을 성범죄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아마도 자신의 아이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 생각하기보다. 귀신 들렸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종구의 분노는 딸에게 몹쓸 짓을 한 외지인에 대해 단죄를 하고 싶어 합니다. 영화 내에서는 일단은 오컬트적인 요소로 단죄를 하려 합니다. 경찰이기도 하고.. 자신의 딸이 피해자가 된 것에 대해 무능한(영화 내에서는 무능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특히 성범죄에 대해서는 자신의 가족임에도 더욱 무지하게 나오죠. 그것이 저주라고 생각하고..) 경찰 아빠로서의 모습이 보입니다. 일광굿을 할때 효진이의 고통은 재판에 앞선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증언 같아 보입니다. 그때 외지인도 굿을 하지요? 재판 준비일 수도 있고 1차 공판중의 자기변호와 범죄의 부정에 대한 클리세로 보여 집니다. 


 일단 일광은 "나만 믿어"로 피해자 가족을 안심시킵니다. 반드시 단죄를 할 수 있으니..(영화상으로는 "살을 날린다"라고 하죠) 증거 수집하고 모두 도와 달라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듯 굿으로 표현된 첫 번째 공판은 상처만 남깁니다. 피해자 역시 큰 상처를 입었고, 피해자 가족들도 많은 상처를 입게 되지요. 아마도 집행유예?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범죄의 단죄가 생각한 것 만큼은 아니 듯 말이죠. (모든 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은 그 범죄에 대한 2차 피해를 양산하게 합니다. 더군다나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소문도 나게 되고요. 2,3,4차 피해를 따지면 끔찍할 정도입니다.)


 결국 종구는 스스로 단죄를 하러 갑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보는 사람(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냥 무능한 경찰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집단 린치를 통해 단죄를 하러 올라간 것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종구는 법을 앞선 개인의 "복수로 피의자를 단죄했다" 생각하게 됩니다.


 2차 전이 열리는 것이 바로 영화의 종반부 입니다. 하지만 피의자인 외지인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게다가 일광은 검찰 역할을 하지만, 외지인의 후배(영화상에서는 같은 문파)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의 행동의 동일성에서 보여집니다.(사진을 촬영하는 행위)


 이미 피의자 편에 서버린 검찰인 일광일행과 이사건에 대해 어떠한 것도 할수 없었던 답답한 경찰 아빠는 피의자인 외지인을 개인적으로 단죄하려던 시도로 인해 법정공방이 더욱 피해자에게 불리해 지고 상처를 안기고 있음을 판사인 "관객"에게 나홍진 감독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화내에서 종구의 "그놈이 왜 도데체 뭐 땜시 이러는 것인지?"라는 질문에 무명은"니딸의 에비가 죄를 졌어"로 답합니다. 종구의 그릇된 시도로 불리한 법정상황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영화 곡성에서는 오컬트의 내용을 "힘&권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바라보는 시점에서도, 많은 분들이 리뷰를 하였던 글에서도 무명의 "힘"은 진실의 힘(이자 증언)이겠지만, 그 역시 피해자 가족의 의심으로 인해 부정됨으로써 힘을 갖지 못 합니다. 피해자가 부정하는 증인은 아무리 유리한 증언을 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겠죠. 또한 종구가 의심으로 피의자의 린치 등으로 저지른 것이 너무 커서 재판이 기울고 있음을 보입니다.



 연쇄 성폭행 사건의 중요한 증인인 무명은 많은 증언을 하게 됩니다. 종구와 다른 경찰은 그 증언을  무시하며, "미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것이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장면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꼬이고 영화상에서도 오컬트 적인 상황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여기서 그렇다면, 종구 가족 전의  다른 피해자는 법정 상황으로 생각이 되지않느냐라는 의문이 생기지만, 폐쇄적인 지역이기에 쉬쉬하며, 비슷한 범죄가 계속 있었다는 설정이 영화중에도 나옵니다. 이런 패턴은 앞서  현실에서 기사로 접해 보았습니다.(오지 마을, 섬... 기타 등등의 사건 말이죠.) 검사(영화에서는 무당)는 그 사건을 해결 할 수 있지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피해자가 나고, 효진이 바로 이전의 아주머니 사건부터 수사(영화에서는 굿판)를 시작하게 됩니다.




