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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r planEAT 아워플래닛 Jun 30. 2018

식초 만둣국을 아시나요

[espisode124. 가장 슬픈 한 끼, 전쟁과 밥상]을 돌아보며


비켜요, 비켜!


철길 옆 좁다란 골목으로 드럼통을 한 가득 실은 소 달구지가 지나간다. 거리 가득 시큼털털한 냄새가 훅하고 퍼진다.


얇디얇은 판자 틈으로 그 온기가 스민 탓일까… 성냥갑을 쌓은 듯한 하꼬방에서 하나, 둘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순식간에 골목은 여기저기서 몰려든 지게꾼이며 손수레 꾼들로 가득하다. 깡통을 챙겨 들고 줄을 비집고 선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불과 5,60년 전의 일이다


전쟁 직후부터 60년대 초까지, 미군부대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꿀꿀이 죽을 팔았다. 인천 배다리 마을의 판자촌 골목도 그중 하나였다. 미군은 자신들이 버리는 음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음식과 쓰레기를 분리해 배출하기도 했단다. 꿀꿀이 죽이라는 험한 이름 대신 유엔탕이라 부르기도 했다지만 이름을 달리 부른다 해서 나아질 것은 없었다. 그래도 단돈 1원, 2원이면 온 가족의 배를 불릴 수 있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저 고마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이만한 솥에다가 꿀꿀이 죽을 끓여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모아 한 솥 가득 물 좀 넣고 끓이면 거기서 휴지도 나오고 담배꽁초도 나와. 그럼 건져 버리면서 계속 끓여요. 먹어보고 좀 쉬었다 싶으면 소다 훌훌 풀어 다시 휘휘 저어. 그럼 또 먹을 만해져. 그것도 없어서 못 사 먹으면 여기 사람들은 그냥 굶는 거야.”


‘미군 부대에서 담배꽁초까지 들어있는 더러운 꿀꿀이죽을깡통으로 사다가 생활하고 있는데이것을 주민들은 UN탕이라고 부른다‘-1957년 경향신문 기사 中


야무진 손에 깡통을 쥐어 들고 줄을 서던 아이는 어느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 골목에 들어 서면 시큼한 죽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골목 앞에 서서 눈을 감고 그녀가 설명한 그 시큼털털한 냄새를 그려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참혹한 시간 속의 냄새를, 그 처절한 한 끼를 어떻게 지금 가늠해 볼 수 있을까. 전쟁은 드럼통 속 꿀꿀이 죽처럼 우리네 인생도 휘휘 저어 버렸겠지…


옛 꿀꿀이 죽 골목을 지나 우각로를 따라 오르며 오랜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그녀가 말을 덧붙인다.


“1960년대 일거예요. 그때도 판잣집 한 칸에 열 명씩 잤어요. 그게 하루 오십 원인가 그랬대요. 다들 곧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제대로 된 집 지을 생각도 안 했어요. 저는 충청도 사람, 남편은 황해도 사람이에요. 다들 고향이 달라. 그래도 이제 우리는 배다리 사람이야.”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일본인들이 몰려들자 제물포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은 배다리 마을로 모여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이 항만과 철도 건설 등의 일자리를 찾아 팔도에서 몰려들었고, 전쟁 중에는 고향으로 한달음에 달려갈 생각으로 이북의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전쟁이 끝나고는 전쟁 복구 산업을 위해 또 많은 산업 노동자들이 모여든다. 이렇듯 배다리 마을은 태생부터 낯선 자들이 어울려 살아온 타인의 마을인 것이다. 처절한 빈곤 탓에 바람을 겨우 피할 만큼의 종이 상자와 판자로 집을 지었겠지만 곧 이곳을 떠나 고향집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가진 그들에게는 여기가 그저 하루하루 버티기만 하면 되는, 잠시 머무르는 곳 따위로 생각되었으리라.


 

마을을 돌아 돌아 친구분들이 모여있다는 옛 집에 도착한다.


