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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쌤 Nov 09. 2020

코로나 시대 어린이에게 필요한 생각의 사생활


앉으면 안 돼요. 5분 내로 책만 후다닥 빌려서 나가기로 해요.

독서교실 한 켠 작은 독서방의 바닥과 쇼파에 붙여둔 메모이다. 코로나로 휴강을 두 차례 했고 두 번째 개강에서는 거리두기식 운영에 대해 더 고민을 했다. 그중 한 가지는 모두 1인용 책상으로 바꾸어 교실 배치를 달리 한 것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독서방에 '앉기 금지' 메모를 붙여둔 것이었다.


거실의 수업 공간은 환기도 용이하고 어린이들간의 거리도 잘 유지가 되지만 문제는 독서방. 책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에는 잠시나마 편하게 읽으라며 개원할 때 큰맘 먹고 산 1인용 쇼파 두 개가 나란히 사이좋게 있다. 책과의 설레는 조우를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케아에 가서 제법 비싼 조명을 사와 책장 위에 설치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어린이들도 부드럽다고 좋아하는 반들반들 러그도 깔아두었다.


매일 오는 어린이들이 반납하는 책이 어마어마해서 바로 정리를 못해 널브러진 모습을 자주 보아야 하는 것이 다소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어린이책 큐레이션부터 도서대여 굿즈들을 마련하고 정리하며 내가 가장 공을 들이는 곳이 바로 어린이 독서방이다. 1인 쇼파가 나를 깊이 안아주는 그 느낌을 알기에 나도 가끔은 들어가서 조용히 책을 읽다 나오는 곳.





부모님의 사정으로 두어 달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내 기억에 또렷히 새겨져 있는 5학년 은성이는 오자마자 현관 옆 오른쪽 방인 독서방으로 직행했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서는 슬라이등 도어를 밀어 슬며시 문을 닫는 모습을 거의 매주 보았다. 아이들이 오기 전 원래 있는 방 조명과 은은한 조명을 다 켜 두어도 3학년 솔이는 큰 조명을 켤 필요는 없다면서 은은한 조명만 해 달라고 매번 부탁하기도 했다.


독서방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서 일부러 일찍 온다고 하는 수정이는 오자마자 책을 펼쳐들고는 읽다가 사색하다가 한다. 책을 가만 들고 깊은 쇼파에 몸을 푸욱 담근채 머무는 그 시간을 즐기는 모습은 보는 나에게도 충만함을 주었다. 이 방 하나만 떼어다가 자신의 집에 가져다 두고 싶다는 말을 1년 넘게 하는 채림이도 이 독서방을 사랑해 마지 않는 열혈 어린이 독자이자 독서방을 사랑하는 어린이다.


문을 밀어 닫다가 손을 다칠까 싶어서 한 때 문닫기를 금지했지만 그 아늑한 공간에서 홀로, 또는 친구들과 소담소담 머물고 싶어하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언젠가부터는 금지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먼저 은근슬쩍 닫아주기도 했다. 그래봐야 수업이 시작되기 전 겨우 5분 10분 밖에 안 되는 시간을 머무는 곳에서의 자유함을 빼앗을 수 없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오늘 오전 청소를 하며 서른다섯에 작가가 되었다는 은희경 작가의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 들었다.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고 마음 둘 곳은 책 뿐이었다는 은희경 작가의 책사랑 이야기가 계속 펼쳐졌다. 동네에 책을 가져와 빌려주는 이동도서관의 담당 청년에게 괜한 연정을 품어보기도 하고 책을 통해 '생각의 사생활'을 누리다보니 하고 싶어진 일이 글쓰기였다는 그녀. 그것이 작가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저 앉아 그 부분을 보고 또 다시 보았다.


