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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m May 19. 2023

연락처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연락처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요즘 애들은 모를 019로 시작하는 옛날 휴대폰 번호.

내가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전화번호인 외가댁 전화번호와 뒷자리 네 개가 똑같은 전화번호.


외할머니는 우리가 도착하는 시외버스정류장에 꼭 1시간이나 먼저 와서 기다렸다. 팥죽색 동그란 뜨개 모자를 쓰고 자동차 강아지처럼 쳇머리를 흔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좋은 사람이었고 '인자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빚으면 할머니가 나올 것 같은 그런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아침마다 조용히 혼자 불경을 외고 있던 동그란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때가 부처님 오신 날 즈음이었던가. 그날도 할머니는 혼자 절에 가셨고, 당뇨가 있던 할머니께서 저혈당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곧바로 정신을 차렸지만 지나고 보면 그게 오히려 독이 됐다. 쓰러질 때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뇌에 큰 충격이 갔지만 겉으로 티가 안 났다.

할머니는 갑자기 그렇게 뇌출혈로 인한 치매를 앓게 되셨다.


할머니는 가끔은 나를 알아봤고 가끔은 몰라봤다. '니가 영남이 딸이가?' 하시면 기분이 이상했다.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는 TV 속 사람들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화를 냈다. 내가 알던 할머니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두 명의 효녀와 두 명의 효자가 있었다. 할머니께서 쌓아놓은 덕이 많으셔서인지 모두 내로라하는 효자, 효녀들이었다. 같은 집에 사는 큰외삼촌과 같은 도시에 사는 이모는 매일 같이 살뜰히 할머니를 돌봤고, 멀리서 사는 작은 외삼촌과 엄마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드리며 정성껏 할머니를 보살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서 전처럼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할머니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하지만 그대로 그 자리에 계셨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어느 날 엄마가 연락을 해오셨다. 할머니가 병원에 계신다고.

고향인 강릉에 가셨다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그 길로 강릉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신 것이었다.

그쯤에 난 관리하던 과제 평가를 앞두고 준비할 것이 많아 "한 번 찾아봬야겠네"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퇴근 후 남편에게 조만간 병원에 찾아봬야 할 것 같다고 말해두었다. 또 며칠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전화가 왔고 할머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 전해왔다. 다음날 연차를 하루 쓸까 고민하다 이틀만 더 보내고 토요일에 찾아뵙기로 했다. 그러고 바로 다음 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울먹이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 과제가 다 뭐라고. 오늘 찾아뵀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갈걸. 그냥 갈걸.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조퇴하겠다고 말씀드리는데 감정이 주체가 안 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을 안 할 순 없어 같이 일하는 샘에게 계속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 자료는 여기에 있고 오늘까지 공문을 꼭 보내야 한다는 당부를 전하고 집으로 향했다. 나이가 들면 이런 이별에 무뎌진다는데 언제쯤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장례식장 내려가는 내내 했던 것 같다.

 

장례 단상에는 조금 낯선 진보라색 고운 모자를 쓴 할머니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걸려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할머니 장례식장에서는 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를 것 같던 눈물은 누가 아이고- 아이고- 선창을 시작하면 마치 처음처럼 후두둑 흘렀다.


엄마가 생전 처음 듣는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엄마 고마웠어.

엄마 고마웠어.

엄마가 내 인생의 버팀목이었어.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들어주길 바라는 듯 엄마는 외치고 또 외쳤다.


장례식 후 몇 달 동안은 앉았다 일어설 때 입버릇처럼 나온 '아이고' 소리에도 금세 마음이 울먹였다.


 



외할머니

휴대폰   019-xxx-xxxx
집           051-xxx-xxxx
그룹       가족


엄지를 아래로 움직여 휴대폰 하단 < 모양 버튼을 누른다.


외삼촌, 외숙모, 외할머니. 단란한 가족이 여기 그대로 남아있다.

여전히 할머니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하지만 그대로 이 자리에 계신다.

나는 이번에도 할머니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화면을 끈다. 다음번에 또 우연히 만날 것을 기대하며.


할머니, 다음에 또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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