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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밥 Jul 09. 2020

아무튼, 손글씨

내 안에 다 담을 수 없는, 나를 덜어내는 습관

 수다쟁이 우리 엄마는 전화 통화를 하실 때 아티스트로 변한다. 그 작품 대부분의 컨셉이 똑같은데, 이름하여 '(많을) 다, (우물) 정'. 다정!

 수많은 가로 선과 세로 선을 반복적으로 교차되게 그리면서 커다란 우물(井)을 그려놓으신다. 모나미 볼펜의 똥이 마구마구 나와서 음영까지 있는 깊이 있는 우물(井)을 말이다.

 분명, 통화 중에 메모한 노트에는 어떤 가게 이름, 연락처, 잠시 머릿 속에서 나온 메시지를 적은 것이 시작이었는데 그 끝은 항상 '우물 정(井)'자의 향연이다.

 이렇게 통화 중엔 무의식중에 이름 모를 그림을 자주 그리시는 우리 엄마는 글씨를 참 잘 쓰는 분이다.

그 옛날 5, 60년대 생인 우리 부모님들 세대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특히나 뭔가 더 품위 있어 보이는 일이었기도 했다.

 이렇게 글씨를 잘 쓰는 엄마 덕분에 어렸을 적 부터 글씨를 잘 쓰려고 노력했고, 글씨를 잘 쓰는 남자를 보면 이 사람 꽤 근사하겠어 라는 선입견도 가지고 있다.(그런데 실제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옷 코디도 깔끔하다. 선입견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어느 날, 손글씨에 대한 글을 쓰기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차원에서 오래된 엄마의 일기장들을 찾았다. 엄마 일기장의 컨셉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1. 엄마가 묵상하신 성경 말씀 구절, 그 말씀에서 얻은 지혜 등을 적은 내용의 일기.

    우리에게 못해주셨다고 여겼던 것들을 멋진 함미*로서 손주들에게 채워주고 싶으시다고 한다.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으셨는지 조카에게 본인을 칭하실 때 '함미가...'라고 하신다.

     못해주셨던 거 없는. 그리고 조카에게 이미 귀여운 할머니이다.

2. 가계부이자 우리 집 살림을 잘 운영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살아낸) 아끼고 아낀 내역들

3. 계절감을 담은 엄마의 기분 좋았던 날, 설렘 가득했던 날, 그리고 내 눈물을 쏙 빼는 엄마의 고단했던 날의이야기


  글씨 잘 쓰는 엄마의 일기장에서 손글씨를 주제로한 글의 소재를 찾고, 제일 멋지게 써놓으신 엄마의 글씨를 몇 컷 찍으려던 나의 계획과는 반대로 엄마가 살아온 세월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마주했다.

 엄마의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데, 웃다 울다 했다. 그러다 엄마의 어느 고단 했던 날을 마주한 찰나에 마치 장마에 국지성 호우라도 내리듯 우두두두-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엄마가 일기장의 그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실지는 모르지만 내 눈물이 떨어져 얼룩진다면, 그 페이지는 더욱 슬퍼질까싶어 마저 다 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일기의 엄마 글씨는 글씨체마저 삐뚤 삐뚤 슬퍼보였다.




  일기장에 꾹꾹 눌러쓴 손글씨가 말을 하듯 글씨를 쓰는 동안 내 안에 다 담을 수 없는, 나를 덜어내는 습관 덕분에 잘 견뎌오며 오늘을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덜어내지 않으면 이 작은 몸과 마음이 이겨낼 수 없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 더욱 부지런히 정성을 들여 행복했던 마음을 손글씨로 저장해놓고 힘들 땐 펼쳐보아야겠다.

 힘들고 우울한 날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안예쁜 글씨로 슬픔을 노트에 덜어 내자.


 거창한 손글씨가 아니어도, 혹은 우물 정자를 그리더라도 편안히 내 손글씨로 써내려가는 비워내기.

우리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자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가장 가성비 높은 '비워내기 해소법'이지 않을까. 우리 엄마가 지금까지 잘 비우고, 다시 채우고, 그렇게 잘 살아오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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