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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연 Jun 11. 2023

광화문을 연가하는 마음으로 나는

마음이 복작복작할 땐 빨간 버스를 탄다. 경기도민에게 이 버스는 서울로 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옛날로 치면 정말 빠른 말일 것이다. 힘세고 빠르고 쉬지않고 쭉 달리는 말. 빨간 버스는 배차간격이 짧아 자주 오며, 매우 빠르다. 막히는 고속도로에서는 버스전용차로로 돌파한다. 특히 밤에는 운전기사분들께서 얼마나 빨리 퇴근하고싶을지가 느껴질 정도로 휘청휘청거리며 무려 20분만에 당도할 때도 있다.



버스를 탄 후 내리는 곳은 보통 세종문화회관이다. 광화문은 서울에서 가장 애정하는 장소이다. 언젠가부터 광화문이 그렇게 좋았다. 일단 버스에서 내리고나면 보이는 탁 트이는 하늘과 드넓은 광장이 좋다. 그 광장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다. 현대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옛 건물들이 좋고, 멋드러진 산자락의 선들과 한옥 지붕선이 장엄하게 느껴져 좋다. 그리고 인왕산과 북악산, 멀리서는 북한산에서까지 너울대며 마치 호랑이처럼 타고 내려오는 바람은 호쾌하게만 느껴진다.



광화문쪽 정방향으로 걸어가다 고즈넉이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나는 이 길이 세상에서 단연코 가장 좋다. 파릇파릇 연두잎사귀들이 차츰 초록초록 진초록으로 그러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길, 해마다 오월이면 알사탕같은 연등들이 데롱데롱 걸려있는 길, 옛사람들도 이렇게 이 곳을 걷거나 수호하거나 했을 상상도 해보게 하는 길. 전생이 있었다면 나는 분명 광화문에 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생에 내가 만약 부자라면 분명 광화문 근처로 집을 얻었으리라. 앞일은 영영 모르는거니까 집을 얻으리라로 슬쩍 바꿔놓아본다. 내 집 앞마당 산책하듯 매일 걸으면 그 얼마나 좋을지 !



그 길은 시계방향으로 돌아도 즐겁고 반시계방향으로 돌아도 재미난다. 아침에도 아름답고 밤에도 기꺼이 호사롭다. 대통령이 그 쪽에 있었을 시절에는 무려 치안까지 좋았다. 여성이 혼자 한밤중에 음악을 들으며 걸어도 그토록 오래도록 아무런 불안감이 없는 길이 또 있을까. 그 길에선 걷다가 언제라도 갑자기 혼자 쓱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에 가볼 수도 있다. 삘이 꽂혀 구중궁궐 안으로 숨어들어가도 되고, 정처없이 걷다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재색도 안으로 들어가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는 익명성이 좋다. 그렇게 걷고 걷고 걷고 또 걷다 울어도 아무도 모를 일.


마음이 미어지거나, 가슴이 아프거나, 슬쩍 울고싶을 땐 늘 광화문까지 가서 그렇게 몇 바퀴를 걷고 왔다. 버스로 갈 수 있었던 가장 너르고 멀리 있었던 곳.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면 무수한 생각들은 어느 새 휘발되어 날아갔다. 그늘진 마음들은 햇빛에 바짝 쨍! 짠! 은 아니어도 바람결에 훠이훠이 휘적휘적 뒤적이며 마르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그토록 듣고싶었던 말인 괜찮다, 괜찮다는 말을 듣는 것도 같고. 그러고나면 다시 고난한 일상 속으로 가만히 걸어들어가 몸을 뉘여 잠을 청하고 싶은 욕구도 조금 생겼다.


지금도 그렇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가줘야 한다. 머무르다 흐르다 정처없이 지내며 가고싶은 마음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기회를 보아 빨간 버스를 타고 간다. 그제서야 조금 해방이 되는 듯 버스에서 탁 내리는 순간 숨이 쉬어진다. 광화문도 늘 변하니까. 광화문은 늘 흐르니까. 그러면서도 언제나 늘 그 곳에 있으니까. 너무 안 보다 오래도록 안 가다 갑자기 데면데면해지는 건 싫다. 확 변해버린 인상을 받아 그리운 것은 내 마음 속에만 남아버리는 것도 아리워져 싫다. 그러니 가야 한다. 가서 걸어야 한다.




흰 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 이영훈 작사, <옛사랑>, 1991


광화문에 관한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시는 이영훈 작사가가 쓴 노랫말이다.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어서도 광화문에 가고싶다.


가서 걷고 걷고 또 걷겠다. 자꾸만 역시 고통이 인생의 디폴트야 라고 하는 나에게 그래도 광화문이 있잖아, 라고 인생의 낙관을 쓱 보여주겠다. 두 발로 탁 딛고 서서 바람을 한가득 배불리 마시게 하겠다. 넘실대는 산자락 능선에 눈길을 따라 시선을 달리 넓혀보겠다. 그러니까 봐, 그래도 조금 살 만 하지? 하고는 싱긋 울고 돌아오겠다.


나리고 부유하고 서성이다  어느새 고요히 덮여가고

하이얀 눈이 바람결에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듯이ㅡ


광화문을 연가하는 마음으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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