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내가 서점을 한다
조금 슬픈 얘기지만, 우리 아버지는 자식 훈육이 매우 거친 남자였다. 그는 굉장히 화가 많이 나면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게!”라며 나를 다그치곤 했다. 장차 부모가 되고 싶다면, 웬만하면 저 말과는 아주 멀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저런 잔소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자란 아이는 겁이 많아지고, 자신에 대한 신뢰도도 떨어진다. 내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
말하고 나니 슬픈 얘기가 돼버리고 말았지만, 2024년 새해가 밝은 1월에 아버지께 내가 서점을 차려보겠노라고 선언을 했을 때도 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으면서, 이런 불경기에 도대체 뭘 하겠다는거냐!”라는 잔소리를 시작으로 원투펀치 쓰리 강냉이, 어퍼컷까지 휘황찬란하게 맞았다. 2년 7개월 다니던 작은 언론사를 퇴사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퍼컷은 사람을 혼미하게 만든다. 나는 그날 밤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고, 눈물이 참 많이 났다.
사실 아버지 말대로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긴 했다. 30살이 넘은 시점에서 내가 걸어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모난 곳 없어 보이는 성격을 가진 어느 정도 똘똘한 아이가 어리바리 살아온 시간 같았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력은 좋았지만, 반복과 노력에는 절대적으로 재능이 없었다. 새롭게 배우는 건 좋아했지만, 새로 배운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숙련에는 취미가 아예 없었다. 재수, 삼수까지 마치고 그렇게 해서도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을 가지 못했던 때에 깨달았던 사실이었다. 수능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공부라는데, 나는 엉덩이가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학생이었다. 만화 도라에몽에서는 수학 공식을 빵에 적어서 삼키면 암기가 되는 ‘암기빵’이 나온다. 나는 그런 ‘암기빵’같은 공부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력은 안 하고 요령만 피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요령만 찾아다닌 한량이 시간과 엉덩이와 수많은 인생의 공력을 쌓아 올려야지 할 수 있는 글쟁이를 오랫동안 꿈꿔오고 있었다. 정말 어렸을 적부터, 그러니까 “너는 웃는 모습이 이금희 아나운서를 닮았으니까, 아나운서가 돼라.”라는 이모의 바람을 듣기 시작한 예닐곱부터 내게 글과 말은 내 일부 같았다. 어린 나이에도 ‘아나운서’가 얼마나 엘리트 직종인지 알았던 나는 ‘아나운서’가 되지 못하면, 뉴스를 보도하는 기자나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다. 물론 기자와 작가도 쉬운 업이 아닌데 말이다.
그랬던 아이가 어찌어찌 글도 곧잘 쓰는 아이였다. 어렵지 않게 백일장에서 상을 탔고, 내 일기를 눈여겨보던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방과후에 따로 글쓰기 수업을 해주기도 했다. 분명 ‘글’이라는 것에 재능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돌고 돌아, 특별히 모난 곳 없어 보이는 성격을 가진 어느 정도 똘똘한 아이가 어느 정도의 재능은 가지고 있는데 노력과는 점점 멀어지는 성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이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재수, 삼수로 이어진 대한민국 최대 과제인 ‘입시 실패’를 시작으로, 대학 생활은 무탈하게 보냈지만, 남들 다하는 취업 준비에서는 또 엇나간 길을 걸었다. 특별히 모난 곳이 없어 보일 뿐 나는 어렸을 적부터 분명히 모난 구석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것이 성인이 되면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1년, 이때도 나는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으로 세상을 방황했다.
사회적 시선과 연이은 어른들의 질타에 못 이겨 큰 뜻 없이 경제부 기자로 취직했지만, 이곳에서 나는 마음의 큰 병을 얻었다. 5개월 근무했고, 6개월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난 더는 사회로 나가지 않을 거야! 난 그냥 지푸라기처럼 살 거야!’라고 마음을 닫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꿈꾸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마음의 병을 이기고 다시 사회로 나갔을 때, 내가 원했던 단 한 가지는 ‘사대보험이 되는 직장’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회는 내 삶 이곳저곳에서 꽤 많은 돈을 빼가고 있었다. 그냥 말라서 부스러질 지푸라기가 꿈이었는데, 지푸라기 따위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힘은 정말 강력했다.
그리고 사대보험 다음으로 내가 원하고 이루고 싶었던 단 한 가지는 ‘청년내일채움공제’였다. 대한민국의 중소기업을 육성하고자 어쩌고, 국가와 기업이 청년에게 투자해서, 청년이 2년이나 3년간 중소기업에서 근무를 하면 천 만 원 이상의 목돈을 만들어주는 제도였다. 청년들 사이에선 ‘청내공’, ‘내채공’이라고 불렸던 그 제도는 난 한 번 실패해본 적이 있었다. 어렵게 기회를 다시 얻어서, 다음 회사에서 나는 다시 도전할 수 있었고 ‘2년 7개월’은 정말 내채공을 위한 시간이었다.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나는 2023년 10월 ‘청년내일채움공제’ 만기를 달성했다. 입시 실패로 가고 싶은 대학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내가,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아 좋은 연봉의 회사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내가, 수없이 다이어트를 하고 살을 다시 찌우며 다이어트 반복자가 돼 가고 있는 내가, 여러 외국어 학습지를 갈아타면서 아직도 ‘하이’, ‘헬로우’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2년 7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완성한 하나의 결실이었다.
적금 2년정도 붓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3년도 못 채우고 후다닥 회사 탈주를 감행한 나에게 아버지는 다시 한번 ‘(다니던 회사도 제대로 못 다니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이라는 질타를 보냈다. 또 파삭파삭 부서지는 삶은 감자 같은 모양새가 됐지만, 그래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 그래도 ‘청년내일채움공제’는 해냈어!”
‘청년내일채움공제’에 그토록 목을 매단 이유는 사실 그 기저에 ‘서점의 보증금’이라는 것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항상 나의 작은 공간을 원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글도 쓰는 나의 작은 살롱, 나의 책방.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내가 온전히 주인인 작은 아지트.
통장으로 꼿힌 2년 7개월간의 결실인 천만 원 남짓의 돈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제야 진짜 내가 해보고 싶은 게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르면 흐르는 대로 모나지 않은 척 허허실실 웃으며 지내왔던 시간에서, 뭐 하나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내가 뭘 하나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