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감성, <좀비딸>
지난여름, 필감성 감독의 <좀비딸>이 개봉했을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아빠, 우리 저 영화 같이 보러 가자.”
나는 포스터 속 조정석의 코믹한 표정을 흘깃 보고는, 그저 그런 ‘조정석 표 오락영화’겠거니 지레짐작했다.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보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며칠이 지나갔다.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미뤄왔지만, 실은 뻔한 코미디 영화를 굳이 극장에까지 가서 봐야 할까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어느 날, 딸아이가 혼자 극장에 다녀왔다.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온 아이는 “펑펑 울면서 봤는데 진짜 재미있었다”라고 했다. 그제야 덜컥 미안함과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저 가벼운 좀비 코미디가 어떻게 열일곱 살 아이를 울렸을까.
그렇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던 영화를 뒤늦게 OTT를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 나는 딸이 왜 그토록 이 영화를 아빠와 함께 보고 싶어 했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딸들이 아버지에게 간절히 듣고 싶은 ‘어떤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을 찾기 위해 화면을 응시하다가 나는 기이한 역설을 목격했다. 좀비가 된 딸이 아버지를 물어뜯으려 덤벼드는 살벌한 장면에서 나 역시 비명 대신 웃음을 터뜨리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반응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나는 이 영화가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환부인 ‘혐오’와 ‘각자도생’의 정서를 정확히 건드리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독제로서 ‘아버지’라는 잊힌 판타지를 소환했기 때문이라 본다. <좀비딸>은 좀비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배제’의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 시대에 도착한, 가장 따뜻하고 급진적인 가족 드라마다.
‘타자’에서 ‘우리’로의 전복
영화 역사상 괴물, 특히 ‘좀비’는 당대의 집단적 무의식이 투영된 거울이었다. 시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에 따라 좀비의 얼굴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조지 로메로의 <새벽의 저주>(1978) 속 쇼핑몰을 배회하는 느릿한 좀비들이 자본주의에 영혼을 잠식당한 ‘무기력한 소비자’를 은유했다면, 21세기를 연 대니 보일의 <28일 후>(2002) 속 질주하는 좀비들은 통제 불능의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현대인을 상징했다. 한국형 좀비물의 효시인 <부산행>(2016)에 이르러 좀비는 신자유주의라는 폭주 기관차에 탑승한, 짓밟지 않으면 내가 죽는 ‘무한 경쟁자’의 형상을 띠었다. 이 모든 계보 속에서 좀비는 언제나 척결하거나, 도망쳐야 하거나, 격리해야 할 외부의 적, 즉 ‘그들’이었다.
그러나 <좀비딸>은 이 오래된 장르의 전제를 전복시킨다. 딸 수아(최유리 분)가 좀비가 되는 순간, 괴물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가족, 즉 ‘우리’가 된다. 여기서 좀비라는 설정은 더 이상 생물학적 감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입시 실패, 취업난, 혹은 사회 부적응으로 인해 방 안에 틀어박힌 ‘은둔형 외톨이’나, 사회적 기준의 범주에서 미끄러져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청년 세대의 자화상이다.
사회는 이들을 향해 “쓸모없다”, “위험하다”, “격리해야 한다”며 ‘사회적 사망 선고’를 내린다. 영화 속 좀비 바이러스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이 사회적 시선이다. 관객들이 수아에게 자신들의 감정을 이입하는 이유는, 누구라도 한 번 미끄러지면 ‘좀비(비정상)’ 취급을 받고 사회에서 삭제당할 수 있다는 현실적 공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쟁과 희생을 넘어 ‘돌봄’으로
괴물의 성격이 ‘외부의 적’에서 ‘아픈 가족’으로 변화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는 아버지의 태도 역시 진화한다. <좀비딸>의 이정환(조정석 분)이 보여주는 부성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앞선 시대를 풍미했던 두 명의 ‘재난 영화 속 아버지’를 소환해 보자.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속 강두(송강호 분)는 어리숙하고 무능력하다. 그러나 딸 현서가 괴물에게 납치되었을 때, 그는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맞서 맨몸으로 부딪친다. 강두의 부성애는 ‘투쟁’이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처절할지언정 시스템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딸을 구하지 못했다. 이는 2000년대 한국 사회가 느꼈던,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개인의 비극과 무력감을 상징했다.
10년 뒤, <부산행>(2016)의 석우(공유 분)는 유능한 펀드매니저이지만 이기적인 가장이다. 그는 좀비 떼라는 재난 속에서 딸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자신을 좀비에게 내어주며 딸을 지킨다. 석우의 부성애는 ‘희생’이다.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 된 2010년대에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선택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미래 세대를 생존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좀비딸>의 정환은 강두처럼 시스템에 화염병을 던지지도, 석우처럼 비장하게 열차에서 뛰어내리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좀비가 된 딸에게 밥을 먹이고, 피 묻은 입가를 닦아주며 양치를 시킨다. 춤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좀비의 몸짓을 춤 동작으로 승화시킨다.
