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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r planEAT 아워플래닛 Mar 12. 2020

바다거북과 함께한 하루


HIS STORY


‘스리랑카에서 반드시 해봐야 할 일들 (must do in Sri Lanka)’


여행을 떠나기 전, 일찌감치 챙겨본 가이드북의 한 페이지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엑티비티는 열차여행이었다.

파아란 바다를 끼고 달리는 빨간색 열차와 짙은 녹음의 차밭을 가로지르는 파란색 열차가 찍혀 있는 사진이 일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불현듯 떠올랐다. 

스리랑카의 열차여행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나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같은- 내 오래된 위시리스트 속 그것들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사진 밖으로까지 그 느긋함이 전해지는 ‘완행 열차’ 라는 한 단어 때문이었다. 



수도 콜롬보를 떠나는 날. 

후텁지근한 도시의 열기와 매연을 뚫고 그 ‘로맨틱’ 한 완행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콜롬보 포트역에는 이미 아주아주 많은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반쯤 더위를 먹은 얼굴들을 하고 플랫폼에 서 있거나 앉아있거나 혹은 드러누워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한 열차는 마치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처럼 야무지게 사람들을 채워 넣고, 다시 20분을 가만히 정차해 있다가 서서히 어두컴컴한 역사를 빠져나갔다. 

선풍기 하나 돌아가지 않는 객차 안에 가득한 열기 덕에 한시간 전의 상쾌한 아침 샤워가 무색도록 양팔은 비 맞은 듯 촉촉해져 있었고, 몸과 일체가 된 티셔츠와 바지 속까지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 여행이라는 건 소파에 누워 고화질의 잡지 사진과 UHD 티비로 즐겨야 한다던 한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오를 때쯤 한쪽 창으로 눈부시게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그제서야 무표정한 좀비들처럼 서있던 사람들도 너나 할것없이 핸드폰을 창으로 들이대기 시작했고 여전히 뜨거운 바람에도 다행히 기분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터그덩 터그덩’ 완행열차의 소리를 나는 과연 언제 마지막으로 들어봤던가 

 떠올려보니 아마도 중학생 때 즈음 외갓집으로 향하던 무궁화호였거나 대학교 MT때 한 두 번 타보았던 통일호였을 것 같다. 이와 관련된 아련한 추억들이 소환되는 와중에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렸고 이 완행열차 여행은 (기대한대로) 다시 로맨틱해지고 있었다. 



엉덩이 기댈 곳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객차 안에는 수시로 주전부리와 음료를 파는 상인들이 좁은 틈을 비집고 왕래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인파를 헤치는 흔들림 없는 그들의 발걸음과 판매하는 물건들을 외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이들에겐 매일의 일상일 것이다. 뭐를 팔고 있나 목을 빼고 있다가 예전 남인도에서도 이따금씩 먹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와서 반가운 마음에 - 오늘의 첫번째 바가지를 기록하며- 주전부리 한 봉지를 구매했다. 



‘Vadai’ 라고 불리는 스낵은 스리랑카 전역의 기차 안이나 터미널에서 만날 수 있는 국민 간식의 일종으로 주로 콩류를 이용해 가루 또는 곡물 전체를 통째로 뭉쳐 향신료와 함께 양념한 뒤 튀긴 것을 말한다. 맛은 향신료와 함께 뭉쳐서 튀긴 녹두빈대떡과 비슷하다. 도너츠처럼 생긴 녀석을 ‘우룬두 바다이 (ulundu vadai)’, 원반 모양으로 생긴 녀석을 ‘빠릿뿌 바다이 (parippu vadai)’ 라고 한다. 둘 다 매력이 있지만 나는 렌틸콩이 통으로 씹히는 후자를 더 좋아한다. 


적당히 땀 흘린 만큼 몸이 염분을 원했던 모양인지 입안으로 들어오는 짜릿한 짠맛과 매운맛, 향신료의 향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먹을수록 강렬한 그 맛에 계속 손이 가는 바람에 앞서 지나간 상인과 한 팀인 듯 뒤따라 다니는 음료수 장수에게 (오늘의 두번째 바가지를 쓰면서) 물과 음료를 구입했다. 



수도권을 지나고 나니 창밖으로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찌 저렇게 푸를 수 있을까 싶은 바다를 배경으로 초록빛 야자수가 줄지어 펼쳐졌다. 여전히 더웠지만 과연 땀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풍경이라고, 가이드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을 무렵 열차는 우리의 목적지인 히꺼두와 (Hikkaduwa)에 도착했다. 