온 가족이 한국전쟁 때 피난을 왔다는 충청도 댁 이씨(71),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된 어머니 손을 잡고 왔다는 경상도 댁 하씨(67),

한국전쟁 후 농토를 팔아 도시에 판잣집을 마련한 아버지를 따라온 경기도 댁 박씨(66).


언니, 동생 하며 40여 년을 넘게 함께 살아온 이들은 배다리 마을 여자 삼총사다.


궁상맞은 옛이야기를 끄집어내러 온 내가 귀찮기도 하련만 반가이 맞아준다.


큰 언니 격인 이씨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식초 물만두라고 들어봤어요?”


“어- 그거 저희 할아버지가 그렇게 드셔서 어릴 때 그렇게 많이 먹었어요. 우리 집만 그렇게 먹는 줄 알았는데.”


제법 먹어 본 체를 해본다.


“아가씨가 별 걸 다 아네? 나는 황해도가 고향인 시어머니한테 배웠어. 맹물에 만두를 삶아 식초만 넣어 먹더라고. 나는 도무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겨울만 되면 그 맛을 찾아요. 사는 곳을 달라져도 입맛은 안 변하나 봐. 옛날에는 제대로 된 고기를 못 넣어서 미군부대에서 싼 고기나 햄이 나오면 그걸 김치랑 같이 버무려서 만두를 빚기도 했어. 꿀꿀이 죽은 벗어난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설날이면 떡국만 먹던 충청도 출신 이씨는 황해도에서 온 시어머니와 함께 밤을 새워 만두를 빚기도 했다. 쉬어빠진 김치 쫑쫑 썰고 두부 으깨 넣어 소를 만든다. 고기라도 들어간 날이면 입이 호강이다. 만두도 낯선 이씨에게 식초만 넣은 물만두는 그야말로,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는 기가 찬 맛이었다. 이제는 설날이면 백 번 양보해 식초를 뺀 떡만둣국으로 합의를 보신다니 이만하면 작은 밥상 위에서나마 남북의 화합이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까.ㅎㅎ


떡만둣국 이야기가 나오니 박씨가 할 말이 많아진다.


“밀가루 떡국 안 먹어봤으면 말을 말아야지. 쌀떡국이 너무 먹고 싶은데 쌀가루가 어디 있어요. 하루 한 끼 밥 먹는 아침에도 쌀은 찾아보기가 힘든데. 내내 수제비만 먹다가 떡국이 너무 먹고 싶은 거야. 그래서 어린 마음에 밀가루 반죽을 되게 했어. 가래떡처럼 만들어서 떡국 떡 썰 듯 썰어 넣어 먹었어요. 그것도 뽀얀 밀가루가 있을 때 이야기지. 없을 때는 말분으로 수제비 해 먹는 것도 다행이었어요.”


“사카린 넣은 술빵은 어떻고.” 경상도 댁 하씨가 말을 이어간다.


“쌀가루가 없어서 떡을 못하니까 소풍 갈 때나 사람들 모일 때 밀가루에다가 막걸리 넣고 사카린 넣고 찜통에 호박잎 깔아서 술빵을 쪄냈어요. 그래도 그때는 술빵도 고급이라 양반떡이라 했거든. 소풍날 아침에 자고 있는데 엄마가 ‘자야, 돈이 없어서 달걀도 못 사고 술빵 쪘다.’하시던 게 생각나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니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디에서 왔건 누구와 살았건,

50, 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 분에게 공통의 화두는 단연 밀가루 음식과 가난이었다.


예부터 밀가루는 진말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한 식재료였다. 우리 땅에서의 밀 재배가 쉽지도 않았을뿐더러 제분 기술조차 그리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50년대 미국의 잉여 농산물 처리 수단의 하나로, 소위 말하는 원조 밀가루가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 나라의 식생활 구조는 오랜 식습관 속에서 형성되고 그 식습관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요소는 단연코 식재료이다. 귀한 식재료 중의 하나였던 밀가루가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식생활 구조는 크게 뒤흔들린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서양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새로운 밥상이 차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밥과 국 중심이던 우리의 밥상에 수제비, 국수, 빵 등이 빈번히 오르기 시작한다.

