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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호철 Jan 10. 2018

좋은 아빠 되기의 함정

지금 못하는 건 나중에도 못하는 거다

독일로 떠나오기전 한국에서 살았던 우리집! 저 마당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은....

전원주택에서 살아본 경험도 있고 평소 주택, 그것도 우리만의 집을 지어 사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기에 독일에 와서 나는 다짜고짜 베를린 외곽의 땅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보눙이라는 독일의 가장 일반적인 공동 주거형태였는데, 대략 5층 전후의 아파트라고 보면 되겠다. 우리는 이 건물에 우리만 사용할 수 있는 마당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0층(우리나라의 1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담쟁이 덩굴과 산더미처럼 쌓이는 낙엽..

마음속으로는 이미 집을 여러 채 지어보고, 이곳저곳 주택건축에 대한 사이트도 찾아보고 예산과 건축법에 대해서도 알아보던 그즈음 창밖을 통해 우리 집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집주인이 자갈을 깔아놓아 별로 관리할 게 없어 보였던 마당에는 잡초와 이끼 그리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큰 카스타니아 나무에서 떨어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낙엽이 가득 차 있었고 아름답게 가지를 내리고 있던 담쟁이덩굴은 정글을 연상시킬 정도로 자라 있었다... 1년이 넘도록 몇 번밖에 사용하지 못했던 그 마당.. 내 눈이 흔들리는 걸 감지한 아내가 이때를 놓칠세라 나에게 이야기했다.


낙엽이 쌓이고 비라도 오면...


'호철.. 주택에 사는 건 나도 좋은데 저 낙엽을 치우겠다고 한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지? 주택에 살면 마당일 뿐만 아니라 집에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을 텐데 그걸 다 할 수 있겠어? 우리가 지난 주택에 살 때 마당 관리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해? 더구나 외곽으로 이사하면 출퇴근 시간뿐 아니라 아이들 학교, 장보기 등 이동하는 시간도 더 많아질 텐데 우리가 지금 가진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을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지금 하지 못하는 일은 나중에도 못하는 일이라 생각해'


아...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내가 얼마나 황당한 일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바로 깨닫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또 다른 보눙을 구해 이사했고 지금은 아주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여기서도 못다 한 집안일이 산더미인데..). 모든 일들이 이렇게 쉽게 풀리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이런 실수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시간을 전후로 많은, 아마도 대부분의 아빠들은 자신이 최고의 아빠가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최고의 아빠...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평일, 한가로운 바닷가에 가족과 함께 도착한 당신은 고급 외제차에서 내리며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며 명품 선글라스를 쓴다. 깔끔하게 면도된 얼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한 옷차림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당신의 한 팔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첫아이가 안겨있다. 사랑스러운 아내는 눈이 부시지 않은 그늘에 돗자리를 펼치고 파도 속에서 아이의 웃음소리....... 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사는 스스로를 상상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더 많은 수입, 더 안정된 직장 혹은 사업, 가족과 보내는 더 많은 시간 같은 것 말이다.


나도 그 누구보다도 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더 많이 벌려고 노력했고 더 열심히 일했고 졸리고 피곤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 첫 아이, 둘째에 이어 셋째가 기어 다닐 무렵, 나는 좋은 아빠는커녕 최악의 아빠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피곤해 있었고 걸핏하면 짜증과 화를 냈고, 이 기분에 따라 아이들을 대했으며 모든 것이 나에게 버겁다고 느꼈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아이들이 때론 미웠고 아이들의 울거나 짜증내는 소리를 몇 초만 들어도 미칠 것 같았다. 


지우가 그린 싸우는 우리. 여유가 없어진 우리는 사소한 일에도 소리를 높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아내였다. 우리가 첫아이를 가졌을 때 아내는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고 열심히 노력했다. 아내가 혼란스러움을 느낀 건 둘째가 생기면 서다. 둘째에게 시간을 쓸수록 첫째를 소홀히 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렇다고 첫째한테만 집중할 수 없으니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내는 무엇을 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뿐이며, 첫째에게 했던 것처럼 둘째한테 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잘못된 목표 설정임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아내는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이런 아내를 답답해했지만 나 또한 똑같은 잘못을 하고 있었다.  매일 세 아이와 각각 8시간씩 놀아주려고 했던 아내의 계획처럼, 나도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는 매 순간 괴로워했다. 실현 불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당연하게도 좌절의 괴로움을 맛보는 그 굴레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지도 않을 방학숙제를 걱정하며 매일 불안해하며 노는 아이들처럼 여유를 잃어갔다. 방학숙제는 학교에서 하라고 선생님이 시키기라도 했지만 하루 24시간을 놀아줘야 한다던가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을 슈퍼 아빠가 된다는 황당한 목표들은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가 세운 것들이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의욕 -> 불가능한 목표 설정 -> 안 하느니만 못한 대실패 -> 그 와중에 아이들한테 짜증 ->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이 난리를 쳐서 나쁜 아빠가 되어버림이라는 황당한 상황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매 번 이러한 함정에 빠질 때마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물론, 자괴감에 굉장히 우울해지곤 했고, 다시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오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불가능한 목표이고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이들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했고 최선을 다했다는 이유 아닌 이유 때문에 더더욱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것 같다.


지우의 잘못도 아니지만 내가 짜증내거나 화를 내면 늘 미안하다는 편지를 써 주었다


이런 상황을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던 생각의 전환점은 바로 '누가 해달랬어?'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는 것이었다. 이 노력들이 과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일까? 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하면 좋아하고 행복할까? 아이들이 원하는 게 있음에도 그걸 무시하고 내가 주고 싶은걸 주는 게 맞는 것일까? 많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잠시 생각한 뒤에는 전보다 쉽게 이러한 목표를 포기하거나 수정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들은 사실 들어주기 너무나도 쉬운 것들이었다. 과자가 먹고 싶다던가 티비가 보고 싶다는 간단한 일부터, 자기가 그린 그림을 봐달라, 카드 게임을 같이하자, 자기 전에 안아달라... 왜 나는 이런 것들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뭔가 대단한 것들만 해주려 했을까.. 지금까지 바보 같은 아빠를 참아준 아이들이 눈물 나게 고마울 정도였다.


한 번 생각을 바꾸고 나니 너무나 간단하게 상황이 바뀌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를 귀찮게 하던 아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말마다 어딜가야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계획을 짜는 것보다 그냥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 너무 쉬웠고 몇 개월 사이에 나는 아이들 입에서 '아빠가 최고야', '아빠가 제일 재밌어'라는 소리를 거의 매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내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그만두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누워서 안마를 받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


좋은 아빠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원래부터 최고의 아빠는 아니었을지언정 그럭저럭 좋은 아빠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재밌게 소통할 수 있었고 따뜻하게 대해줄 수 있는 능력은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내가 쉽게 할 수 있던 것들이었다. 내가 가진 많은 장점을 버려두고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최고'의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던 그 시간들은 나의 욕심이었을 뿐,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컸다면 분명히 나한테 이야기했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해 달랬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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