정환이 선택한 것은 거창한 투쟁이나 희생이 아닌 ‘돌봄’과 ‘일상의 복원’이다. 그는 딸을 위해 죽는 영웅이 아니라, 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보여준다. “죽지 마라” 혹은 “복수해라”가 아니라 “밥은 먹었냐”, “씻고 자라”고 말하는 아버지. 이것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원하는 성숙하고 현실적인 어른의 태도다.
혈연의 신화를 넘어선 자발적 연대
여기서 정환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특수성에 주목해 보자. 사실 그는 수아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누나의 죽음 이후 조카를 맡아 키운 ‘삼촌’이다. 이 설정은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좀비딸>이 제시하는 가족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확장시키는 결정적인 장치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성애는 혈연에 기반한 천륜이자 의무였다. 하지만 삼촌 정환에게 수아는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운명이 아니다. 그는 도망칠 수 있었고, 포기할 명분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수아의 아버지가 되기를 선택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돌봄은 ‘핏줄의 당위’가 아니라, 약자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선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사라지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대한 은유이자 혈연 중심의 정상 가족 신화가 붕괴된 자리에 피어난 ‘대안 가족’의 가능성이다. 정환의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결심이다. 그렇기에 좀비가 되어 사회적으로 타자화된 조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더욱 숭고한 사회적 연대로 읽힌다. 그는 ‘낳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기르는 아버지’로서 혐오의 시대에 필요한 진짜 어른의 자격을 획득한다.
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방식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정환이 딸을 ‘교정’하려 들지 않고 ‘수용’할 때 발생한다. 보통의 좀비 영화라면 백신을 찾기 위해 질주하거나 딸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억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환은 “좀비면 어때, 내 딸인데”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이는 혐오의 시대에 대한 명백한 반기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상 가족’, ‘정상적인 삶의 궤적’에서 벗어난 이들을 혐오한다. 자신의 신념이나 이익에 반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며 이웃들은 “집값 떨어진다”, “불안하다”며 배제를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정환은 온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친다.
특히 정환이 딸에게 밥을 떠먹이는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딸을 괴물로 보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비록 네가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해도 나에게는 여전히 존엄한 존재라는 선언이다. 이 지점에서 <좀비딸>은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돌봄의 윤리’를 설파하는 휴먼 드라마로 확장된다.
이 연대는 담장 밖으로도 확장된다. 정환의 죽마고우 ‘동배(윤경호 분)’와 첫사랑 ‘연화(조여정 분)’의 존재는 이 영화가 가족주의에만 함몰되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균형추다. 이들은 가족과 타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좀비가 된 수아를 보고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지만 결국 신고 대신 침묵과 조력을 택한다. 동배가 보여주는 우직한 우정과 연화가 보여주는 포용력은 우리 사회의 이웃들이 혐오 대신 공존을 선택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즉, 할머니 ‘밤순(이정은 분)’과 고양이 ‘애용’이 가족 내부의 연대를 상징한다면, 동배와 연화는 혈연을 넘어 공동체로 확장되는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정환의 투쟁은 고립된 섬에 머물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마을’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마지막 방공호
영화의 결말을 두고 원작 웹툰의 냉소적인 현실 인식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원작이 결국 좀비 딸과 헤어지는 씁쓸함을 통해 현실의 냉혹함을 강조했다면, 영화는 다소 판타지에 가까운 해피엔딩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비현실적인’ 결말을 지지한다. 지금 관객들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현실 인식이 아니라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한 줌의 위로이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자식이 조금만 경로를 이탈해도 비난하거나 “너 때문에 못 산다”며 방치하는 어른들이 넘쳐난다. ‘실패하면 끝’이라는 공포가 청춘들을 잠식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괴물이 된 자식조차 품어주는 아버지,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밥을 먹여주는 어른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강력한 판타지다.
영화가 끝난 후, 텅 빈 극장에 앉아 혼자 울었을 딸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이는 그날 극장에서 정환을 보며 누구를 생각했을까. 어쩌면 아이는 “네가 좀비가 되어도, 네가 실패하거나 넘어져도 아빠는 널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는 그 한마디 확인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뻔하지만 간절한 약속을 함께 앉아 확인해 주지 못한 내 무심함이 뼈아팠다.
<좀비딸>은 좀비가 나오는 공포 영화가 아니다. 혐오와 각자도생이 상식이 된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아버지’라는 이름의 마지막 방공호를 복원한 영화다. 비록 영화 한 편 같이 봐주지 못한 부족한 아비일지라도, 내 딸이 세상의 이빨에 물어뜯기는 날이 온다면 나 역시 정환처럼 기꺼이 바보가 되어 딸을 끌어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내게 그런 뒤늦은, 그러나 단단한 다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