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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연 Jul 04. 2024

이천이십사년 유월의 지연


#1


“우리 가족 오래오래 화목하게 같이 살게 해 주세요.”


어린 지연은 이 기도를 매일 했다고 한다.


어린이가 했던 간절한 기도여서였는지, 매일 한 공이 있어서인지, 또는 그저 다 우연의 일치인지, 운이 좋았던 건지, 30년이 넘도록 ‘화목하게’는 못 미치더라도 지연의 가족은 함께 살긴 살았다고 한다. 30년이 넘었으면 진짜 오래 산 거지, 암. 예전에는 보통 수명이 37세였다고 한다는데, 이 정도면 평생 살은 거나 다름이 없다. 어거지로 기워맞추었어도 살긴 살은 거야, 그치.


#2


그러다 시간이 흘러 조금 더 자란 지연은, 어느 날 깨달았다.


아, 그것은 생존을 위한 기도였구나. 벽에 오래도록 단단히 붙어 흡착하여 떼어내기 어려운 담쟁이덩굴처럼, 어떻게든 살려고 했던 거구나. 무서워서 부여잡고 있었구나. 너무 끔찍이도 두려워서 그랬구나. 그리고 그걸 안 지연은 문득문득 자꾸만 화가 났다고 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자란 유년시절은 없다 해도, 모부가 늘 싸우는 가정이 가슴에 얼기설기로 꼬여 수시로 툭툭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에 대해 분노가 자주 치밀었다. 어쩔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화의 원천이 바로 그곳에 있다고도 생각했다.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였으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아예 안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생각했던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다른 이들은 이런 생각을 잘하지 않거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고선 놀란 적도 있었다.


ㅡ난 늘 그래왔는데.

ㅡ언제부터 그래왔는데?


글쎄, 잘 모르겠는데. 기억이 남아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모부가 늘 싸우며 이혼을 하네 마네 죽네 사네가 일상이었을 때부터. 기물이 던져지고, 무언가가 넘어지고 날아다니며 벽지와 문짝이 자주 찢어질 때부터. 어딘가로부터 운전하고 돌아오는 차는 늘 휘청휘청 거리고 또 한참 싸우다 고속도로 한 켠에 깜빡이를 켜고 불안히 서 있을 때부터. 항상 모든 싸움의 끝은 애들을 누가 데리고 살지 한 명씩 각자 데리고 갈지 둘 다 데리고 갈지 정하자고 했을 때부터. 방에서 그 고성을 들으며 잠들기 전까지 성호경을 긋고 주기도문을 외고 계속 계속 똑같은 기도를 반복했을 때부터.


“우리 가족 오래오래 화목하게 같이 살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 오래오래 화목하게 같이 살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 오래오래 화목하게 같이 살게 해 주세요.”


어린 지연은 저 모든 단어를 필수적으로 계속 반복했는데, ‘같이’라는 단어를 빼먹으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것 같았고, ‘화목하게’라는 단어를 빼면 이렇게 계속 싸우다 더 큰 사단이 날 것 같았고, ‘오래오래’라는 단어를 빼면 겨우 하루나 이틀만 살다 헤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에서 살 길을 도모하는 동생이 “언니, 언니는 누구랑 살 거야?”라고 속삭이며 물을 때마다, 내가 그 질문에 답을 해버리면 정말로 그렇게 돼버릴까 봐. 야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하면서도 실은 마음 한 켠이 무섭고 두려웠을 때부터. 그러면서도 실은 어느 쪽이 더 나을지, 어떤 상황이 나을지 저울을 재며 나름 생각해 두는 나 자신이 싫었을 때마다. 그러다 그런 채로 살고, 살다, 살아지다, 조금 더 생각의 웅덩이가 커졌을 때는


아, 내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없었으면 엄마 아빠도 자유로웠을 텐데. 내가 없었으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이었을 텐데, 내가 없었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저리 사는구나. 그래도 지금이라도 자유롭게 각자 훨훨 떠나세요 그래서 부디 제발 평안해지세요 라고 그래도 나는 절대 말 못 해요. 정말 징그럽게도 생존하려는 마음을, 나 살자고, 나 살려고, 내가 살기 위해 말하지 못했을 때부터.


그렇게 아, 나는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의 반복은 “나는 안 태어나는 게 좋았다.”로 확정 짓고 쾅쾅 단언을 내렸고. 그 정언은 생각의 씨앗이 되어 지연의 마음속 아주 깊고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혹시라도 태어나기 전에 기회를 준다면 무조건 안 태어나는 쪽으로 선택했을 것이라고. 지금은 이미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네, 와 같은 생각은 어디 사후에 천국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기가 지옥이고. 죽으면 그냥 다 끝. 아주 딱 깔끔하게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완벽한 디 앤드일 것 같다는 생각으로까지도 종종 뻗어나갔다.


