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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Mar 05. 2023

볕 드는 골목



  더 많이 말할수록 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원하는 고요와 나를 짓누르는 애수를 조금씩 말려줄 음악은 오직 이 집에서만 허락되었는데 나는 여기서도 가만히 앉아쉬질 못한다. 한동안 소파에 앉지도 침대에 눕지도 못했다. 괜히 서성거리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침대에 두 팔을 괴었고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기도 했다. 걸어놓은 빨래들이 마르며 발목을 감싸는 싸늘한 공기를 조금은 데워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한다. 따뜻하지는 못하고 미지근하지도 않지만 건조하지도 않으니 어느 정도의 촉촉함만 기대하는 온도로.


  어떤 음악도, 어떤 그림도, 어떤 책도 열어줄 수 없는 굳게 닫힌 세계가 있고 가끔 그 곳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녹슬고 텅 비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그 날이 따뜻하고 특별히 춥지 않으며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빛나고 있는 주말의 오후라면. 아직 이마를 대고 엎드리다 한 팔을 괴고 비스듬하게 누울 권태가 허락되었다면.


  눌려지는 건반들은 시간을 밟고 간다. 마디마디가 눌려지며 작게 토해낸 신음들이 공기 속에 발을 구르며 물장구를 치는데 그 울림과 포말, 간혹 튀어오르는 물방울에 어떤 높낮이가 있어 나의 뇌는 그 순서를 기억하고 있다.


  그 시각 아빠는 땅에 움튼 봄꽃을 찍어보낸다. 그는 자연 속을 걸으며 함께 있고 답장 없는 나머지 가족들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조트로프 속을 들여다보며 그것이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는 데서 시간 속으로 놓여난다. 시간이 멈출까봐 음악은 돌아가고 손을 베이지 않고 종이 한 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떨리는 그 집요함으로 몇 가지 메모를 남기는 것만이 내가 저 아래 움직이는 모든 속된 것과 떨어져 있음에도 발붙일 수 있는 이유이다. 과도한 정신의 작용이 부과하는 모든 욕구의 말살과 내 자신이 살아있음으로 인해 행해지는 자각이 음악 하나가 끝나고 바뀜으로써 순식간에 깨어질 성질의 것이라고 해도 나는 이 고통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완전한 자기 현존을 목도하는 순간은 온 갈비뼈가 압박당해 질식할 만큼 숨이 뻐근해지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이 맥박을 버티고 선 내 뼈와 살이 이 모든 무게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몽롱하게 느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나는 사랑도 신도 없이 마침내 살아 숨쉬는 덩어리만을 손 안에 넣었으므로 그것을 굴리지 않을 수 없다. 울퉁불퉁한 것은 촉감이 아니라 아래 깔린 자갈길이고 그것을 감싼 포장지는 손바닥에 밀착되지도 않을 만큼 엉성하지만, 이를 쉬이 떼어버리지도 못하는 것은 내가 나와 그것 사이에 막 하나만이라도 존재하고 있기를 아직은 바라고 또 두려워하고 있는 까닭이다.


  홀로 뛰던 맥이 가느다랗게 끊겨 계속 움직이고 있던 지류에 풀려들어갔다. 음악을 고르면서 이 순간이 끝났음을 깨닫고 언제 다시금 벽에 난 햇빛의 눈금을 정지된 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을지 졸음에 겨워 눈을 깜박인다. 맥박은 여전히 뛰고 있다.




230305.

전혜린의 <목마른 계절>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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