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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Aug 19. 2020

부모도 은퇴할 수 있을까?

시작은 분명하지만 끝이 모호한 부모 역할,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부모 노릇 4년 차, 일반 기업으로 치면 갓 대리 정도의 직함을 달고 '좀 할 만하다'며 의욕을 불태울 시기에 벌써 은퇴를 생각한다고? 혹시 몰라 미리 밝히자면 이건 '그만두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잘하고 싶어서' 미리 세워보는 은퇴 계획에 관한 이야기다.   

                

 부모가 되기 전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중 실제 부모가 되었을 때 새삼 굉장한 무게로 느껴지는 사실들이 있다. 내 경우엔 그중 하나가 부모 됨의 불가역성, 즉 부모가 되기 이전으로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흔이 다 되어 육아를 시작하고, 이제 곧 칠순을 앞둔 친정 엄마까지 쌍둥이 손주 육아에 끌어들이는 불효를 저지르다 보니 대체 이 부모 노릇이라는 게 끝은 있는 건지, 그렇다면 무엇을 끝이라고 봐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부모 노릇은 내 나이가 20대든, 30대든, 40대든 아이의 출생과 발달에 따르게 마련이다. 즉 나이가 마흔이고 직장에서는 진짜 은퇴에 성큼 다가선 상황이라도 지금 아이가 태어났다면 부모 역할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실제 이런 경우 부모는 아이의 뒷바라지 문제로 사회적 은퇴를 두려워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부모 역할에는 정년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라는 기준도 없다. 직장에서는 하루하루 정신없이 일하다 (정년을 채우던 못 채우던) 어느 날 갑자기 은퇴하는 기분이지만, 고로 대부분은 은퇴 계획이란 걸 세울 틈도 없이 은퇴를 맞이하지만, 부모 노릇은 하루하루 정신없이 몰두하다가 영영 은퇴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앞서 적었든 부모 노릇엔 '그만하면 되었다'는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상황이나 육아관에 따라 각자 그리는 은퇴의 그림은 다를 수 있고, 은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가까운 예로 나의 친정 엄마는 입버릇처럼 "내가 죽어야 부모 역할이 끝나지."라고 말하는 은퇴 거부자(혹은 포기자)다. 그 덕에 난 쌍둥이 육아를 무난히 버티고 있지만, 또 그래서 '은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땐 일말의 민망함을 감수해야 한다.          

       

무엇이 무엇이 은퇴일까


 부모 역할에서 은퇴하는 것은 어떤 상태를 뜻할까? 직장에서 은퇴를 하더라도 각자 꾸리는 은퇴 이후의 삶은 천차만별이다. 부모로서 은퇴를 생각할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동반'이었다. 이 단어가 처음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은 육아잡지 에디터 시절 부모교육 전문가 이성아 대표(자람패밀리)와 진행했던 인터뷰에서였다. 그녀는 부모 역할의 6단계에 대한 갈린스키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그 마지막 단계가 '동반'임을 강조했다.

               

"부모 역할의 중요한 마지막 단계는 '동반'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스스로 충분히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 부모도 아이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바로 '동반'이죠. 부모 역할의 최종 지향점, 자녀가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도록 온전히 독립시키는 것 역시 부모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당시엔 결혼도 하기 전이었지만 부모 역할의 마지막 단계가 '동반'이라는 말이 내겐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왠지 나는 언젠가 쿨하게 아이를 내 품에서 독립시키는 부모가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지만 육아도 교과서대로 열심히 하면 통한다고 믿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고작 36개월 아이를 키웠을 뿐인데 '분리', '독립'이란 내게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나 없는 아이들? 아이들 없는 나? 지금은 어려서 그렇다 치고 나중에 스무 살이 넘으면 자연스레 분리가 될까? 마흔이 넘은 딸과 손주들까지 챙기느라 지금도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친정 엄마를 보더라도 그건 때가 된다고 자연스레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은퇴 설계의 시작은 은퇴 시기의 결정, 그리고 목표 설정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조언이다. 부모 역할에서의 은퇴도 마찬가지 아닐까. 목표를 정하고 자원을 분석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그리 이르진 않을 것 같다.

                


부모 은퇴, 그게 가능해?


 대학원에서 중노년기 가족에 대한 수업을 들을 때 주요하게 다룬 주제 중 하나가 은퇴에 관한 것이었는데, 은퇴가 가족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사회적 은퇴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부모로서 은퇴를 고민할 때도 참고할 부분이 꽤 있다. 스스로 은퇴를 결정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은퇴 당사자는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상황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 은퇴를 선택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녀의 독립, 그리고 배우자와의 관계이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아직 독립하지 않은 자녀가 있다면 부모는 직장에서 은퇴를 망설이게 된다. 이는 부모 역할에서 은퇴를 고민할 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독립할 준비가 되어야 부모도 마음 편히 부모 역할에서 은퇴할 테니까. 그런데 독립적인 아이는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아기 때처럼 내내 챙겨주고 맞춰주기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 이제 독립하렴. 엄마도 좀 은퇴할게."라고 한다면 아이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갑자기 막 독립심이 솟아날까? 결코 아닐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갈린스키는 아이의 독립을 돕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교과서대로 표현하자면 그는 이 마지막 단계를 '떠나보내기'라고 했는데, 개인적으론 이성아 대표가 풀어 설명한 '동반'이란 단어가 우리 정서엔 더 적절한 것 같다. 아이의 독립을 돕고 나도 아이에게서 어느 정도 독립하여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응원하고 바라봐주는 관계, 그 정도면 꽤 괜찮은 부모 은퇴자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의 영아기, 유아기, 학령기, 청소년기, 성인기까지 부모의 역할은 쉴 새 없이 계속되는데, 아이의 성장에 따라 부모의 역할도 함께 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모의 역할은 크게, 보호, 양육, 훈육, 격려, 상담, 그리고 동반까지 총 6단계로 볼 수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호 - 아이가 어릴 때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물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
양육 - 정서적으로도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 잘 자라도록 돕는 것 
훈육 - 사랑과 존중의 관계에서 아이가 행동에 책임을 지고 한계를 정하도록 교육하는 것 
격려 -  아이가 소속감, 자신감, 가치감을 갖도록 용기를 북돋고 지지해주는 것 
상담 - 긍정적 의사소통 체계를 유지하며 아이의 선택 상황에 대해 조언, 지도하거나 공감하는 것 
동반 -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아이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서로 의지하며 돕는 것           


