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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구요

곰도 100일은 버텼다는데

by 디디


요즘은 남편과의 대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었다. 그 이유는 내가 바쁜 것도 있지만, 거의 매일같이 야근하는 남편의 늦은 퇴근 시간 때문이다. 행사의 계절 가을답게 대행사 직군인 남편은 온몸이 부스러지도록(?) 일하고 반시체가 되어 집으로 겨우 들어온다. 오십 넘어 이러다 건강을 잃는 건 아닐까 몹시 염려스러울 지경.


최근에는 겨우 주말이나 되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지난주 주말의 대화 주제는 '글쓰기 장애물'이었다. 회사를 알리는 데 필요한 글쓰기 앞에, 개인의 성장을 위해 쓰는 글쓰기 앞에 주저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회사를 만들었으니 나를 알려야 하잖아. 그동안 작업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블로그에 올리는데, 여기에 개인 성장일지 같은 걸 써도 괜찮을까? 업으로써의 나는 전문가이고 싶은데, 성장일지를 쓰는 나는 아직 말 그대로 성장 중인 거잖아. 아마추어처럼 보일까 봐 고민이야."



왜 뭐 어때? 그냥 쓰면 안 돼?
자꾸 스스로 허들을 만들지 마.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라는 온갖 경우의 고민 앞에 남편은 당황스러울 만큼 심플한 답변을 내놓았다. 어쩜 이렇게 상황을 정확히도 짚어내는지. 파워 J와 T를 장착한 남편다웠다. 그래, 사실 나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고민이 되는 걸 어쩌랴.




자유로운 영혼처럼 프리랜서로 10년 동안 잘 지내다가, 굳이 회사를 만들어 더 많은 일을 해보겠다며 사업자를 덜컥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더 많은 영역으로의 확장이 목표였으니, 나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야 했다. 그건 바로 나를 알리는 것. 홍보.


17년이나 일을 했으면서 내가 나를 스스로 알려본 적은, 예전 취업할 때 이력서를 쓸 때뿐이었다. 그럼 프리랜서일 때는?! 거짓말 같지만, 나를 직접적으로 알리는 행위는 손안에 꼽을 만큼 적다. 수많은 거의 많은 일을 연결에 연결로 10년간 이어왔으니- 이제 와서 나를 적극 홍보해 보는 일은 왠지... 주저하게 된다고 할까?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대체 왜?) 뭔가 프로페셔널하게 내가 해온 일들을 언급하며 파워 당당하게 나를 어필해야 하는 그런 홍보는 여전히 익숙지 않다.


사람 나이 마흔이 되면 정말 누구나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되는 걸까? 이 시기에 회사를 만든 덕분에 나는 회사의 탄생이 정말로 내 인생의 2막을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마치 회사의 성장이 나의 성장 같은 느낌이랄까? 이때의 내 모습은 앞서 '프로페셔널하게 어필해야 하는 내 모습'과는 상반된다.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실력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로서의 나와 반대되는, 말 그대로 우당탕탕하는 초보 사장이자 인생 2회 차를 준비하는 초년생 같다. 마치 두 개의 자아가 내 안에 있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건, '아, 나 또 완벽하려고만 했구나. 그래서 이것저것 다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구나'였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며칠 전 읽었던 책의 문장이 생각났다. 혼자 읽다가 피식하고 웃었던 그 문장.


(...) 이런 경험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농담처럼 '곰도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서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글 하나 썼다고 갑자기 방문자가 1천 명, 1만 명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다.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야 내 글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법이다. _마케터의 팔리는 글쓰기


100일간 매일 글이라도 써봤는가. 아니면 뭐라도 매일 해보기나 했는가. 곰도 사람이 되고 싶어서 100일 동안 매일매일 마늘과 쑥을 열심히도 먹었는데. 나는? '아 그래도 이건 좀 필터를 거쳐야 하지 않을까' '조금 더 완성도 있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 '아니 세금계산서 재발행하는 것도 이렇게 버벅거리는데, 혹시 너무 아마추어처럼 보이면 어쩌지' 이런저런 핑계만 대느라 100일은커녕 간헐적 작심 3일이 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 뭐라도 해보자 싶어 계속해서 올려본다.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성장일지든, 생각이든, 포트폴리오든. 생각에 고민이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리는 내게 연말까지 채찍질을 좀 해보기로 했다. 디자이너답게 내 회사 브랜딩도 멋지게 해서 완벽하게 나를 알려보고 싶지만, 지금 당장 내가 생각하는 '멋지게'의 기준에 도달하려면 아마 영원히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하다못해 섬네일 이미지 만드는 것을 고민해 콘텐츠를 발행하고 있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은 결국 불안함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불안은 창의성과 반비례한다고 한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창의성을 내세우기보단,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불안을 대체하는 것이다. '뭐라도 해볼까' 하는 궁리를 하다가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다 해보기로 했다. 개인 작업이지만,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불안이 조금씩 멀어진다. 나의 직업 자체가 창의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철저히 개인적인 창의성에 몰입할 때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일은 여러 갈래가 있다. 반드시 특정한 길로만 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해보든 저렇게 해보든, 성장의 폭이 크든 좁든. 중요한 건 '완벽한 길'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발걸음을 떼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그 행동 자체다. 때로는 '얼마나'와 '어떻게' 가느냐보다 더 중요한 행동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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