이렇듯 전쟁은 사람과 사람을 뒤섞고 식재료와 음식을 뒤섞었으며 이는 새로운 보금자리의 탄생과 새로운 식문화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녀들의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자.


가난은 또 어떠한가.


국수 삶은 물마저 아까워 버릴 수 없었다. 국수 삶은 제 물에 소금만 조금 넣으면 된다. 간장조차 사치였던 시절이 있었다. 들어간 재료만큼 이름이 정직하다. '소금 제물 국수'란다. 이로 끊어내기도 전에 툭툭 끊어질 퉁퉁 분 국수가 걸쭉한 소금물에 담겼다 입안으로 들어온다. 찝찌름한 그 맛이 가히 유쾌하진 않다.


뽀얀 밀가루가 떨어진 날이면, 밀을 제분하고 남은 밀기울과 등외 밀가루를 섞어 만든 말분도 감지덕지다. 물에 말분을 풀어 김치나 명아주 따위를 같이 넣고 풀떼기말분죽을 끓였다.


거친 말분과 질깃한 명아주가 씹힌다. 그래도 좀 먹을 만하다.


여름에 쉬어버린 보리밥도 버릴 수은 없었다. 쉰 보리밥에 누룩을 빻아 섞어 두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체에 한번 걸러 사카린을 넣고 한소끔 끓여주면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그 맛이 꼭 요구르트를 닮았단다.


쉬어버린 보리밥과 누룩, 사카린의 조화라…. 나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모든 것이 궁핍한 그때는, 뭐를 먹든 살아야 했던 그때는,

평소에 먹지 않던 재료까지 사용해 먹을만한 것들을 만들어 내야 했을 터.


여기저기서 몰려든 사람들이 한데 부딪히고 뒤섞이던 그때는, 서로의 조리습관을 내세워 다양한 조리법이 뒤섞였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먹는 다양한 음식들의 폭발적인 탄생인 것이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남편 점심 챙겨줘야 하는데. 조금 있다가 저기 양장점으로 와요. 밥 먹고 가.” 추억에 젖었던 그녀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지도를 챙겨 들고 두리번대며 다시 걷는다.


아직 남아 있는 낡은 건물들을 지나치며 그 시절 낯선 이 거리를 걸었을 또 다른 청춘들을 떠올린다.


아직은 엄마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나이에 바느질을 시작한 소녀의 어린 시절이 지나간다. 첫 월급 300원을 손에 쥐고 헐레벌떡 엄마에게 뛰었을 그녀가 보이는듯하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버거운 짐을 끌어야 했을 손수레 꾼의 험상궂은 욕설이 들리는 듯하다.


몸서리치게 지겹던 수제비가 별미가 되고, 살기 위해 먹어야 했던 꿀꿀이죽이 화려한 간판에 쓰인 부대찌개로 바뀌는 세월을 거쳐,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도착한 낯선 이곳은 이미 그들의 고향이 되었다.



식초물만두 한 그릇, 밀가루 떡국 한 그릇, 술빵 한 접시가 밥상 위에 오른다.


숟가락으로 만두를 반으로 자르고 식초 국물 곁들여 한입 크게 떠 넣는다. 어릴 적, 작은 상에 둘러앉아 볼이 터져라 식초 물만두를 먹어대던 언니, 오빠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띤다. 시큼 매큼한 김치만두와 뜨듯한 식초 국물의 조화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누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가 찬 맛이 누구에게는 추억이 버무려진 기가 막힌 맛이 될 테지…


전쟁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한 끼와 가장 현명한 한 끼를 주었고

지금 배다리 마을에선, 그들만의 추억의 한 끼가 차려진다.

 

글, 사진 by 음식탐험가 장민영

 


<그리움으로 다시 차리는 한국인의 밥상>
일명 #그다밥 은 [한국인의밥상]을 취재 당시를 돌아보고 다시 찾아가, 잊혀지는 #백만가지한국음식 다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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