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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Jan 06. 2022

서른 살에 듣기 좋은 음악


서른 살이 된다며 친구들은 작년 연말까지 갖가지 얼굴의 소요를 만들었다. 누구는 한탄, 누구는 경악, 누구는 희망, 누구는 기대..., 나는 그 모든 떠들썩함 속에서도 그것이 마치 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공원 호숫가 중앙의 오리 떼가 피우는 잠깐의 소동에 물결이 일그러지고 그 위에 떠있던 연잎들이 조금 흔들거리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시간이 지났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먹은 한 살을 담담하게 여기지 못하고 꼭 한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는 것은 나이 서른에 엮여 딸려오는 수많은 사회적 인습 탓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 속에 매인 사람에게 부과하는 감정이란, 새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밤에 내가 윤상의 음악을 들으며 잠 오지 않는 밤을 어르고 달래는 것과 같다.


윤상의 2000년도 앨범 Cliche에서 돌아가는 트랙은 담담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내일이라도, 라는 토막난 구절들을 던진다. 나머지 가사는 들려오지 않고 스피커가 만들어낸 진동 안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중에 자신의 존재를 내 귀 속으로 던져 넣고 각인시키고만 그 구절들은 서른 살이 된 저마다의 외침이리라 생각한다.


이제서야 들국화의 음악 세계가 내 정서와 맞닿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제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리고 전인권 1집의 파랑새, 돛배를 찾아서와 같은 노래들이 왜 혁명적인지를 알 것 같다. 그 노래들은 광활하고도 막연한 세상에 던져진 미약한 개인이 자기에게 온통 둘러씌워진 끈끈한 막을 힘껏 늘리고 헤치고 찢으려고 하는 시도이다. 물론 그것에서 고개를 간신히 빼낼 수 있다고 해도 보이는 것은 앞을 가로막는 뿌연 시야와 힘빠진 무릎 아래의 터덜거리는 걸음일 수도 있다.


서른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명목상 성인이 된 이후로 10년이 지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도 있고 10년 단위를 뜻하는 영어 단어 decade도 있을 만큼 10년은 1년보다는 지속성이 있고 100년보다는 과하지 않은 한 묶음 세월이다.


2021년의 연말도 아니고 연초의 들썩임도 조금은 지난 2022년 1월 5일의 밤에, 성인이 된 후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하는 지금이야말로 내 지난 10년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다. 요즘 나는 요동치는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속에서 강렬하게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삶의 태도에는 보통 이상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력 이상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하려는 물리적, 정신적 시도도 동반되어야 이런 태도를 오랫동안 견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도 윤상과 들국화의 음악을 벗삼아 글을 쓰고 가지런히 잠든 후, 내일 아침에 일어나 또 언제 이런 밤을 보냈냐는 듯이 웃을 것이다.


잠들 수 없는 밤에 내가 할 일은 글을 쓰는 것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늘 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뻗쳐나간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 이것이 내가 지난 10년 동안 이룬 진보라면 진보이다. 그동안 해오고 싶었지만 번번이 고개를 돌렸던 그 외면의 밤들을 이제 저 도심 빌딩의 전광판 위 다른 곳보다 확실치 못한 암흑 속에 펼쳐놓을 것이다. 더 깊어져라, 밤이여. 나는 네가 얼마나 파고들든 굴하지 않고 오히려 너를 밀어넣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차원으로 끌고 들어가리.


윤상의 노래가 말한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아직도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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