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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요

by 마음씨

오늘 어린이가 참가했던 큐브 대회는 학군 좋기로 소문난 지역에서도 유명한 어느 사립 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어린이 덕분에 알게 된 루빅스 큐브는 참으로 가지각색의 모양이 많았는데 (어떤 건 섞기 위해 돌리는 것조차 어려움) 그래도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고 프로 선수들도 끝끝내 차지하고 싶어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3*3 이다.


장소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지만 대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은 지역 대회여서 그런지, 오늘은 이름 날리는 형 누나들이 많이 나타나진 않았다. 덕분에 어린이도 아슬아슬한 기록으로 2차 라운드도 올라가보고 ㅎ 매번 대회 끝나면 하는 다짐이지만 다음에는 제발 조금만 더 준비해서 오자.


아무튼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게 아니고, 이 사진은 으리으리한 사립학교 라운지를 촬영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출전자 중 유명인이 많지 않은 가운데 챔피언십 기록 및 스폰서 보유자들이나 입는 집업을 입고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진 속 저 청년은 이 순간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편안하고 유려하게. 그는 오늘만도 3*3 풀이를 6.85초, 5.99초 등을 기록하며 자신의 과거 히스토리를 갱신하고 있는 몇 선두주자 중 하나다. (결승까진 아직 더 남음)


시합이 열리는 사립학교 라운지에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는 것도 좋았고 순서를 기다리다 지루한 참가자들이 오가면서 뚱땅 뚱땅 멜로디를 들려줄 때만 해도 귀엽다 하고 지나쳤는데. 열기와 큐브 소음으로 가득 찬 강당이 답답해 잠깐 벗어나는데 어디서 낯익은 선율이 들리는 거다.


나는 슈만 협주곡을 아주 좋아한다. 반가운 마음으로, 이 좋다는 사립학교에 뭐 다재다능한 고학년 중 하나이거나 심심한 보호자 중 한 명이려니 하고 라운지에 들어섰는데 큐브 점수 1위를 달리고 있는 청년의 등판을 맞닥뜨렸을 때의... 그 허무함? 허탈함이라니 ㅎ 하 참, 그 심정을 설명하기 어렵네.


곁을 지나가면서 눈이 마주쳐 멋지다는 의미로 웃어주었다. 그는 잠깐 연주에 몰입하면서 기분이 좋아보였다. 오가는 다른 참가자들 중 몇 명이 금세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는 내가 십수년 전 학교 연습실에서 많이 보던 그런 풍경으로, 옆에 다가온 사람들과 잠깐씩 말을 나누면서도, 슈만의 연주를 이어나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름답게.


한참을 어이없는 감정으로 그의 연주를 듣고 있다가 강당으로 돌아와 어린이에게 물어보니 그 형은 신발도 안 신고 돌아다닌댄다. 나중에 자세히 보니 양말 바람으로 강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와 나 진짜. 남편에게 얘기를 하니 문득 그런다, 저 집 부모님은 얼마나 수천번 말했겠냐고, 제발 집 밖에서는 신발을 신어라. 그래서 나도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러다 결국 어느 순간 포기하셨겠지,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너 생긴 대로 살아라. 허허.


이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딱 한 번 더 있었다. 어릴 때 다니던 교회 옆자리에서 함께 바이올린을 하던 오빠, 취미로 한다면서 브람스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연주하고, 나보다 더 음악사를 줄줄이 꿰고 있어서 시험 앞두고 내가 도와달라고 sos 했던 그 분. 사진 방식으로 책도 악보도 순식간에 읽어내던 (초견이 나보다 몇 배로 좋던) 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하고, 잘하는 걸로 밥벌이를 하려고’ 바이올린은 취미로 남겼다는 말을 15년차 전공생 앞에서 해서 나를 눈물나게 했던. 잘 지내고 계시려나.


뭔가 즐기는 것, 타고난 것, 잘하는 것, 노력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뒤엉켰던 오늘의 마음, 결론 없는 이 글로 쏟아내고 나는 또 내일의 내가 겪을 눈 앞의 일들에 연연해야지. 아 인생 증말 뭘까. (끝)


463956340_18471057463012307_3816587540456317188_n.jpg 그리고 이 청년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원문글: https://www.instagram.com/p/DBVjYqXRX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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