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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Apr 22. 2020

유기견과 전원주택은 처음이라

바람부는 날의 산책

사흘째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건. 우리 집뿐만 아니라 이웃집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보면서 바람의 세기를 가늠한다. 산책을 갈까, 말까? 이렇게 망설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지난 목요일에 다친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다른 하나는 바람이 심상치 않아서. 섬이라서 바람이 더 심하게 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람이 세차다. 

대박이


발목을 다친 뒤,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발목을 접지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복숭아뼈 주위가 두툼하게 부어올랐고, 주변에 퍼렇게 멍이 들었다. 걸을 때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지만, 계단을 내려갈 때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인상을 쓰게 된다. 자칫 무리를 하면 덧날 것 같아서 조심하고 있었다. 


발목을 다친 건, 지난 목요일, 산책길에서였다. 대박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내 탓이다. 그러고 보니 그 날도 바람이 불었다.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머리에서 모자가 벗겨져 나갈 정도였다. 모자는 풀숲 바로 앞에 떨어져 금방 주울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내 입이 방정이었다. 모자가 벗겨져 풀숲에 떨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어머! 


그 소리에 내 앞에서 여유롭게 냄새를 맡고 있던 대박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박이는 펄쩍 뛰어오르며 도망치려고 했는데 힘이 어찌나 센지 나는 개줄을 손에 쥔 채 왼쪽 발목을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파... 발목이 너무나 아팠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 있을 정도로. 대박이가 내 옆에서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박이가 겁많은 쫄보인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내 짧은 비명소리에 그토록 놀랄 줄은 몰랐다. 그렇게 놀라서 뛰어오르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도 튀어나가지 않고 내 옆에 있는 게 다행이었다. 대박이가 힘껏 달려 나갔다면 나는 아마도 주저앉은 채 대박이한테 질질 끌려갔을 지도 모른다. 대박이가 대형견이라서. 


그 때 생각을 하면 아찔하지만, 대박이가 놀라는 원인을 내가 제공했으니, 대박이 탓을 할 수도 없다. 대박아, 너 때문에 엄마가 다쳤어. 이러면서 그 자리에서는 대박이 탓을 하긴 했지만. 그 날 이후, 산책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통증이 확실히 덜 했다. 이 정도면 산책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 그냥 걷기만 하는 거니까. 거실 앞 데크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박이를 보니 아무래도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오늘 밤에는 남편과 외출 예정이라 대박이가 밤 산책을 할 수 없다. 그러니 낮에 나라도 데리고 나가줘야 하지 않을까? 산책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녀석인데. 그래서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걷지, 뭐. 이러면서.


대박이만 있을 때는 산책준비가 간단했는데, 보름 전, 삼돌이가 온 뒤부터 번거로워졌다. 삼돌이를 현관 안에 혼자 놔두고 대박이만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더니, 현관문 옆의 바람막이 스펀지를 죄다 물어뜯어놨던 것이다. 대박이는 단 한 번도 무엇인가를 물어뜯은 적이 없는데, 삼돌이는 달랐다. 


싫다고 버티는 삼돌이를 보일러실에 데려다놓고, 대박이와 산책을 나섰다. 해솔길을 따라 걷는 산책길은 거리가 4킬로미터 남짓 된다. 1시간 정도 걸린다. 염전과 갯벌을 사이에 두고 길이 길게 이어지는데, 나는 그 길이 무척이나 좋다. 중간에 소금창고로 빠지는 길이 있지만, 나는 저수지를 끼고 돌아 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간다.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넘으면 포도밭이 이어진다. 그리고 언덕을 내려가면 다시 마을이 나온다. 


마을 사이로 이어지는 길에는 논이 있고, 밭이 있고, 포도밭이 있고,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 서 있다. 그 길을 걸으면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꿩이 우는 소리와 산비둘기가 우는 소리도 들린다. 산책길에서 갈매기를 보고, 푸드득 날아오르는 흰 두루미를 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겨울에는 겨울을 나러 온 기러기 떼들이 텅 비어 황량하기만 한 논을 가득 채운다. 고라니도 툭 하면 모습을 드러낸다.


며칠전에는 산책을 하다가 청설모를 봤다. 길 한 복판에 앉아 있던 청설모는 우리가 나타나자 잽싸게 산으로 도망을 쳤다. 그걸 본 대박이가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개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대박이한테 질질 끌려갈 것 같아서 얼른 개줄을 놔줬더니, 대박이는 청설모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렇다고 청설모가 대박이에게 잡힐 리는 절대로 없지. 대박이는 청설모를 따라 산으로 뛰어올랐지만, 이런 아뿔싸, 그물이 쳐져 있어 걸리고 말았다. 길 아래로 떨어져내린 대박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청설모가 곳을 오래 바라보았다.


대박이와 함께 걷는 산책코스는 늘 같지만, 산책이 늘 다른 건, 이처럼 산책길에서 날마다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랬다. 대박이는 산책을 하면서 배변을 한다. 집 마당에 배변을 하는 건 산책을 가지 않을 때밖에 없다. 녀석은 가정교육을 잘 받은 예의바른(?) 개처럼 길 한복판에서 배변을 하는 일이 없었다. 길 가장자리를 찾아 풀에 엉덩이를 찔려가면서 배변을 하는데, 어라, 오늘은 아니었다. 길 한복판에 떡하니 배변을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말렸지만, 그게 말린다고 될 일인가. 너, 왜 그래? 대답할 리가 없다. 대답을 하면 개가 아닌 사람이지. 천연덕스럽게 배변을 마친 대박이를 나무에 매놓고 똥을 치웠다. 


오늘, 또 별난 일이 있었다. 산책길에 묶여 있어 산책을 할 때마다 늘 만나는 백돌이에게 어쩐 일로 대박이가 다가가 아는 체를 하면서 꼬리를 흔든 것이다. 산책을 할 때마다 아는 체를 하기는커녕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휭하니 지나치더니. 백돌이도 꼬리를 흔들면서 대박이를 반겼다. 아주 다정하게. 대박이는 백돌이 옆에 같이 묶여 있는 곰뎅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박이, 너, 개 차별하면 안 된다. 


바람은 우리가 산책을 하는 사이에 더 심해졌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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