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종주국인 영국에서도 난리다. 클럽 축구는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고 유수한 팀들을 보유한 영국이지만 국제대회는 초라하다 못해 웃음거리가 된 적도 많았다. 1966년 잉글랜드 우승 이후 그럴만한 성적을 못 거둔 영국 팀(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 아일랜드)은 국제대회에서 그렇게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지금까지 유럽대륙 라이벌, 특히 독일의 변함없고 탄탄한 축구성적을 보며 한없는 선망과 질투의 시선을 숨기는 자존심 강한 영국이니 옆에서 보기에도 딱했다. 영국인들은 영국축구의 상징인 세마리의 사자가 포효할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영국에서 축구는 오랫동안 노동자 계층의 스포츠였다. 테니스와 골프, 그리고 크리켓이 영국의 오랜 신분사회의 역사에서 계층의 상위에서 사랑을 받았다면 축구는 그 아래 산업화의 뒷면에서 밀려난 도시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스포츠였다. 유수한 영국의 명문 구단들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를 단번에 알수있다. 공업화의 상징적 도시인 맨체스터의 두 클럽(맨유와 맨 시티)도 그렇고, 한때 이름께나 날리던 무역항구들이었던 리버풀의 두 클럽도 그렇고 글래스고우의 두 클럽도 마찬가지다. 리버풀의 두 클럽인 ‘리버풀’과 ‘애버톤’은 또 종교간, 즉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대결이었다. 그래서 애버톤이 잉글랜드 사람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의 팬이라면 리버풀은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이민자 팬들이 많았다. 이 종교간 대결은 리버풀에선 거의 사라졌지만 스코틀랜드의 최대 도시 글래스고우에선 현재진행형이다. ‘레인저’가 프로테스탄트 팬들이라면 ‘셀틱’은 가톨릭 팬들이다. ‘셀틱’은 한 가톨릭 신부가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살았던 이 도시의 한 구역에서 창설했다. 가끔은 혈투가 이 두 클럽의 열혈팬들 사이에서 발생해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지역병원들이 비상에 들어가기도 한다. 지금은 은퇴한 명장,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한때 ‘레인저’에서 왕따를 당했는데 이유는 그의 아내가 가톨릭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교적 옹졸함은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북 아일랜드에선 아직도 건재하다고 한다...
영국이 축구를 발명했고 인기종목으로 퍼뜨렸다면 프랑스는 지금의 축구 월드컵을 조직했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어로도 축구는 ‘풋볼(football)’이라 한다. 종주국 단어를 예의(?)상 그대로 사용한다. 하지만, 월드컵 조직은, 영국으로선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한 프랑스 변호사의 열렬한 관심과 공헌에 의해 탄생했고 성장발전했다.
그는 ‘쥘 리메(Jules Rimet)’였다.
리메는 ‘자유 나라’란 문자적 뜻이있는 프랑스 동쪽의 ‘프랑쉬-꽁테(Franche-Comté)’지역에서 1873년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 일생은 수도인 파리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밭을 갈며 살던 농부였다. 그러나 ‘보불전쟁’ 후 악화된 경제사정으로 땅을 팔아야했고 나중엔 으레 당시의 시골사정이 그렇듯이 가족생계를 위해 대도시 파리로 옮겼다. 어린 리메를 남기고 부모는 돈벌이를 위해 파리로 떠난 것이다. 리메는 할아버지의 손에 맡겨져 그곳 시골에서 자랐다.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며 미사에서 복사를 섰고 성가대에서 노래도 불렀던 소년이었다. 부모아래 자라지는 못했지만 리메의 어린시절은 그런데로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다시 경제사정이 악화되었고 1884년 10살이던 리메는 고향인 시골을 떠나 부모님이 살고 있던 대도시 파리의 ‘그로 께유(Gros-Caillou)’구역으로 옮겨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지금 에펠탑이 있는 파리 7구역인 이 세느강 왼편은 당시 시골에서 올라 온 도시빈민과 노동자 계층이 몰려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똑똑한 어린이는 후에 변호사가 되었다.