#3


지연은 이 정도쯤의 이야기는 너무나 평범하고 평범해서 어쩌면 이 정도면 화목하고 단란한 어느 가족의 일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 유명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것처럼, 그래 매일매일이 꼭 그렇게 항상 불행하지만은 않았으니까. 분명히 좋은 날도, 함께여서 행복한 순간도 가끔 있긴 있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왜 그 생각만 떠오르면 우울해질까. 왜 자꾸 무기력에 잠식될까. 어떤 고요가,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감이, 멀쩡한 듯 보이는 평범이, 그 정도면 꽤 썩 괜찮음으로까지 여겨지는 알 수 없는 감사함과 죄책감과 자괴감이, 때로는 나 조차도 무언가를 다 때려부수고 때려치우고 싶은 분노도. 왜 이렇게 뭐가 자꾸 서로 뒤범벅되어 엉킬까.


그래서 조금 컸다 싶은 지연은 그 씨앗과 그 뿌리와 그 뻗어나간 가지들과 나뭇잎들, 그리고 그것들이 드리운 그늘을 모두 다 꽁꽁 숨겼다. 굳이 꺼내서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도 싫었지만, 스스로가 그걸 보기 싫어서 가두어놓은 것도 있었다.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야, 별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하면서.


#4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던 지연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덮고 덮고 아주 잘 덮고 완벽하게 밀봉했다고 생각한 그것은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어, 여기 아주 잘 있었어 하며 뚜껑이 확 열려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 오래도록 없었던 취급을 했던 것이라 그게 열렸다고도 생각을 못했다. 아니 어쩌면 덮었어도 늘 스멀스멀 기어 나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계기는 별 거 없었다. 아니 별 거에 가까운 것이려나. 늘 싸우던 모부가 ‘드디어’ 이혼을 하겠단다. 늘상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함께 합의서를 작성하고 법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와아 이건 정말로 드.디.어가 맞네. 정말 드디어다. 한다, 한다, 한다고만 30년 넘는 한 세월을 지냈었는데 이제야 진짜 실제로 한다. 우리 모두에게 해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어찌 되었든 누군가의 모, 누군가의 부로서 책임을 다 한 것일 수 있다. 정말? 그러니까 그동안 수고했다고, 애썼다고, 잘 되었다고 오히려 축하할 일일 수도 있겠다.


지연과 동생은 처음에는 그럼에도 가족상담을 다 같이 해보자고 권유해 보다가, 그 지긋지긋하고 똑같은 한탄을 또 각각 들어주다가, 서로의 말이 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일방적인 말들에 같이 화를 내었다가, 울었다가, 지금은 잘 되었다고,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서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그래 그래 맞아, 잘 된 일이야, 우리는 우리대로 잘 지내면 돼. 우리는 서로가 있음을 감사하자, 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5


ㅡ 지연아.


그런데 그러다 혼자 있을 때마다, 있지, 하고 갑자기 뭐가 툭 튀어나왔다. 무언가 자꾸만 말을 걸었다.


어린 지연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는 물음을 마치 괜찮냐고 하는 듯한 눈으로.


ㅡ그래서?


자꾸 내 상태를 묻는다. 다 큰 지연은 작은 지연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내저으며, 웃음까지 짐짓 지어 보이며, 아 까짓 거 이거 별 거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드디어 이제서야 끝나는 거야, 하려 한다. 그러려는 순간 갑자기 후두둑 거리며 뒤에 선 나무가 드리우는데, 그 잎들이 그 뿌리가 그 기둥이 그 덩굴손들이 너무나 우람해서, 너무도 견고해서, 너무 우뚝 솟아있고 가득 가득 그득 그득 덮여있어 차마, 감히 답을 하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자기 연민에 쌓여 엉엉 우는 사람이고 싶지 않은데, 더 이상 나는 살기 위해 그 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도 생각만 해도 너무 지긋지긋해서 진절머리 나는데. 그게 드디어 이제서야 다 끝난다는데. 나야말로 너무 좋은데. 와악 여러분 드디어 끝났어요 아무도 듣지 않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관중들을 향해 손뼉 치고 노래 부르며 춤추고 싶은데. 안 태어나고 싶었다는 둥, 혹시 복을 쌓아 이 생이 끝났을 때 선택권이라도 주어진다면 그때는 꼭 안 태어나는 것으로 기필코 정할 것이라는 둥 하는 중얼거림도 기정사실이니 이제 그만 말해도 되는데. 나는 이렇게 풍채 좋게 커서 그 딴 영향 한 줌 따까리도 받지 않는 튼튼한 어른인데.


자꾸만 어린 지연이 솟아 나온다. 저기 서 있다. 말을 건다. 그리고 그제서야 안다.


그 어린 지연이 나다.

인정하고 목도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어리디 어리다.


#6


언젠가 구병모 작가가 ‘눌러서 막지 않으면, 지금껏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 올린 둑이 갈라져 걷잡을 수 없는 물길이 열릴 것만 같았다.’고 표현한 문장을 읽고 엉엉 운 적이 있다.


너무나 적확하고 맹렬한 그 문장만으로도 나는 그 ‘걷잡을 수 없는 물길’이 열린 것 같아 후련했고, 슬펐고, 두려웠고, 그럼에도 나 나름이 세워두었던 견고한 둑 중 작은 틈새가 조금 갈라진 것이 자유로왔다.


늘 나는 그 틈새에 오래도록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것,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을 쏟고 싶었다. 그러다 물길이 열리면, 그 물길이 가닿는 곳이라면, 그 물길을 따라 어디로든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서야,

그럴 수 있는 순간이 이제서야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천이십사년 유월의 지연이었다.




202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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