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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훈 해설위원 Sep 03. 2022

시세차익의 추억

돈에 대한 이야기는 재밌다. 짧고 격렬할수록 재밌다. '누군가 학교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입사를 한 후 현업에서 십 수년간 걸쳐 경험을 쌓아 본인만의 노우하우를 접목하여 창업,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나스닥에 상장, 어느 날 우수 기업인으로 대통령 초청을 받아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손목시계를 선물 받고, 다음 날 장성한 딸의 결혼식에 눈물지으며 참석한다.'라는 192자의 석세스 스토리보단 '작년에 비트코인에 500만 원 넣었는데 지금 200억' 이게 훨씬 임팩트가 있다. 이렇게 돈을 벌려면 시세차익을 얻어야 한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라는 개념을 머릿속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해서 현금화까지 끝내야 한다. 


언론이나 또는 종종 페친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뿐만 아니라 실제로 내 주변 지인 중에서도 순식간에 자본가 계급으로 올라선 이들도 있다. 스맥다운 생중계를 위해서 강남역에서 판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해볼까'라는 생각이 실행 직전까지 갔다가 역시 아니다 라는 결론으로 끝냈다.  우선적으로 나에겐 그런 승리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보자. 내게 싸게 사서 비싸게 판 기억은 없다. 유사한 사례로 싸게 사서 조금 더 싸게 판 정도밖에 없는데 미니 노트 도시바 리브레토 30 이야기다.


때는 1987 아니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전자업체 도시바는 '노트북'의 개념을 만들어낸 회사다. 여러 전자업체들이 독자적 개성을 지난 노트북을 내놓으면서 춘추전국시대를 이루어 나갈 즈음 도시바가 '리브레토'라는 폭탄을 투하했다. 1996년 첫 선을 보인 리브레또 20은 840g이라는 엽기적인 무게와 210 x 115 x 34mm에 불과한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Windows 95가 쌩쌩 돌아가는 모습으로 전 세계의 모든 노트북 사용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화 '언더 시즈'에서 스티븐 시걸이 사용하던 애플의 PDA 뉴튼보다 작은 사이즈였으니 당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의 노트북 마니아들이 얼마나 열광했을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그 충격은 2년 뒤 발매된 리브레토 30으로 더 증폭되고 선명해졌다. 머신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당시 이 제품을 '나까마'(정식 딜러가 아닌 수입상 일명 보따리)로 밖에 접할 수 없었는데 코스모 텔레콤이라는 중소기업에 한글자판까지 갖춘 정식 수입 버전을 출시한 것이다. 그런데 가격이 문제였다. 일본 가격보다 두 배를 뛰어넘는 무려 235만의 초고가였다. 이 가격정책과 회사 실적 부진이 겹쳐 코스모 텔레콤은 부도가 났고 리브레토 30 은은 199만 원, 150만 원, 100만 원, 80만 원에 이어 17만 5천 원까지 가격이 폭락했다. 



경기도 평택에 살면서 바이크 동호회 활동으로 서울을 종종 오가던 나는 당시 용산에서 일하던 동호회 형으로부터 이 정보를 접하고 바로 을지로 3가의 어느 허름한 사무실에서 현찰로 이 제품을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난 리브레토 30에 대용량 배터리와 56K 모뎀을 연결했고 한글을 깔아서 워드 작업을 했다. 이 머신으로 월간 모터바이크 같은 곳에서 번역 외주를 받아 알바를 했고, 여러 컴퓨터 잡지에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글을 쓰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언제 어디서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라는 개념에 가장 충실한 머신이었다. 당시 커피숍은 삐삐로 호출한 사람과 연결시켜주기 위해서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놓여있었고 발신은 막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아주 가끔 01410 같은 PC통신 접속 번호를 미쳐 막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어쩌다가 그런 핫스폿을 찾으면 종업원 몰래 공짜 피씨통신을 즐기기도 했었다.


아무튼 약 3년간 실전 전장에서 맹활약했던 리브레토 30은 점점 무거워지던 윈도즈를 견뎌내지 못했고 발열도 극심해졌다. 이후 거의 내가 샀던 가격에 장터란에서 처분을 했고 이후 리브레토 ss를 구하기도 했으나 30 같은 전작은 없었다.


아마 17만 5천 원에서 사서 15만 원 정도에 팔았을 것이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판 것은 아니지만 싸게 사서 조금 더 싸게 판, 거의 유일한 거래 상공 사례가 바로 이것이다.


약 45년을 살면서 이 정도 경험밖에 없는데 앞으로 살아갈 약 30년~45년 사이에 그간 없었던 일들이 일어날까. 아니 십 수년이 아니라 수년 또는 수 개월내에 나에게 이런 행운이 일어날까. 그리고 그런 행운을 위해서 내 삶의 절대 시간 중 상당 부분을 스마트폰 거래 앱을 보면서 보내는 게 가능할까.


책을 읽다가, 방송을 하다가, 운동을 하다가, 화장실에서, 바이크를 타고 이동하다가, 거래 알림 창을 지속적으로 봐야 한다면 과연 나는 행복할까.

난 역시 거래보단 채굴에 적합하고 코인보단 원화(krw)가 어울린다는 결론이 강남역 중앙차로에서 1151번을 타고 판교 이매촌 서현역 정류장에서 내릴 즈음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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