그가 스포츠를 통한 화합을 바란것은 특히 이런 어린시절 경제적 어려움이 많은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시골에서 올라 온 노동자계층 출신으로 성공한 그에겐 항상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더구나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1891년 공표된 교황 레오 13세의 노동헌장인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새 사태)’이 제시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공감을 하고 어떻게 이 새로운 사태에 대처할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계속 그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가 찾은 해답은 스포츠였고 특히 그 중에서도 단체경기인 축구를 손꼽았다. 1891년이니 당시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은 산업화로 인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도시빈민과 또 무신론인 마르크스 주의가 스멀스멀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다. 그는 파리의 가톨릭 노동자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그들의 고충도 쉴새없이 들었다. 그런 그와 그의 동료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경제적 편의와 의료혜택을 주는 조직도 창설했고 그의 이런 실천에 영감을 준 레오 13세 교황의 헌장을 탐독 공부하였다. 또 이 헌장을 실천하기 위한 실천적인 여러 방법들을 강구하기도 하였고 이는 곧 ‘가톨릭 사회교리(Catholic social teaching)’의 직접적 실천이었다. 그래서 그는 변호사였을 뿐 아니라 또한 당시의 사회변혁을 위한 사회개혁가였다. 1897년엔 붉은 별(Red Star)이란 클럽을 창시했고 직접적으로 축구행정에 관여하였다. 당시 상황은 노동계층의 젊은이들이 사회적인 약자로 공산주의로 기울거나 당시에 팽배했던 반-종교주의나 반-사제주의로 기우는 것을 막기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 ‘붉은 별’ 클럽은 명문 클럽으로 도약했고 ‘프랑스 컵’에서 세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공백이 있었지만 리메는 그의 가톨릭 사회교리에 기반한 사회개혁과 사회화합의 의지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꿈은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는 프랑스 축구연합(the Fédération Française de Football) 회장을 맡았고 1921년엔 지금의 세계축구연맹인 ‘피파(FIFA: the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회장이 되어 장장 33년동안 이 ‘피파’를 이끌었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차 대전의 참상을 직접 보고 경험한 전쟁 참여 자로서 축구가 “이해를 도모하고 세계 인종간의 화합’을 추구한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1930년 월드컵 1회 개최지였던 우루과이로 증기선을 타고 유럽에서 건너가며(가는데 석달 걸렸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딴, 가방속에 넣어 가져갔던, ‘쥘 리메 컵’은 이제 월드컵의 상징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바로 한해 전인 193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히틀러의 독일도 참가) 대회였고 이런 연유로 그는 1956년 노벨 평화상에 추대되었으나 직접 받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그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리메는 여러모로 ‘아마추어 스포츠’를 강조했던 쿠베르탕 남작과 다르다. 쿠베르탕을 비롯한 많은 스포츠계의 거물들은 귀족과 부유한 집안배경 출신으로 스포츠를 상류층의 여가활동으로 여겼다. 영국에서 발생한 테니스의 역사를 보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리메는 축구선수들이 마땅히 그만큼의 금전적 대우를 받는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이 완벽(perfection)을 추구한다지만 ‘완전한 걸 세상 어디에서 찾을수 있을까?(Can perfection be found in this world?)”하며 그는 반문을 던졌다. 리메는 당시의 노동계층의 젊은이들이 급속히 자본주의로 변모하는 세상에서 그들도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이윤추구를 하는게 뭐가 이상하냐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올림픽도 월드컵도 모두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고 돈과는 뗄레야 뗄수가 없는 밀접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너무 나간 것은 혹시 아닐까?
하지만 쥘 리메가 주창한 축구를 통한 그 평화의 가치(the value of peace)는 결코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회 계층간의 화합으로 시작된 평화화 화합의 염원이 나아가 국가와 국가사이, 또 인종과 인종사이로 번져간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스포츠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말도 맞는 말인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