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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레린 Clairene Dec 17. 2024

하얀 폭설 속, 온기를 나누다

그날 아침은 평범했다. 눈을 떴을 때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창밖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직 11월인데도 하얀 눈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잠겨버린 설경은 사진 속에서나 만나던 머나먼 북유럽의 아름다운 풍경 그 자체였다. 따뜻한 집 안에서 감상하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설경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탐스러운 장미가 가진 가시처럼, 나를 위험에 빠트릴 테니까.


과연, 대설주의보와 대설경보가 내려져 있었다. 하필이면 오랫동안 연락 못한 친구와 만나기로 이미 약속을 한 날인데, 과연 폭설을 뚫고 무사히 만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된 나는 약속을 미룰까 하고 친구에게 연락했더니, 바로 해맑은 대답이 날아왔다.

“SUV로 갈거라 문제없어. 천천히 조심히 갈게.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너무 설레!’

그녀의 밝고 쾌활한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내 친구답다.

“그래! 폭설 까짓 거, 한 번 나가보지, 뭐!”

나도 해맑은 설렘에 전염되어 호기롭게 외쳤다. 어느새 친구를 만날 기대로 내 기분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솟아올랐다. 친구는 서울에서 오는데, 기꺼이 가까운 판교까지 나가보자고 결심했다.


오 마이갓! 차를 찾아 차키를 ‘삑삑’ 눌러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제 깜박 잊고 실내에 옮겨놓지 않은 차에는 하얀 눈이 한가득 덮여 있었다. 빈틈없이 쌓인 눈을 힘겹게 치우고 시동을 걸었지만, 호기롭게 출발한 것과 달리, 시속 10km 이하로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살얼음이 낀 도로는 스케이트장처럼 미끄러웠울 뿐 아니라, 길가에 쌓인 눈 때문에 차가 자꾸 헛돌았다. 손과 팔에 잔뜩 힘을 준 채, 간신히 운전하여 판교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넘었다. 평소 7분이면 가는 카페까지 5배의 시간이 더 걸렸다.


카페에 들어서니, 온통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들에 눈이 부셨다. 조용한 재즈 캐롤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커피 향까지 어우러진 환상적인 공간이 나를 반겼다. 세상과 단절된 채 어느 이야기 속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집으로 초대받아 간 것 같았다. 다행히 친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은 나는 차가운 몸을 녹일 따뜻한 커피와 담요를 주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점점 아름답게 변해가는 창밖의 설경을 구경했다. 창밖에는 눈송이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커피의 첫 모금은 온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내 마음은 친구를 만날 기대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그때 친구는 온통 하얀 눈보라 속에서 근방을 헤매고 있었다.


늦었지만 무사히 도착한 친구의 차가워진 손을 반갑게 잡고 나는 얼른 따뜻한 카페로 친구를 이끌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겨울 기운은 내 마음을 데워주는 친구의 미소로 금방 사라져 버렸다. 나를 보며 반갑게 짓는 그녀의 미소는 따스한 아침 햇살 같이 환해서 나도 환한 빛에 곧 물들어버렸다. 내 친구는 시원시원한 성격과 어려운 일을 담대하게 풀어나가는 삶의 태도에서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특히, 서로 잘 되는 모습을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잘 풀리지 않는 일은 마음깊이 안타까워하고 진실로 고민해 해결할만한 방도를 찾아 얘기해 주는 면까지 닮은 솔메이트였다. 그러나, 내가 대기업을 그만둔 뒤로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특히, 그녀가 임원으로 10년을 지내는 동안에는 겨우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가, 금년에 그룹 자문으로 물러나면서 여유가 생겨 약속을 잡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입맛을 돋우는 브런치를 함께 먹으며 그동안 못다 한, 산처럼 쌓인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각자 큰 아이를 대학에 보낸 이야기와, 아직 한참 키워야 할 둘째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남편과의 문제, 우리 자신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의 계획 등.... 나 자신과 가족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참 신기하게도, 우리는 꽤 오랫동안 못 만났지만, 마치 어제 만났다가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대화가 아주 자연스럽게, 끝없이 이어졌다. 그날 그녀의 말은 얼어붙었던 내 마음을 온기로 가득 찬 봄에 데려다 주었다. 그녀 또한 남편과 시댁 문제로 고생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녀의 얼어붙고 차가웠던 세상도 나의 따뜻한 애정으로 온기를 느꼈으리라.

판교로 가던 도로의 설경

어느새 창 밖에는 다시 굵은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창문 밖에 내리는 눈은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축복하듯 춤을 추며 천천히 내려앉았다. 눈이 쌓이는 속도를 보니, 다시 서울로 돌아갈 그녀를 위해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우리의 만남은 앞으로 계속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오늘 만남이 썩 마음에 들었던지, 친구가 먼저 제안한다.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자.”

“그래! 나야 무조건 좋지. 만나서 우리의 계획이 어떻게 돼 가는지도 서로 얘기하고 조언도 해주자.”

나는 당연히 찬성했다. 한 술 더 떠서 일에 대한 계획도 함께 공유하고 같이 할 부분이 있다면 연결해 보자고 했다.

“그럼, 12월에 한 번 더 보고, 네 수술 끝나고 봄이 되면 다시 보자.”


그렇게 우리는 폭설 속 만남을 무사히 마쳤고, 다시 12월에 만났다. 나의 지인이 기획한 대규모 연말 행사에 나는 친구를 초청했고, 우리는 오랜만에 예쁘게(?) 꾸미고 파티에 가서 오후부터 밤까지 별처럼 반짝이는 시간을 함께했다. 그날도 내 친구의 웃음은 변함없이 새벽하늘에 떠오르는 햇빛과 같아서, 어두웠던 내 마음을 순식간에 밝혀주었다.


올해 끝, 다시 만난 친구는 오래된 책 사이에서 다시 찾은 예쁜 책갈피럼 반가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우리는 20년 지기 친구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동안 만난 횟수가 적으면 어떠하리. 마음과 성격만 잘 통하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앞으로도 우리의 앞에는 가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겠지만, 뭐 어떠하리. 이렇게 지혜롭고 어여쁜 마음을 가진 친구가 서로 옆에 든든하게 있는걸.


별빛 가득한 도시의 아름다운 겨울 야경처럼, 우리의 우정은 새해에도 반짝일 것이다. 눈 내리던 날 한 해의 끝자락을 따스한 온기로 채웠던 우리의 만남은 계속될 테니까.


별같은 빨간 단풍잎에 눈이 소복히 쌓여  폭설을 뚫고 만난 우리의 우정을 상징하는 것 같다

#우정 #설경 #연말모임 #폭설 #20년지기 #연말



이미지 : 제목 배경 및 크리스마스 사진은 pixabay,

나머지 설경사진은 직접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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