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치는 움직이는 전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도 회사에서는 싫은 소리를 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데, 어느 순간 회사에서는 상사의 화풀이 상대가 되어있었다. 되돌려 보려고, 열심히 해보려 할수록 일은 꼬여버렸다. 언젠가부터는 그냥 그런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내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아내 하고는 SNS로 만났는데, 결혼 직전 자신에게 빚과 이혼 경력이 있다는 것을 눈물로 고백했다. 빚을 갚아주고 결혼했지만 아내는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않았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집에 없는 날이 많았고, 세이치가 그에 대해 말하면 예전 애인과 비교하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어느 순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나가는 날들이 많아졌다.
출장 후 회사에 복귀하려 전차를 탄 세이치는 익숙지 않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플랫폼에 내린 상태였다. 모르는 역이었다. 발이 이끄는 대로 역사를 나가 역 앞에 섰는데 동화 속에서나 보았던 아름다운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그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세이치는 그대로 그 마을에 정착했다. 이 마을은 세이치가 살던 현실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돈을 버는 게 어렵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여인도 만났다. 가정을 꾸렸고, 사랑스러운 딸까지 낳았다. 이전 세계에서 꿈꾸지 못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현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발송인은 ‘방위성 이공간존재대책본부’였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세이치가 있는 곳은 이계의 세계이고, 그 이계의 영향으로 지구에는 미지의 존재가 출몰해 바이러스처럼 번지며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몸에 닿으면 사망까지 이르게 되는 미지의 존재 때문에 학교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방호복에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편지는 계속해서 도착한다. 정부로부터, 그리고 기억에서 희미해진 현실의 아내로부터, 그리고 나를 괴롭혔던 고등학교 때 친구로부터. 지구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존재로 모두가 세이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은 각각 자신들과의 관계를 강조하며 세이치가 이계를 파괴하고 돌아와 달라고 하고 있었다.
<멸망의 정원> 속 주인공 세이치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어쩌면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다. 그러던 그에게 꿈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림책처럼 아름다운 마을에서, 돈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부름을 받는다. 네가 살고 있는 그 세계 때문에 모두가 고통받고 있으니 그 세계를 깨고 현실로 돌아와 달라고.
만약 내가 세이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나 한 명만 돌아오면 전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일이니 당연히 내가 희생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모두의 행복을 위해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지금의 행복을 깨뜨리고 불행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랬을 때 난 내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모두를, 지구를 구했다는 자부심? 그것이 현실에 남겨뒀던, 미치도록 도망치고 싶었던 현실에서의 남은 여생을 보내는 데 힘이 되어줄까.
한때는 절대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수적으로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40년을 살아보니, 그런 선택 속에서 희생된 소수는 그렇게 늘 희생당하며 살아야 했다. 선택의 순간이 지나면 그 누구도 희생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오면 또다시 소수는 당연히 희생해야 했다.
오롯이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 희생된 소수다. 그런 그들에게 '너 하나만'이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그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비난할 수 없다. 삶의 무게에, 행복의 크기에 경중은 없고, 크고 작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라면, 현실의 부름에 눈과 귀를 닫고 설령 이것이 허상이고 환상일지라도 지금의 행복한 삶을 지킬 것이다. 그 무엇도, 심지어 그것이 80억 지구인의 목숨일지라도 내 삶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맞바꿀 수 있는 건 없다. 그 누구도 내 행복을 담보해주지 않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