 극 중 효진이는 어른스럽고 여성스러운 아이입니다. 이아이가 그렇게 변해 버릴 정도의 고통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 법정 드라마의 장르였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이 가해 졌을까요? 마치 일광의 굿판에서 고통받듯, 계속 진술을 하고 또 했어야 했을 겁니다.


 종구의 마지막 대사는 공권력(영화에서는 오컬트적인 힘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일반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힘)의 일원이지만, 검찰보다 낮은 경찰이기도 하고, 그 역시 증인에 대한 의심으로 모든 것을 망쳐 버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아버지가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일가족의 고통과 피해자의 고통은 승소(구원)하지 못하게 됩니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참아야혀" 이것은 아마도,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대법원까지 3번의 상고를 뜻하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는 마지막 닭의 울음소리 전에 종구는 발길을 돌리고 포기(상고포기)를 해버립니다. 마지막까지 참더라도 이미 종구의 가족은 종구를 제외하고, 효진에게 살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고를 했다면, 법적 심판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피해자가 피해를 당한 기억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기도 합니다. (피고가 종신형이든 사형을 받든 피해자는 그 피해를 받은 이전으로 돌아갈수 없음은 사실이니까요)


 상처뿐인 법정 공방과 진술 진행에 의한 가족들의 상처이기도 때문입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느끼게 되는 가족의 정신적 상처와 붕괴 그리고, 고통이 바로 저주인 것 입니다. 2번(닭울음소리의 횟수)의 법정 공방은 당연히 피해자에겐 지옥과 같았을 겁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종구의 혼잣말이 더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위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공포의 시작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회에 많은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저주처럼 어느 순간에 갑자기 닥쳐 피해 입은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가족들은 그 피해자의 고통을 나누고 황폐해져 갑니다. 오히려 정신과 감정의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의 종구의 대사는 "아빠 경찰인걸.. 아빠가가 잘 해결할껴.. 아빠가.. " 그냥 피해가족의 평범한 아빠, 그 아빠의 되뇌임 혹은 입장이기도 합니다. 종구가 눈을 감기 전에 행복했던 딸아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도, 더 이상은 그런 추억을 떠올릴 수 없는 가족의 붕괴 역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독백이 오컬트 적으로 볼 때의 의 해결 또는 현실의 범죄를 잘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을 그르치게 된 자신에 대한 후회 섞인 독백이기도 합니다. 나홍진 감독은 추격자에서 "살인과 성폭력"에 대한 범죄의 요소를 배치시키곤 했는데, 곡성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가 해결의 과정 중에 피해자 가족이 상처 입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모든 범죄는 피해자가 절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된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영화의 공포는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삶에 다시 한 번 공포를 심어 줍니다. 범죄사건 이후의 가족과 지인 그리고 피해자가 겪을 공포. 이 공포의 해결이 나홍진 감독의 물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물음을 갖게 하는 것이 영화곡성의 "미끼를 물었다" 가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범죄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2차피해를 극복할 수 있는 지원을 마련 하는 사회가 되길 빌며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아마도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 곡성에서의 진짜 귀신이자 저주가
마른하늘에 날벼락 처럼 범죄에 놓인 피해자와
그 피해자 가족이 겪게 되는 현실이 귀신이자 저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뱀꼬리 : 나홍진 감독은 황해 이후에 가족을 잃으며, 곡성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마치 갑자기 잃게 되는 가족과 지인. 그들을 잃게 된 다는 공포. 사실 나홍진 감독이 겪으신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고 다른 의미로서의 범죄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이야기는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나홍진 감독의 특기인 범죄물로서의 이야기진행이었겠징요.)


영화 '황해' 개봉이 끝나고 얼마 뒤에 나홍진  감독의 가까운 가족이 유명을 달리했다.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충격을 받은 나 감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그 이유가 이야기로 확장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곡성'이다.  - 뉴스토마토 인터뷰 중




 글머리에 있었던

곡성은 가족영화다.



을 다시 한 번 새겨 보며 무진군 나름의 진의를 생각해 봅니다.



뱀꼬리2 : 자주 브런치에 글을 못써 구독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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