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베를린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것이 불과 1989년의 일이다. 석사 유학생 신분으로 출국하는 것이 신문에 나오던 70년대, 나의 아빠는 그 유학생 신분으로, 나의 엄마는 신문의 또 다른 한 면을 장식한 파독 간호사 신분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 항쟁의 거센 시위가 있던 무렵 독일 보훔의 한 병원에서 태어나게 되었다(영사관 직원에게도 나의 출생신고는 드문 케이스였는지 직원의 실수로 나는 결혼 전까지 호적상에 1970년생으로 신고되어있었다.....). 물론 8개월 정도 뒤에 아빠 공부가 다 마무리되어 귀국하였지만 평생을 살며 내 출생지를 생각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감정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한국인으로 자라오던 나에게,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우리가 독일에 1년 정도 다녀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기억에 없는 독일! 엄마 아빠의 앨범 속에서만 보던 이국적인 풍경(당시 내가 살던 곳은 그 시절의 대한민국이 그랬듯 언제나 공사판이었다)! 우리 집에 남아있었던 독일 물건들의 신비로움(?) 그리고 무엇보다 비행기를 타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했다.
친구들한테 잔뜩 자랑을 했지만 아빠의 계획은 계속 미루어졌고 나는 양치기 소년이 되어 스스로도 포기하고 있을 무렵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아빠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우리 가족은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의 막바지에 아빠가 공부했던 독일 도르트문트로 가게 되었다. 이때가 1990년 12월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보다 이 시기의 1년은 나의 인생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독일어를 하나도 못하면서 독일 공립 김나지움(초등 5-고등 3 까지 과정이 통합된 인문계 독일 학교)에서 경험한 독일의 교육, 길거리에서, 유럽 여행 중에 경험한 서양의 문화, 일상에서 접하는 한국과의 수많은 차이점들은 불과 1년의 시간이었지만 내 유년시절에 가장 강렬한 기억들로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후 한국에 와 다시 평범한 한국인으로 치열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치열한 사회생활을 하며 독일에서 태어났고 또 독일을 경험해 보았다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경험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시기가 되었을 때쯤, 그러니까 결혼하고 연애할 때도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자~ 그럴까? 정도의 이야기만 오 갔을 때 우리는 조금 진지하게 해외로의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치열하고 또 치열한 한국에서의 삶 속에서 마치 아이 셋을 낳고 날개옷을 잃은 선녀처럼, 우리도 아이 셋을 낳고 바둥거리며 점점 우리 가족에게만 어려워지는 시험을 통과하듯 살아가던 그때, 조금씩 보이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소식들은 상대적으로 한국 바깥의 매력을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심지어 세월호 사건이 있기 전이었음에도 말이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사회 속에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크게 다가왔다. 경쟁위주의 교육, 대학입시.. 스스로 짜증 난다, 쓸데없다 생각하며 지나왔던 그 시간들에 내 아이들을 또 밀어 넣어야 하는 걸까? 학창 시절, 독일에 살다 한국에 오게 되었을 때 엄마 친구분들이 너희들은 여기 살면서 계속 학교 다녀라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서 그렇게 만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자식의 삶과 부모의 삶이 자식과 부모라는 이유로 아무런 경계선 없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섞여버린 이 곳에서 나는 부모로서의 삶도, 자식으로서의 삶도 온전히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2014년 1월 2일, 도망치듯 떠나온(실제로 야반도주하는 기분으로) 우리에게는 목적지가 없었다. 하던 사업도 지지부진해지고 막둥이는 이제 갓 돌이 넘어 늘 엄마 등에 붙어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분명 5명이었음에도 4명처럼 보였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지옥문을 열었는지도 모른 채 잠시 쉬자는 기분으로 2달 동안 따뜻한 여름나라들을 돌아다니며 해외에서의 삶에 대한 환상만을 잔뜩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발리에서 예약한 마지막 숙소의 일정을 며칠 남긴 밤, 약간은 뜨거운 태양에 질린 기분으로, 3월이면 이제 유럽도 봄일 거라는 우리들만의 기대와 함께, 어느 나라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독일부터 가보자는 생각으로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를 '일단' 예약했다. 독일 어디로 갈 것인가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또 살아본.. 내가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했으나 안타깝게도 최신의 정보와 기억들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20년도 더 되어버린 것들이었다.
구글 지도를 축소 확대 해 가며 부부간의 열띤 토론과 검색이 시작되었다. 여긴 어때? 집값이 싸 보이는데.. 여긴 어때 조용해 보인다. 라며 우리는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한 도시 혹은 한 주의 평가를 얼토당토않은 추측으로 형상화하며 마음대로 독일을 재구성해 나갔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결론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전거의 도시 '뮌스터'로 가자는 결론이었다. 물론 가본 적도 없고 그냥 구글맵과 검색해서 나온 몇몇 포스팅을 보고..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지만 어찌 되었건 목적지를 정해 놓고 나니 우리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따뜻한 곳에 있고 싶었던 우리는 각종 전자제품과 여권 등 필수품이 들어있는 나의 백팩, 그리고 큰 케리어 2개 만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다른 등과 손에는 12개월, 35개월 그리고 57개월짜리 아이들이 붙어있었고 그 큰 케리어 속의 반틈은 언제나 기저귀로 가득 차 있었다. 즉, 우리에게는 여분의 겨울옷이 없었다. 아이들 잠바는 크고 무거워서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 편으로 바이바이 하고 올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섬 발리.. 우리는 남은 일정을 겨울옷을 찾는데 보냈고, 왜인지 납득은 가지 않지만 쇼핑몰 속의 GAP에서 늦가을에 입을만한 두꺼운 후드 몇 개를 사는 데 성공했다. 독일에서 얼마나 있게 될지, 무엇을 할지 결정한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임시숙소를 고르다가 우리는 최종 목적지를 베를린으로 바꿔버렸다. 임시숙소 구하기도 쉽고.. 엄마 친구분도 계시고.. 그리고 그 뒤에 몇 가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서. 독일로 들어가는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다시 최종 목적지 변경을 하지 않으려 프랑크푸르트-베를린행 기차를 예약했다. 왜냐면.. 아이들은 기차가 무료였기 때문에.. 지금은 돈에 관해서도 많은 부분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었지만 저때만 해도 무조건 아끼고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 우리가 지옥문을 연 것도 모른 채 스스로를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채찍질하는 꼴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