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셀프리더십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내 모습을 발견한다. 아닌 척했지만 불안한 미래, 아닌 척했지만 나도 모르게 나왔던 깊은 한숨. 늘 객관적으로만 보려는 이성적 잣대, 명령하고 점검하는 말투. 엄마로서는 따뜻한 면이 부족한 나의 뒷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상냥함과 예의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
부인하고 싶지만, 아이들은 자라면서 나를 닮아가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한 것은 아이들이 금세 잊어주길 바라고, 내가 바라는 이상의 모습이 진짜 나라고 착각한다. 진실이 드러나면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마음에서는 부끄러움이 들면서도 말이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엄마의 잘못을 지적하면, 미안하다고 말하기보다 그럴만한 이유를 찾는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훌륭한 인격과 면모를 갖추기를 원한다.
이런 부족한 모습은 <자녀교육>, <부모교육>에 관한 책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자녀교육이 문제집이라면, 정답이 제시가 될 텐데. 나에 꼭 맞는 상황이 없으니 결국 답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가끔 정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허무할 때가 있다. 책의 대부분이 비슷한 내용이고 전문가들의 견해는 늘 그렇듯, 부족한 엄마임을 일깨워줄 뿐이다. 그래서 나의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한 숙제고, 넘어야 할 산이고, 늘 아이와의 갈등 앞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된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으면 다시 희망을 가지고 해결 방법이 보인다. 나의 아이들이 왕따를 벗어나고, 말할 수없는 아픔의 사춘기를 지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듯 말이다. 하지만 표준화된 방법들을 실제 내 삶에 적용시키는 것은 참 쉽지 않다. 알지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고, 알지만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알지만 반복적인 실패로 인해 무기력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산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정상은 있기는 한 걸까?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신의 사춘기는 잘 지낸 것이라고 착각한다. 요즘 아이들은 왜 이렇게 유난스럽게 사춘기를 치르느냐고 한다. 우리 때는 내 마음을 표현하기보다 잘 보이려고 애썼던 때다. 그래서 아직도 자신을 찾는 모습이 서툴지 않은가.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표현에 익숙하고 자기애가 강하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특별하고, 창의적이, 창조적인 아이들로 키운 결과다. 우리의 바람대로 잘 큰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힘들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모범이 되지 않으면서 과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부터 잠시 쉬었던 어머니학교 봉사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처음 스태프 모임을 하던 날, 봉사자들은 각자의 참여 이유와 고민을 나누었다. 내 안에 쌈닭이 있다고 고백하는 엄마, 자신 때문에 공황장애를 앓게 된 며느리가 있다는 엄마, 목사의 딸로 태어나 늘 참고만 살았다는 엄마, 아이들의 사춘기로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엄마, 폭주족이 되어버린 아들로 고민하는 엄마, 아들이 친구의 코뼈를 부러트려 수습하느라 참석하지 못한 엄마도 있다. 재수를 했지만 전문대를 가게 된 딸을 바라보며 힘들어하는 엄마는, 몇 달간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확신이 있었다.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 그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 사건이 분명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확신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엄마의 사랑,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순간, 희망이라는 단어조차도 꺼내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디딘 발을 계속해서 앞으로 갈수만 있다면, 정상은 곧 보이게 될 것이다.
선배 언니들은 말한다. '정상에 올라가면 또 다른 산이 보여.'
아마도 그 산은 이미 하나의 산을 넘은 만큼 조금 더 수월하게, 조금 더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