아, 그렇구나. 잠시의 시간이지만 어린이들이 그곳을 자기만의 공간으로 갖고 싶어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나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곳,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곳, 그 누구의 잔소리도 압박도 듣지 않고 평화로울 수 있는 곳, 결국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생각의 사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곳. 그걸 알기에 어쩌면 나는 5분의 시간이라도 죄책감 없이 마음껏 게임하고 싶다며 스마트폰을 꺼내든 민수에게 하지 말라고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린이가 한 사람으로 태어나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며,그 표현을 존중 받으며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무례한 것 천지다. 하영이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다가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게 느닷없는 잔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어린애가 돈을 들고 다니며 게다가 함부로 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사오기 전 독서교실이 고층에 있었을 때에 엘리베이터를 타면 자주 만났던 어느 아저씨는 독서논술교실 간다는 말에 '어린 것'들이 무슨 논술을 하냐며 대뜸 무시했다고도 했다.


준비물을 사려고 문구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돈 없으면 들어오지 말라는 고함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주머니 사정 검열을 당했다며 속상해하던 준영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 어린아이가 뭘 아냐며 생각을 무시당하다 못해 어떤 선택을 할 때 한 공간에서 배제 당하는 수많은 상황들, 어린이에 대한 일상적 무례와 언어폭력은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나아지지를 않는 것 같으니, 그럼 어린이들은 어디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어디에서 생각의 사생활을 누리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코로나가 시작된 후로 우리 모두가 처참하게 힘들고 너덜한 마음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역설은 누군가는 거리는 커녕 더 밀착된 삶을 갖게 되어 서로를 지독히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루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힘겨움은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다.


힘들지 않은 이 하나 없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어린이다. 무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려고 그 아무도 모르게 홀로 아등바등했을 어린이들. 그런 어린이들에게 학교는 공부만이 아닌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장소였을 수도 있다. 학교를 오고 가는 길에, 운동장 어느 곳에서, 쉬는 시간 친구들과 놀며, 그리고 교실 어느 한 곳에서 자기만의 시간, 생각의 사생활을 보장 받았을지도 모를 아이들.


그런 학교를 제대로 가지 못하게 된지 1년이 되어가니 슬슬 걱정이 몰려온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 상황이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1단계로 낮추어지면서 매일 등교를 하는 학교도 있다고 하나 언제 다시 못 가게 될지 모르는 이상황이 불안할 뿐이다. 도무지 무엇때문인지 모를 불안과 불편의 이유가 '어린이들의 생각의 사생활'을 보장받을 곳이 사라진 것 때문이라는 생각에 은희경 작가의 강의가 내 가슴에 콱 박혀버린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 밤이면 모여들어 술담배를 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비록 보기 싫을지언정 섣불리 꼰대질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엄마들이 오전에 카페에 앉아 커피타임을 누리는 모습에 함부로 한가함이니 뭐니 운운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아빠들이 이 시국에도 바로 오지 못하고 술한잔을 걸치는 것을 무작정 비난만은 할 수 없는 이유도, 이 모든 것이 잃어가는 자기를 찾기 위해 자기만의 생각의 자유, 생각할 시간이라도 갖기 위한 몸부림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일은 각자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일, 버지니아 울프의 제목대로 자기만의 방을 갖는 일이다. 보호도 사랑도 받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내가 틈만 나면 얹혀살던 할아버지댁 옆 산에 올라가 혼자 있었던 이유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유일하게 나 자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가만 누워 하늘을 보는 그 시간에라도 얻을 수 있었던 위안과 생각의 자유.


그래도 우리는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어른이니까, 힘들어도 챙겨야 하는 어린이들을 잊으면 안 되니까, 어린이들의 생각의 사생활을 누릴 시공간을 허용해 주면 좋겠다. 노크 없이 아이 방문을 열지 않기를, 어린이들의 입을 막는 일이 없기를, 사회에서 만난 어린이들에게 사연도 모르는 잔소리를 함부로 하지 않기를, 비록 책이 아닌 스마트폰을 들고 있어도 때론 모른체 해 주기를.


어디에서 생각의 사생활을 누려야 할지 모르며 자신을 찾기도 전에 잃어가는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이 시간이 끝을 모르고 계속 될까봐 문득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잠시나마 앉아 생각의 사생활을 누리던 그 작은 독서방에 '앉지 마시오'라는 안내 종이를 붙일 수 밖에 없었던 그 슬픈 마음이 거두어지는 날, 종이를 떼어버리고 '마음껏 앉아 읽고 생각하고 누리세요'라는 안내 종이를 붙여도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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