 보기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정작 잘 해내려면 만만치 않은 일들이다. 이제 막 보호 단계를 지나 양육과 훈육의 단계에 들어서 보니 이 간결해 보이는 역할들이 실제론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어려운지... 매일 고민하고 헤매는데도 나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나뿐일까.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내 욕구는 가뿐히 접어야 하고, 아이의 마음이 자라는 동안 내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아이에게 올바름을 가르치는 동안 나의 부끄러운 빈틈을 마주하는 일도 다반사다. 미덥지 않은 마음을 감추고 무조건 아이를 믿어줘야 할 때도 곧 올 것이고, 아이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듣는 동안 불쑥불쑥 가르치고 싶은 욕구, 참견의 말들은 얼마나 꾹꾹 눌러야 할까.

               

 결국 이런 치열한 부모 역할 끝에 '동반', 즉 아이와 나의 독립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 은퇴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신의 직업에 몰입해 높은 성취감과 보람을 느낀 사람일수록 은퇴 후 생활에서 긍정적 경험을 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그 무엇도 내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고 어찌 보면 그것이 당연하겠지만, 부모로 살아가는 동안 내 역할에 몰입하는 것, 운이 좋아 그 과정에서 성취감이나 보람까지 따른다면 그 자체가 긍정적인 부모 은퇴 준비가 되는 셈이다.    

             


은퇴를 계획합니다   

       

 은퇴는 자발적으로!     

 은퇴에 관한 과거 연구들은 은퇴를 위기나 스트레스로 보는 경향이 강했지만, 요즘은 생애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이(transition)로 보고 그 맥락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은퇴 전이는 가급적 자연스러울수록 만족도가 높은데, 즉 어느 날 갑자기 퇴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준비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모 역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새 훌쩍 자란 자녀에게 불필요한(혹은 귀찮은) 존재가 되어 갑자기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스스로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은퇴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양육' 단계가 지난 후부터 아이에게서 한 발짝씩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부모 눈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못 미더워 자꾸만 대신해주고 잔소리를 하게 되지만, 아이의 독립성이 자라는 동안 그것이 계속되면 어느 날 아이가 내게 조기 은퇴를 권할지 모를 일이다.

                  

 자원은 차곡차곡!     

 은퇴 설계의 핵심은 자원 마련이다. 사회적인 은퇴는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만 부모 역할의 은퇴를 고려할 땐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부모 역할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부모로서의 삶에 (어떤 종류로든) 동반자가 되어 준 배우자와 함께 할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흔히 부부 관계가 나빠진다는 육아 기간 동안에도 배우자와 잘 지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건 육아보다 어려울 수 있다.) 은퇴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당연한 결과지만 배우자와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은퇴 후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사이가 좋기 때문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도 부정적 영향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아이가 남편보다 1천 배 정도 더 예뻐도 굳이 솔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평생을 두고 보면 배우자로서의 역할이 부모 역할보다 몇 배는 더 길 테니 말이다. 그것이야 말로 정작 은퇴도 어렵고!          

     

 후회 없이 사랑하기!      

 법륜 스님은 <엄마 수업>(휴)에서 '어릴 때는 따뜻한 게 사랑이고, 사춘기 때는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이고, 스무 살이 넘으면 냉정하게 정을 끊어주는 게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아이의 성장에 따른 부모의 역할이 3단계든 6단계든 혹은 12단계든 핵심은 결국 '사랑'이 아닐까. 사랑하기 때문에 때론 나 자신도 내려놓고 그렇게 부모 역할에 몰입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 역할에서 은퇴 함으로써 아이가 홀로 서도록 돕는 일도 어쩌면 나보다는 아이를 위한 일일 것이다. 이는 오롯이 수고한 나를 위해 선택하는 사회적 은퇴와 가장 다른 점이기도 하다.   

             

 박노해 시인의 아름다운 시 '부모로서 해 줄 단 세 가지'의 한 구절처럼 아이와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동안' 부모로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사랑이기를, 이를 바탕으로 아이도 용감하게 홀로 서 미래로 나아가기를, 그래서 언젠가 부모 역할에서 은퇴할 때 내게 남는 후회가 없기를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처음 하는 은퇴 설계니까 좀 거창해도 괜찮을 거라고 합리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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