섬나라인 스리랑카는 해안선을 따라 도시들이 분포하는데 그 중에도 서부에서 남부로 이어지는 라인에 주요 도시가 몰려있다. 이곳들은 주로 휴양지나 서핑포인트로 유명한데 가이드북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작은 해안도시인 히꺼두와를 굳이 찾아온 이유는 바다거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히꺼두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코스고다(kosgoda) 해변에는 바다거북 인공 부화장이 있다.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어 거의 멸종위기에 처한 인도양 바다거북을 보호하고 그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스리랑카 서남해안에만 서너 개의 부화장이 운영되고 있다. 자연상태에서 새끼 바다거북의 생존율은 1% 정도로 극히 낮은 터라 해변의 알을 수거해 인공부화를 시키고 일정 크기에 이를 때까지 기른 후에 바다에 방류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다 거북을 만나는 일도 신기하고 벅찬 일인데 갓 태어난 새끼 바다거북이라니… 설레임 가득한 마음으로 부화장 입구에 들어서자 단출하게 조성된 모래밭이 눈에 들어왔다. 각기 다른 종을 표시해 둔 푯말 아래 거북알들이 묻혀 있다는 설명이 적혀있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할 때면 이따금씩 바다거북을 만나게 되는데 유유히 헤엄치는 커다란 거북이를 보는 일은 늘 신비롭고 감격스러운 경험이다. 나에게 바다거북이란 대양의 상징이자 신화와 설화 속 영험함의 표상, 느림의 자유와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생명체이기에 몇 번을 마주해도 그 만남의 순간은 항상 경이롭다. 


오키나와에서 만났던 거북님


2미터 남짓한 간격으로 구획된 시멘트 수조 안에 작고 까만 녀석들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정말 오랜만에 입 밖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렇다. 영험과 고귀함의 상징이건 아메리카 불곰이건 황소개구리건 간에 이 세상 모든 동물의 새끼들은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다. 


녀석들을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에 불타오르고 있을 때쯤 눈치 빠른 관리인이 어느새 새끼 한마리를 들어 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장차 유유자적하게 인도양을 누비게 될 바다거북이 손 위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까슬거리는 피부와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생명의 신비라는 감정은 이런 때에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느리게 헤엄치는 바다거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새끼 거북들은 제법 빠르게 물살을 헤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어렸을 때 물에 띄워놓고 놀던 태엽 감는 노란 개구리가 떠올랐다. 종종거리듯 헤엄치는 새끼 거북의 모습에 우리 둘도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새끼 거북이들이 모여 있는 수조 뒤에는 기형으로 태어났거나 바다에서의 사고, 인간들의 전쟁 등으로 인해 서식지를 훼손을 당했거나 장애를 입은 거북이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꽤 성장한 녀석들이라 상대적으로 좁아보이는 시멘트 수조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에서 부화한 새끼가 성체까지 자랄 수 있는 확률은 10% 미만이라고 한다. 이 생존율 역시도 자연의 섭리이겠지만 이제 이 자연의 속도로는 무너진 개체수를 회복시키는 것이 어려워 이렇게 몇몇 나라들이 부화장을 운영하며 개체수 회복에 힘쓰고 있다. 인간으로 인해 멸종위기에까지 이르게 된 동물을 다시 인간의 손으로 보호하고 있는 아이러니인 셈이다. 



우리는 바다거북과의 또 한번의 만남을 위해 히꺼두와로 돌아왔다. 

터틀 포인트(turtle point)라고 불리는 히꺼두와의 한 해변에는 해초 같은 것들을 먹으러 오는 거북이들을  볼 수 있다고 들었던 터라 숙소에서 천천히 그 해변을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오후의 히꺼두와 해변은 금빛 햇살을 실어나르는 파도들이 잔잔한 포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다와 경쟁하듯 짙푸른 하늘 사이로 쭉쭉 뻗어있는 야자수에 걸린 뭉게구름이 포스터속 한 장면 같은 남국의 풍경을 펼쳐보이고 있었다. 

도착한 터틀 포인트에는 다른 곳보다 유독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바다속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거북이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바닷물은 차갑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들어가다가 파도에 떠밀려 몸이 뒤로 넘어졌는데 순간 둔탁한 물체가 몸에 닿아 기겁을 하고보니 커다란 바위만한 거북이 한 녀석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난생 처음 거북이 등에 올라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현지인 아저씨 한명이 비둘기 모이주듯 해초를 손에 쥐고 거북이를 사람이 많은 곳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신기함과 부드러운 미소가 만연했다. 

이 신비의 동물은 바다 속에서 만났을 때와의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경계에서 만나는 바다거북은 좀 더 가까운 존재인 듯 느껴졌다. 

더 이상 먹을 해초가 없어지자 녀석은 껌뻑껌뻑 좌우를 살피다가 몸을 깊은 곳을 향해 유유히 헤엄쳐갔다. 지켜보던 사람들 중 몇몇이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노을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손바닥 위를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의 여운과 엉겁결에 엉덩이를 통해 느껴졌던 그 단단하지만 차갑지 않은 물체감의 전율이 길게 이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경험인 듯 했다. 


이 바다 속 어딘가에 오늘 보았던 꼬마들의 어미도 다른 가족들도 살고 있겠지... 그 꼬마들이 건강하게 자라 언젠가 어느 바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상처입은 거북들도 언젠가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길 기도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상태이겠지만, 뒤늦게나마 우리의 무지와 실수로 망가뜨려버린 자연의 상흔들을 보듬어가며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고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삶을 꿈꾸는 것이야 말로 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살아온 ‘인간다움(humanism)’ 의 정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찬란히 해가 뜨고 바다는 눈부시게 빛났지만, 왠지 모르게 어제보다 오늘의 바다가 그리고 노을이 조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by 김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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